육이오, 삼팔선을 넘어 이태백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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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이오, 삼팔선을 넘어 이태백의 시대로
  • 최연구
  • 승인 2003.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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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불황과 실업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고 있다. 경기가 어려우면 사회가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불황 그 자체라기보다는 불황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불안감일 것이다. IMF 금융위기때 엄청난 경제적인 타격을 받았던 한국사회는 여전히 위기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늘로 치솟았던 집값은 여전히 현실세계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고, 연말인데도 소비자들의 구매심리는 위축될대로 위축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일자리다. 버젓이 대학을 나오고 능력을 갖추어도 변변한 직장 하나 잡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렵지만 있던 일자리를 지키기는 더더욱 어려운 형국이다.
외환위기때 ‘사오정’,‘오륙도’,‘육이오’란 말이 유행했다. 서유기의 등장인물, 섬이름 아니면 동족상잔의 비극적 전쟁을 가리킨 말이 아니었다. ‘45세면 정년’이고 ‘56세까지 일하면 도둑’이요, ‘62세까지 직장에 있으면 오적(五賊)’이라는 이야기였다. 기업에 구조조정 바람이 불어 닥치면서 명예퇴직, 조기퇴직이 잇달았고 잘나가던 시절 철밥그릇을 지키며 철석같이 종신직장을 믿어왔던 직장인들은 어느새 40대 나이에 거리로 나앉았다. 하지만 사오정, 오륙도란 말도 이제는 옛말이 돼버렸다. 그나마 45세 정년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했던 젊은 가장들은 40대 정년도 쉽지 않음을 깨닫고 있다.
얼마전부터 ‘삼팔선’이란 새로운 유행어가 나돌고 있다. 삼팔선의 진원지는 국내 굴지의 이동통신업체 KTF이다. 지난 11월 14일 KTF는 희망퇴직을 발표했는데, 퇴직신청자는 모두 57명이었다. 이들의 연령층을 보면 40대가 38명, 30대가 19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38세가 되면 정리대상이 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돌 수밖에 없다. 이제 ‘38세가 되면 나가라고 해도 선선히 물러나야 하는’ 소위 ‘삼팔선’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삼십대 정년 마지노선인 ‘삼팔선’마저도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분단국가에서의 삼팔선은 이래저래 참 비극적이다.
30-40대 가장들이 대거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것도 큰 문제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더 암담한 것은 청년실업자들이다. 젊은 대졸자들은 직장 한번 다녀보지 못하고 왕성한 청춘시절을 백수건달로 지내야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온 말이 바로 ‘이태백’이다. 이 불황에 시나 옲조리는 풍류가 왠말이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태백이란 ‘이십대의 태반이 백수’라는 의미다. 실제 올 3월의 전체 실업률은 3.6%였고 실업자는 80만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20대 청년실업자는 37만명이나 된다.
사오정, 오륙도, 삼팔선, 이태백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웃, 친척, 우리 집안의 이야기다. 이런 유행어는 현실의 치부를 촌철살인의 비유어로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여러 경로를 통해 나온 믿을만한 통계치들도 이런 유행어가 결코 우스개소리가 아님을 입증해주고 있다. 노동연구원의 최근 조사결과에 의하면 직장인들의 체감정년은 36.5세로 나타났다. 또한 지난해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정년퇴직 비율은 1000명중 4명에 불과했다. 이런 추세라면 정년퇴직자가 천연기념물이 될지도 모른다. 혹시나 60세에 정년퇴직하면 정말이지 마을잔치를 벌여야 할지도 모른는 일이다.
서구사회는 ‘고령화 사회’를 거론하며 실버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사회는 당장 40대부터 인생이 막막해진다. 직장에서 밀려나면 ‘공인된 겉늙은이’가 되는 것이다. 종래에는 20년 공부하고 30년 일하다 10년쯤 쉬고 저세상으로 간다는 ‘20-30-10’의 인생60시대였지만, 평균수명이 늘어난 마당에 이렇게 조기퇴직이 계속된다면 앞으로는 30년 공부하고 10년 일하다 40대 이후에는 암물해지는 ‘30-10-40의 인생80시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현진건은 소설에서 ‘술 권하는 사회’를 그렸다. 지금 우리사회는 조기퇴직을 통해 ‘조로(早老)를 권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9.5매)
최연구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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