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동포 연구자에서 늦깎이 사회운동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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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 연구자에서 늦깎이 사회운동가로
  • 김제완
  • 승인 2003.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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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일자 재외동포신문에 게재된 이광규 현 재단이사장 인터뷰 기사입니다. 이 사이트에 올라있지 않다는 독자의 지적에 따라서 뒤늦게 올립니다.--편집자

요즘 한국에서 많이 이용되는 인터넷 서점에서 도서검색 난에 ‘재외동포’ 또는  ‘동포’라는 말을 넣고 떠오르는 목록을 보면 대부분이 어느 한 사람의 저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가 바로 이광규 교수이다. 근 40년의 연구생활 중에 펴낸 54권의 저서중 17권이  재외동포를 주제로 한 것이다. 이같은 연구활동을 통해 ‘재외동포학’을 정립해냈다.

이교수는 지난해 고희를 맞았지만 지금도 저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 사회과학분야에서 관심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내셔널리즘에 관한 연구서와 함께 재미동포사회의 ‘에스닉(ethnic 인종적) 비즈니스’ 관련  저서를 집필중이다. 2000년에 히로시마  대학에서 강의한 재일동포 주제 강연을 모은 일본어판 저작도 출간을 앞두고 있다.

동포문제 학자들의 모임인 재외한인학회를 89년 창립하여 올해 한경구교수에게 회장직을 물려줄 때까지 13년동안 이끌어왔다. 그사이에 불과 수명에 불과했던 재외동포 연구자들이 수십명으로 불어났다. 이외에 인류학자들의 모임인 ‘한국가족학회’를 창립해 이끌었다.

98년 서울대 교수직을 정년퇴임한 뒤에는 늦깎이  사회운동가로 입문했다. 중국과 연해주동포 지원을 위한 시민단체  동북아평화연대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주3일  사무실에 출근한다.

그리고 지난 2월 발족한 재외동포연대 추진위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재외동포신문의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4년 늦게 졸업 오히려 유학 기회>

인터뷰는 지난 12월13일 동북아평화연대 사무실에서 가졌다. 12월이라면 재외동포신문이 탄생하기 전, 어머니 뱃속의 태아상태였던 시기다. 이때부터 최근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만나서 말씀을 들었다. 이교수는 기자와 만나자마자 성장기를 회고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의 이야기는 한국전쟁에서 시작된다. 중학교 5학년, 지금으로 치면 고교 2년에 한국전쟁이 터져 청년 이광규는 해병대에 입대했다.  3년을 복무하고나서 고교 2년  수료증이 나왔지만 그걸로는 대학에 갈 수 없어  다시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녀야  했다. 동창생들보다 4년이나 늦어진 것이다. 그러나 뒤늦은 출발이 오히려 학자의 길을 가게 된 행운이 되어 주었다.

“이런 걸 운이라고 하나 봐. 4년전에 졸업한 동창생들은  무슨 학과를 나왔든 학교 선생을 하면 최고의 직업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졸업할 때는 유학을 가네 대학원을 가네 이런 소리가 나왔다고.”

졸업 후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교사로  한 학기를 가르치다가 60년에 오스트리아로  인류학 공부를 위해 떠났다. 비엔나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친 뒤 귀국해서 65년부터 98년까지 30여년 동안 서울대에서 강의했다. 당시 한국에서 인류학이 낯선 분야였기  때문에 그는 30대 초반에 벌써 인류학의 중견 학자가 되어있었다.

그가 동포문제에 시각을 돌린 데는 원시부족에서 소수민족으로 흘러가는 당시 인류학의  추세가 계기가 되었다. 인류학자들은 연구대상이었던 원시부족들이 국가에 편입되면서 소수자로서 차별을 받자 연구대상을 소수민족으로 확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개인적인 경험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76년 아시아 인류학회에 참석차 도쿄를 방문했던 길에 우연히 만난 한 일본인 교사를 따라 재일동포 모임인 ‘민투련’ 집회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1970년 시작된 박종석군의 히다찌  사건을 지원하기 위하여 조직된 민투련은 이후 재일 한국인들의 권익향상을 위한 단체로  탈바꿈했다. 여기에서 이 교수는 편견과 차별에 대항하는 재일 한국인의 모습과 그에 동조하는 일본인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재일동포에 대한 연구를 결심한 그는 82년 12월부터 오사카 이쿠노구에서 현지조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가 1983년에 세상에 나온 <재일한국인>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펴낸 17권에 이르는 재외동포 연구서의 첫 출발이었다. 이광규교수의 회고가 끝날 무렵, 인터뷰는 본격적으로 재외동포사회의 현안문제로 이어졌다.

-세계 어디를 가나 한인 사회가 형성돼있지만 밖으로는, 즉 타민족에는 배타적이면서 안으로는 분열된 모습이 나타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한국에서는 누군가를 만나면 일단 학연·지연·혈연 같은 연줄을 따져서 거리와 높낮이를 정해 놓고 관계를 맺잖아요. 그런 관계가 외국에 나가면 다 끊어진다고. 한국에서  금송아지를 타고 다녔어도 아무 소용이 없어. 관계를 새롭게 맺어야 하는데 잘 안되는 거지요.  그래서 단결이 안돼. 서양인들은 배경이 어떻든 간에 취미나 이상이 같으면 바로 친구가 되거든. 한국사람은 자꾸 따져요. 같은 바다 속에 들어간 물고기들이니  더 가까워져야 되는데 그게 안되는 건 게마인샤프트(공동사회)적인 훈련이 안되어 있어서 그래요.”

-우리도 과거에 두레같이 상부상조하는 전통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게 아주 좁은 혈연 단위에서 한 발 더 나간 마을 단위인데, 마을을 벗어나면 잘 안해요. 옛날에는 대개 동족부락 아니에요? 그게(두레가) 지금 해외는 둘째치고 서울에서는 됩니까? 우리는 혈연은 강한데 다른 게 약해요. 학연과 지연도 결국 혈연의 연장선에 있는 거지.  자기 지역의 특색을 지키기 위한 게젤샤프트가 아니라 게젤샤프트(이익사회)적인 동향인 모임이라고.”

<우리 민족에 프라이드 가져야>  

- 외국인들에게는 요즘 동포문제 현안으로 떠오른 ‘한민족 네트워크’ 구축이 민족 이기주의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두가지로 나누어 설명해보지요.  9·11 이후 이야기되는 게 인류 생존경쟁 단위가 국가에서 민족으로 바뀐다는 거예요. 국가 내에 있는 민족이 더  목소리를 높이는 게 바로 21세기 내셔널리즘이란 거죠. 이런 대세에 우리도 편승해야 한다는 측면이 하나 있어요. 또 하나, 발전 단계로 보면 일본이나 중국은 강한 내셔널리즘을 거쳐 지금은 이른바 초내셔널리즘의 단계로 넘어왔어요. 이전 단계에 굳건한 내셔널리즘이란 게 있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전단계 내셔널리즘이 없거나 아주 약했고, 부정적인 거였어. 그래서 긍정적 내셔널리즘으로 바꾸는 작업과 함께 그 단계를 넘어 인류 보편적인 내셔널리즘으로 넘어가는 두 가지 일을 해야 해요.

97년 싱가포르의 이광요 전수상이 샌프란스코에서 전세계 화교를 모았어요. 대륙의 12억 인구와 3천만 화교의 재력, 미국에 있는  3백만 화교의 두뇌를 합해 전세계를 이끌자는  거죠. 그게 요즘 유행하는 민족주의야. 우리 민족만 잘 살고 다른  민족 다 때려잡자는 게 아니라 자기 민족을 살려서 온 인류에게 이바지하자는 거야. 이렇게 나가자는 거지. 자기  프라이드가 없이는 다른 민족을 사랑할 수도 없어요.”

-요즘 국내에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외국인노동자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가 아주 묘한 나라야. 미국과 일본에 엄청난 불법체류자를 보내던 나라가 어느 날 갑자기 불법체류자를 받는 나라가 됐어. 보내는 나라인 동시에  받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이거요. 갑자기 주인 노릇을 하게 됐는데, 외국인 노동자를 다룰 줄 모르는 거지. 우리가 경제적으로는 12등이 되었다고 하는데, 삶의 질이나 사고방식,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는 한참  떨어지거든. 이런 거를 외국에서 배워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요. 해외동포는 우리를 대신해서 밖으로 배우러 간 사람이야. 한민족 네트워크를 통해서 동포들의 경험을 나누어야지요.”

-동포사회 현안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만 그중 평통 문제를 해결할 어떤 대안이  있을까요.

“내 생각에는 평통(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해외자문위원회)을 없애고 차라리 동포를 대변할 수 있는 대변자를 뽑았으면 해요. 남북한 모두 양원제를 만들어 동포가 뽑은 대표들을 상원격인 ‘한민족회의’라고 하면 좋겠어요.  그래서 세금·여성·환경문제 등에  대해 일정한 권한과 의무를 주어 해외의 경험을 배우자는 거지. 지금 평통위원들은 괜히 서울 와서는 호텔에서 잠만 자고, 약 먹은 파리모양 말 한마디 못해. 그사람들 정말 바쁜 사람들인데  얼마나 손해야.”

-미국 동포사회 일각에서는 선거가 동포사회를 더욱 분열시킬 것이라고 우려하던데요.

“처음 몇 년간은 혼란이 있겠죠. 그 뒤에는 정착이 될 거예요. 얼마 전에 어느 미국 동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우리 단체에서 연변과 연해주를 답사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곳 동포들이 사는 모습하고 독립운동 유적지 등을 보면 민족정신이 확 들어요. 그래서 미국 동포들에게 올해 아이들을 몇명 보내달라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공산국가에 어떻게 아이들을 보내요?”하더군요. 말문이 막혔어요. 완전히 60년대구나. 이런 걸 인류학에서는 ‘프로즌 페노메넌(frozen phenomenon)’이라고 해요. 이민갈 때  머리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동결현상이에요. 현지도 변하고,
모국도 변하는데 조국에 대한  생각은 딱 굳어버려. 말과 의식이 다 굳어 있어요.”

-재외동포법이 2003년 말까지 개정이 안되면 폐기되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개정하자는 쪽과 다른 관련법을 통해 대치하자는 의견이 맞서고  있죠. 내가 보기에는 개정해서 유지해야 할 것 같아. 대원칙은 그대로 갖고 시행령에서 조절하면 되거든.  흐지부지 폐기하는 건 안 된다고.”

-폐기하자는 건 주로 외교통상부 쪽의 생각인가요?

“그렇지. 이 법을 고쳐서 해결하자면 무려 백몇가지 조항을  고쳐야 하니까 폐기하고 관련법으로 어떻게 해보자는 보고서를 법학자들이  낸 게 있어요. 자기들이  동포법을 만들자는 보고서를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잖아.”

<차기 동포재단 이사장 물망에>

-재외동포재단과 관련해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재단 직원들의 전문성 부재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자주 들려오는데요.

“지금 재단은 제일 안되는 쪽으로  가 있어요. 재단은 기초자료를  정리해서 외교통상부에 정책 제안을 하는 곳 아니에요? 이걸 안하고 공중에 떠있어요. 무엇보다도 외교통상부 대기소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바로 그렇게 됐어요. 언제 여길 떠날까하는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슨 일을 하겠어. 외교통상부 출신 아닌 사람은 다 도태가 돼. 다 나가고 몇사람 남았는데 발언권도 별로 없는  거야. 우리가 교민청을 요구할 때  종사자를 따로 뽑아서 어느 나라에 영사로 나가든 교민만 담당하도록 하려고 했어요. 어느 나라로 가든 다른 데는 절대 못 가고 평생 교민담당만 하도록 하면 전문성도 생기지 않겠어요.”

이광규교수는 3년전 재외동포재단의 두번째 이사장으로 물망에  올랐었다. 그리고보니 그가 재단을 이끌었을 경우 지금쯤 재외동포재단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재외동포 문제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적인 견식을 갖고  있으면서 따뜻하고 겸손한 그의 품성을 감안하면, 지금과는 사뭇 다른 변화가 나타났을 것이다.

칠순의 나이지만 사회운동가로 변신한 뒤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교수는 이제 동포문제에 관한 이론과 현장경험을 모두  갖추었다. 동포문제 전문가들 사이에서  올해 10월로 임기가 끝나는 권병현 이사장의 후임자로 다시 거론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김제완 기자

약력
△1932년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과 졸업 △비엔나대학교 민족학과 졸업 철학박사 △1967~1998년 서울대 사범대와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  역임. △서울대 명예교수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 △동북아평화연대 이사장 △재외동포신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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