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수재에 힘모으는 세계한인회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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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수재에 힘모으는 세계한인회장들
  • 오재범 기자
  • 승인 2009.10.0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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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300여명 사망실종, 37만명 이재민 발생

 

지난달 26일 오전 폭우로 물에 잠기기 시작한 필리핀 현지가옥들. 이번 비는 불과 하루만에 700mm가 넘게 쏟아져 37만명의 이재민이 속출했다. (사진제공=세계재난구호회)

 


△물폭탄 터진 필리핀 마닐라... 한비문화축제 취소

마닐라, 9월 26일 오전 10시=새벽부터 내리던 비가 멈추지 않고 빗줄기가 더욱 굵어졌다. 필리핀은 비가 자주오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태풍이 지나간다는 방송이 나왔지만 크게 염려할 수준은 아니라는 지인들의 말이었다.

오후 12시. 기자는 당시 만달루용 시에 있는 지인의 아파트에서 ‘한비문화축제’ 행사가 열리는 마닐라 시로 가기위해 아파트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잡히지 않았다.

택시기사들이 “비가 많이 온다”는 이유로 승차거부를 했기 때문이다. 이에 기자가 500페소(한국돈 1만 2천원)을 제시하자, 한 택시 기사가 “1000페소(한국돈 2만 4천원)을 주면 가겠다”고 했다. 그곳까지 보통 요금이 150페소(3500원)이지만 도리가 없었다.

가는 중에 고현진 한인회 사무국장과 통화했다. “비가 많이 오지만 아직까지 취소결정이 나지 않았습니다. 가능하다면 강행하려고 합니다”고 말했다. 1년에 단 1번. 이미 수 천만원이 들어간 대형행사를 취소하긴 어렵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닐라를 관통하는 엣자(EDSA)에 차들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택시기사는 이미 약속한 금액이 있기 때문에 이리저리 샛길을 돌아 목적지로 가고 있었다. 절반쯤 갔을 때 시작시간인 2시에 가까워오자 고 국장에게 다시 연락했다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닐라 전역이 이미 물에 잠겼습니다. 우리도 행사장에 갇혀 있는 상황이라 행사취소를 결정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다급한 고국장의 목소리였다.

택시기사에게 출발지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길은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갈수도 올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택시기사가 “난 도저히 돌아갈 수 없으니 내려라”라고 말했다. 그곳은 마닐라 인근의 빈민가 골목이었다. 취재용 카메라와 양복까지 차려입은 외국인인 기자가 내리기엔 너무 위험해 보였다.

“내가 외국인이고 보다시피 이곳에 내리면 너무 위험하다. 부탁컨대, MRT(지상전철)역까지만 데려다 다오” 난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택시기사는 자동차에 물이 들어오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근처 지상철 역으로 가기 시작했다. 택시안이 온통 물바다가 됐고, 택시엔진소리도 둔탁해지며 멈출 기세였다.

결국 운행을 포기한 택시기사가 “도저히 안 되겠다. 난 이곳에서 차를 길옆 인도로 차를 올려놓고 그냥 걸어서 이곳을 빠져나갈 터이니 너도 내려서 걸어가라”고 말했다.

기자는 카메라와 귀중품은 검은색 봉지로 싸들고 웃옷까지 벗고 택시에서 내려 전철역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물이 가슴까지 차올랐지만 혼자서 물길을 헤치며 30분을 걸어 MRT종점인 Taft Ave역까지 왔다. 마닐라 전철은 지상 10m 높이로 건설된 전철이라 아직 운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철역은 인산인해였다. 기자는 1시간가까이 줄을 선 끝에 전철을 타고 숙소를 나선지 4시간 30분만에 숙소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필리핀한인총연합회가 현지 필리핀사람과 한국인의 문화교류의 장인 ‘한비문화축제’를 개최할 예정이었던 날인 9월 26일에 태풍 ‘온도이(켓사나)’가 필리핀 마닐라 한복판을 지나가며, 새벽부터 700mm가 넘는 비를 마닐라 전역에 퍼부었다.

30여년만에 일어난 최악의 폭우로 마닐라는 순식간에 물에 잠겼다. 도로 곳곳이 침수돼 수많은 차량들이 길거리에서 발이 묶였으며, 한인회는 결국 행사를 취소하고, 피해상황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한인들이 침수를 입었다는 피해가 접수됐기 때문이다.

지난 3일 발표한 필리핀 정부 공식집계에 따르면, 이번 비로 한인동포 1사람이 사망한 것을 비롯해 현지인 246명이 죽고, 38명이 실종됐으며, 37만명에 달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은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필리핀한인총연합회, 민간단체 수재민 돕기 시작

필리핀 한인회는 발빠르게 수재민 돕기를 시작했다.

먼저 기아대책본부 필리핀지회와 함께 다음날 새벽 홍수로 잠긴 도로를 뚫고 발렌수엘라 지역에 생수, 라면, 통조림, 수건, 양초 등 350가구에게 물품을 전달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구호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또 빠야따스, 까인따 지역 약 천명의 주민들에게도 구호물자를 전달했다.

당시 코피노를 돕고 장학금을 전달하기 위해 마닐라에 머물고 있던 사단법인 세계재난구호회 역시 숙소가 물에 잠기는 난리를 겪었다.

그 와중에도 현장에서 물에 빠진 여고생을 구출하고 수재피해를 입은 동포가족을 방문해 뒷정리를 돕는 등 힘을 보태는 활동을 한 뒤 귀국했다. 이후에도 한국에서 모금활동을 벌이고 있다.

주말이 지나 피해소식이 알려지자 한인사회도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동포들은 한인회로 의류 1만여점을 보내왔고, 40만 페소(1천만원)에 달하는 성금을 기탁했다.

뒤이어 사단법인 월드쉐어에서도 1천만원, 필리핀에 공장을 둔 OCI(전 동양제철화학)의 이수영 회장이 필리핀적십자사에 5만 달러를 지난달 29일 기부했다.

이렇게 기본 구호자금을 마련한 한인회는 수재민들이 필요한 쌀 6톤, 라면 2만1천개, 정수된 물 9천병을 지난 6일 우선 구입해 마닐라 인근 톤도, 파사이, 퀘존 지역의 수재민 3~4천 가구에게 전달했다.


△ 세계한인회장들, 수재민 돕기 발벗고 나서

이같은 필리핀 현지상황이 알려지자 세계각국의 한인회장들이 돕겠다는 의사를 나타냈다.

한호산 유럽한인회총연합회 회장은 “어려운 처지에 놓은 필리핀을 돕는 한인회를 위해 개인적으로 성금을 보내고, 유럽 각국의 한인회장들에게 연락해 추가로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고 말했다.

정효권 재중국한국인회 회장과 남문기 미주총연 회장도 “어려운 처지에 놓은 사람들을 당연히 도와야 한다”며 성금기탁을 약속했다.

정해명 대양주한인회총연합회 회장은 “사모아에서 일어난 쓰나미 때문에 현지 구호에 집중하는 상황이지만, 본인이라도 사재를 털어 어려운 일을 돕겠다”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또 김정태 사우디아라비아 동부한인회장도 사재 5천 달러와 한인회성금 2천 달러를 보내겠다고 약속했으며, 박정길 아중동총연(쿠웨이트한인회) 회장도 7일 참여의사를 밝혔다.

이같은 한인회장들의 움직임은 각국 한인회가 현지 국가 내 한인사회를 이끌어야 하는 역할에 더해 앞으로 각국 한인사회가 재난구호를 위해 서로 굳건히 뭉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박일경 필리핀한인회총연합회장은 “필리핀사회에 세계 각지의 한인회장님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다”며 “금액에 관계없이 어려운 처지에 놓은 사람들을 돕는데 한인회장님들의 도움이 한국인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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