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포럼] “미주이민 100년, 위기때마다 한마음 된 동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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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포럼] “미주이민 100년, 위기때마다 한마음 된 동포사회”
  • 강성봉 기자
  • 승인 2009.09.0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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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지난달 21일 희망포럼 광화문홀에서 유재건 전 국회의원이 ‘다문화사회에서 미주 한인사회의 위상’라는 주제로 열린 117번째 희망포럼의 강연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주>

유재건 전 국회의원
재미한인 100년사에 동포들이 힘을 모아 거족적으로 도운 법정사건이 3개 있다. 이 세가지 사건은 우리 동포사회가 위기에 처한 동포를 돕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동포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사건은 1908년의 장인환 사건이다.

고종황제의 외교고문 스티븐스는 1908년 3월 21일 일본의 조선침략을 찬양하며 조선을 모함하는 기사를 샌프란시스코의 각 신문사에 배포했다. 다음날 공립협회는 정정보도를 요청했고, 전명운 의사를 파견해 스티븐스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3월 23일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 페리역에 나타났을 때 전명운 의사가 권총으로 저격했으나 불발했다. 스티븐스를 죽이기로 한 결정이 내려질 때 그 사실을 옆에서 우연히 듣고는 전의사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현장에 가 있던 장인환의사가 권총 3발을 발사하여 이틀 뒤 스티븐스는 사망한다.

3월27일부터 재판이 시작되었고, 이듬해 1월 2일 장인환 의사는 2급 살인으로 25년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전명운은 공립협회 회원이었고, 장인환은 대동보국회 회원이었다. 두 회가 중심이 되어 동포사회는 장인환석방위원회를 결성, 장 의사의 재판을 돕기 위한 모금을 시작해 7천400불을 모았다. 당시 일당이 80센트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7천400달러가 얼마나 큰돈인지 알 수 있다.

장인환의사의 의거는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그것은 안중근의사의 이또 저격, 강우규의사의 사이또 저격,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폭탄 투척, 이봉창의사의 천황저격 같은 일련의 독립운동의 효시와도 같은 사건이었다. 장인환 의거는 미주동포사회의 독립운동의 여러 흐름이 하나로 단결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 사건은 이철수 사건이다.

1973년 6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중심가에서 이곳의 갱 지도자 입 이 택(Yip Y Tack)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와칭(Waching)파와 조보이(Joeboy)파의 죽이고 죽는 보복전으로 13번째 살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6월 7일 한국인 이철수가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다. 당시 시장선거를 앞둔 엘리어트시장이 2만여개의 점포를 가지고 있는 차이나타운 상인들과 시민들의 불평을 잠재우기 위해 경찰서장과 검찰과 협의하여 이철수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재판은 6명의 목격 증인들에 의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74년 이철수는 새크라멘토 지방법원에서 일급살인죄로 종신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복역중이던 이철수는 1977년 자기를 죽이려던 백인 갱 두목을 죽이게 돼 옥중살인사건으로 다시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1966년 폐지됐던 사형제도가 1977년 다시 부활되었는데 부활된 새 법에 따라 첫 번째로 사형집행을 받을 사람이 한국동포 이철수가 된다는 사실에 동포사회가 큰 충격을 받았다.

필자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철수구명위원회를 조직했고, 동포사회에 이철수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음을 알리고 미국 각 지역에 후원회를 조직해 가며 재판 기금을 모금했다. 1979년 먼저 재심명령을 받아내고 1983년 마침내 이철수 무죄평결을 받아냈다.

억울하게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까지 받은 동포 청년 이철수의 기구한 운명을 보고 남의 일로 보지 않고 발 벗고 구명운동에 나섰던 수많은 동포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철수 사건은 미주 이민사회의 한 시대를 특징짓는 아주 특별한 사건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미주 이민사회는 급속히 팽창하던 시기였고, 이 때 이철수 사건이 미주 동포사회를 하나가 되게 했던 것이다.


세 번째는 로버트 김 간첩사건이다.

이 사건은 로버트 김이 백동일 대령에게 건넨 정보가 동맹국간에 나눌 수 있는 정보였다는 점에서 김씨가 남북분단이 만들어 낸 역사의 희생물이 된 사건이다.

1995년 11월 한미해군정보장교회의에서 통역으로 합석을 요청받은 로버트 김은 이곳에서 해군무관으로 워싱턴에 파견돼 있던 백동일 대령을 만난다. 이후 김씨는 다섯 번에 걸쳐 50여개의 정보자료 문서를 아무 대가 없이 백 대령에게 제공하기에 이른다.

그가 백대령에게 전달한 정보는 비밀로 분류되는 정보이긴 했으나 미국 본토 안보와 관련해 직접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이었고, 미국의 동맹우방인 일본, 프랑스,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에는 이미 제공된 정보였다.

FBI는 1996년 9월 24일 김씨를 체포, 긴급구속하게 된다. 한국정부는 백 대령을 즉시 한국으로 소환하고 정부의 사건 관련을 전면 부인한다.

1997년 3월 결성된 ‘로버트 김 구명위원회’는 4억여 원을 모금해 로버트 김이 구속돼 있는 기간 동안 가족을 뒷바라지 한다.

로버트 김은 1997년 7월 열린 1심공판에서 간첩죄로 기소되어 징역 9년에 보호관찰 3년형을 선고받고 연방교도소에 수감된다. 변호인 측이 연방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미 대법원은 1999년 9월 이를 기각한다.

김씨는 우리 정부에 ‘대한민국 정부에 드리는 공개 질의서’를 보내 “제가 한국정부의 스파이였다면 가족에게 보상해 주시고, 아니었다면 미국정부에 떳떳이 밝혀 주십시오”라고 요청했으나 아무런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버트 김은 7년 10개월을 복역한 2004년 6월 전자감시장치를 차고 가택연금상태로 귀가한다.

로버트 김 사건은 미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의 정체성과 한미관계에 중요한 문제제기를 하게 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동포들에게 ‘조국은 나에게 무엇인가, 미국은 나에게 무엇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해 줬다.

또 그것은 ‘동맹국간에 어떻게 간첩사건이 있을 수 있는가’, ‘과연 한국은 미국의 동맹이 맞는가’라는 문제제기를 하게 해 많은 한국사람들로 하여금 미국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정리=강성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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