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작스탄 영상 매체에서 나타난 고려인(韓人) 역사와 이미지(7권3호)
상태바
카작스탄 영상 매체에서 나타난 고려인(韓人) 역사와 이미지(7권3호)
  • sasha-kaz
  • 승인 2003.11.0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카작스탄에서 최근 발굴한 고려인 관련 영상물 들에 대한 글입니다..
한국외대 외국학종합연구센터에서 발행되는 국제지역연구 제 7권 3호(10월 30일 발행)에 게재된 원고입니다...인용하실 분들은 출처를 꼭 밝혀주세요
참고로 각주의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재외동포재단 조사연구자료실 전문가 칼럼에는 첨부파일로 원본파일을
올려두었습니다. 전체내용이 모두 필요하신 분은 이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카작스탄 영상 매체에서 나타난 고려인(韓人) 역사와 이미지*




김상철**


Ⅰ. 서론

1. 연구의 취지

영상을 중심으로 하는 ‘멀티미디어’ 매체는 그 파급력과 전달의 측면에서 가히 현대사회의 총아로 불리우며 기존의 문자중심 매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는 컴퓨터와 디지털화라는 요소와 결부되면서 그 파급효과가 더욱 커지고 있고, 특히 성과물의 공유계층 확대라는 측면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사회적인 변화는 역사학에도 영향을 미쳐 영상매체 및 컴퓨터를 중심으로 하는 멀티미디어를 전달매체로 활용하려는 추세가 두드러지고 있는 바,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역사스페셜’이다. 이 프로는 전문가들이 아니면 잘 알기 어려운 역사적인 사실들을 첨단매체를 통해 영상 및 그래픽으로 재구성하여 일반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역사를 향유하고, 이에 관심을 가지는 계층의 확대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멀티미디어 매체의 활용을 통한 연구성과 공유추세가 일반적인 흐름임에도 불구하고, 재외한인에 대한 연구성과는 아직까지 문자매체 중심으로 발표되어 제한된 범위에서만 공유됨으로 인해 성과의 공유 및 사회적인 활용도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문자매체 중심의 연구는 대부분이 결론도출과 제안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연구의 수행과정에 있어서 중요시되는 여러 가지 요인가운데 연구자가 이미 산정하고 있었던 요인만을 선택적으로 부각시킬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다른 요인들은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연구수행과정에서 입수한 많은 현실 정보들은 취사 선택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구체적인 정보들이 요약의 과정을 거치면서 구체적인 배경과 사실들은 압축되어 추상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된다. 따라서 연구자가 의도하지는 않았더라 하여도 최종적인 연구성과는 전달과정에서 피상적일 수밖에 없으며, 연구의 배경이나 맥락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제3의 연구자나 독자들은 이러한 연구성과를 공유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반면 재외한인에 대한 영상물은 기존의 방송에서 다큐멘터리 형태로 제작이 되어 방영된 바 있으며, 한국정부에서도 전 세계의 한인사회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인 ‘세계 한민족의 삶’을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통일원의 기획 하에 제작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상물들은 전달하는 내용의 심도 및 영상물이 의도하는 목적에 따라 제작방향이 결정됨에 따라 재외한인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카작스탄 지역의 고려인에 대한 연구 역시 카작스탄, 한국 등에서 많은 학자들에 의해 초기의 강제 이주사 중심에서 점차 세분화된 심화연구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문자매체 중심의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고려인 사회에 대한 활발한 학문적인 접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나 미주 및 유럽의 한인(韓人)사회에서 고려인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은 아직도 피상적으로 막연히 ‘어렵게 살고 있는 한인(韓人)동포’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근의 문헌연구들은 성공적인 현지 사회 정착 민족으로서 고려인을 부각시키고 있고, 현지어(노어)로 된 고려인 관련 연구자료들도 지속적으로 새로운 모습의 고려인상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들은 한국의 관련학자들에게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고, 일반인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전반적으로 동포문제에 대한 피상적 이해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연구들 사이에서 성공한 고려인 사회를 부각시키는데 문헌연구는 일정 정도 한계를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이제까지 관련 연구자들에게조차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영상자료들을 통해 고려인 사회의 정착과 그 실상을 소개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제까지 러시아어로 출간된 현지의 문헌연구가 새로운 러시아 동포의 상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이런 자료들이 널리 알려지지 못한 이유는 언어적인 장벽 때문이었음이 사실이다. 물론 현지에서 제작된 영상물 역시 이러한 언어적인 장벽을 가지고 있지만, 단순히 시각적인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분명히 사실(史實)의 전달 및 활용, 내용 이해측면에서 문자매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효과를 가지고 있다.
본 연구의 일환으로 수집되고 분석된 고려인 관련 영상물들을 소개하여 자랑스런 카작 고려인의 역사가 한국 및 재외 한인사회에 영상매체를 통해 알려져, 재외한인사회와 고려인사회간의 상호 호혜적인 교류를 위한 토대가 더욱 확산되어 나가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이러한 작업들이 독립국가연합 다른 국가들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빠른 시일 내로 소련시기 고려인(韓人)의 역사 및 생활상에 대한 현지에서 제작된 영상물이 충분히 활용된 수준 높은 고려인 관련 다큐멘터리들이 제작되기를 기대해본다.

2. 연구의 방법과 분석대상

영상기록물을 통해 카작고려인의 역사를 살펴보는 본 연구는 연구의 방법으로 영상기록물 내용 분석을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내용분석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문헌 중심연구에서 제시되었던 여러 논지들 가운데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논지와 사실들을 영상 기록물을 통해 입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분석대상 영상물은 크게 카작스탄 국립 영상, 사진 및 음성기록 보관소 소장 영상물, 카작스탄의 국영 및 민영 방송국에서 1990년대 이후 제작된 고려인 관련 영상물들이다. 1990년대 이전에 제작된 영상기록물들은 국립 영상, 사진 및 음성 기록물 보관소에서 입수하였다.
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제작된 영상기록물들은 아직까지 국립 영상, 사진 및 음성 기록물 보관소로 이관되지 않은 관계로 카작국영방송 및 민영방송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인 관련 영상물로 한정하였다. 이 시기에 현지 방송에서 방영된 한국관련 영상물은 대부분이 한국에서 제공된 영상물을 그대로 방영한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본 연구의 대상에서는 배제하였다.
또한 카작국영TV내의 소수민족 방송 제작팀 가운데 고려말 프로 제작부서 역시 1991년부터 주1회씩 영상물을 제작해왔다. 그러나 이 영상물들의 경우에는 카작국영TV 자체에서는 1996년도 이후 방송분만을 보관되어 있다. 1995년 이전 제작된 영상물들은 영상기록 보존소로 이관되는 단계여서 입수가 용이하지 않았다. 아울러 이러한 영상물들이 고려인사회의 소식을 다루고 있지만, 상당부분이 한국에서 제공한 영상물을 그대로 방영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본 연구의 수집 및 분석대상으로는 적합한 경우가 많지 않았다.
가장 많은 영상물이 보관되어 있는 카작스탄 국립영상, 사진 및 음성기록 보존소는 1943년에 설치되었으며, 카작 TV필름, 카작필름에서 제작된 영상물과 러시아 모스필름 및 렌필름에서 제작된 카작 관련 영상물을 공급받아 소장하고 있다. 현재 영상자료 2만7천여점이 영화필름 형태로 소장되어 있으며, 영상물은 가장 오래된 기록물이 1925년에 크즐오르다에서 실시된 카작스탄 설립 5주년 기념식 영상물이다. 이러한 영상물 외에도 카작스탄에서 활동한 주요 감독들의 영상물, 다큐멘터리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사진자료 역시 15만장을 소장하고 있다.


Ⅱ. 고려인 관련 영상자료의 현황

1. 카작 국립 영상, 사진 및 음성기록보존소

1) 자료의 특성과 제작배경
카작 국립 영상, 사진 및 음성기록보관소 소장 영상자료 목록을 검색한 결과 전체 2만7천여점 가운데 고려인을 직접 주제로 다루고 있는 영상자료들로 80점이 소장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외에도 소장자료 목록은 영상자료 제작감독을 기준으로도 검색이 가능한데, 이러한 경우에는 고려인과 직접 관련이 되지 않는 영상자료를 제작한 경우도 많기 때문에 본 연구의 분석대상에서는 제외하였다.
아울러 15만장 정도 소장되어 있는 사진자료 역시, 1997년 일부 자료들이 수집되어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가 강제이주 60주년을 기념하여 발간한 화보집인 『카자흐스탄의 고려인』에 일부가 수록되었다. 하지만 한국에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고, 현재는 절판된 상황이어서 관련학자들이 이를 입수, 활용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이 책에 활용된 사진자료 역시 동 기록보존소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 가운데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 역시 방대한 양으로 인해 목록 작성 및 복사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작업이므로 인해 추후의 과제로 남겨두었다.
이와 아울러 음성기록물 역시 상당한 분량이 소장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지만, 이 역시 직접 음성기록물을 듣고 목록과 대조하는 확인작업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단기간의 연구로 실체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절반 이상의 영상물이 제작된 1940-60년대는 당시의 소련상황과 연관시켜 영상물이 제작된 시대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으로 보여진다. 텔레비전 방송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이 시기는 소련체제에서 선전선동 및 소식 전달매체로 영화의 기능이 중시되던 시기였다. 특히 1940년대에 나온 영상물은 모두 고려인의 벼농사에서의 성과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러한 영상물의 제작배경은 1929년부터 실시된 강제 집산화 결과가 초래한 카작스탄 기존 농업기반의 붕괴와 연관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카작스탄은 전통적으로 중앙아시아 국가 가운데 농업분야에서 유목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다. 그러나 강제적인 집산화가 이루어지면서 유목민들은 자신들의 가축을 국영농장이나 협동농장으로 보내지 않고 도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국유화를 거부하여 가축을 스스로 도살하고 카작스탄을 떠난 대규모의 유목민인구의 유출, 1930년대 초반의 기근으로 인한 대규모 아사자의 발생으로 카작민족의 인구는 소련체제 출범초기와 비교해보면 거의 절반이상이 감소하였다.
이러한 농업기반의 붕괴, 농업인구의 감소로 인한 공백은 고려인을 포함한 강제이주민들로 인해 메워지기 시작했다. 고려인들의 대부분은 곡물생산 지대가 아닌 유목지대였다가 집산화과정을 거치면서 기반이 붕괴되어 버린 유목 중심 농촌지방으로 강제이주 되었다. 곡물농사에는 부적합한 지역에 대부분 정착한 고려인들은 카작 유목민들이 거부한 집단농장을 형성하여 강제이주에서부터 채 2년이 안 되는 시점부터 벼농사에 성공하였다.
카작공화국의 입장에서 이는 강제이주 민족의 성공적인 정착사례라는 측면과 농촌지역 집산화로 인한 생산 증대의 성공적인 사례로 여겨지게 되었다. 아울러 1941년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에 본격 참전하게 되면서 전시 총력생산체제로 전환된 상황에서 고려인들이 벼농사에서 세계기록 차원의 쌀을 생산하여 국가에 납부하고, 군수물자 구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따라서 소련중앙정부나 카작공화국은 전시체제에서 제 집단들의 생산을 독려하기 위해서도 고려인 집단농장의 성공 사례를 널리 선전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인에 대한 영상물 제작은 1950년대에 들어오면서 농업을 포함한 사회전반에서 활동중인 전문가 중심으로 그 방향이 바뀌게 되며, 그 이후에도 이러한 경향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고려인관련 영상물의 특징과 내용
80편에 달하는 고려인 관련 영상물 가운데 1940-60년 사이에 제작된 영상물은 대부분이 벼농사와 관련되어 있음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특히 1940년대에는 크즐오르다의 아방가르드 집단농장이 빈번히 소개되고 있으며, 1960년에는 역시 같은 크즐오르다 지역에 위치한 ‘제3인터내셔날’ 집단농장이 소개되고 있다. 물론 이외에도 다른 지역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고려인의 모습을 다룬 경우도 다수 나타나고 있다.
1960년 이후에는 대체적으로 전문직으로 진출한 고려인을 다루는 영상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아울러 북한과의 교류를 다루는 영상물도 자주 나타난다. 전문직으로 진출한 고려인으로 가장 빈번히 영상물에 비춰진 경우는 카작스탄 공화국의 재무부장관직을 1961년부터 1974년까지 수행한 김 일리야 루키치이다. 이외에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에서 소련대표로 나온 김 넬리에 대한 영상물도 2회 제작되어 방영되었다.
이 가운데 본 연구자가 1차로 입수한 영상물 가운데 일부분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고려인과 관련되어 최초로 제작된 영상물은 1939년에 제작된 ‘알마티주 중등학교 우수교원 이 E’에 대한 것이다. 그녀는 당시 알마티의 중등교육기관에서 러시아어우수교원으로 선정되었다.
20편의 영상물 가운데 1946년 제작된 ‘크즐오르다주 칠린구역 고려사람(韓人) 집단농장 아방가르드(선봉) 특집’은 (1946): 1940년대의 고려인을 다룬 가장 대표적인 영상물로 아방가르드 집단농장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특집 영상물이다. 이 시기 고려인과 관련된 영상물이나 아방가르드 농장을 다룬 다른 영상물은 대부분 1분 미만의 단편형식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아방가르드 농장 특집편은 30분 정도 길이의 영상물로, 영상물 전반에 당시 크즐오르다 고려극장의 배우였던 이 함덕, 이 니콜라이의 고려말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깔려있다.
아방가르드 집단농장의 농사, 집단농장의 설립 및 변천사, 집단농장내의 한국어 중등학교, 농장장 김만삼의 지도아래 이루어지는 적극적인 벼농사 과정, 현지의 카작인과 협동작업을 하고 있는 농장 가축작업반, 수확된 벼의 국가납부 장면, 집단농장의 전체 총회 모습, 집단농장에서의 여가생활, 가을걷이 후의 결혼식 및 축제, 가을걷이 축제에 출연한 크즐오르다 고려극장 공연 등을 소개하고 있는 이 영상물은 1940년대에 활성화된 고려인집단농장의 상황을 전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아방가르드 집단농장과 집단농장장 김만삼에 대해서는 수 차례 영상물이 제작되었다. 최초로 소개된 것은 1942년으로 아방가르드 집단농장의 벼 수확과 벼농사전문가 김 만삼(1942)을 영상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1948년에는 아방가르드 농장의 도정공장 및 문화회관 건설을 소개하고 있다.
1952년에는 카작스탄 서북부 밀농사 지대인 쿠스타나이주(州)에서 공동농장 농장장을 맡고 있는 고려인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제작되었다. 이 영상물은 1937년 강제이주 당시 약 4,000명의 고려인이 강제이주된 이 지역에서 밀 농사에 종사하고 있는 고려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강제이주 당시 곡물농사지대로 이주된 고려인들이 무조건 벼농사에 종사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이주된 지역에서 기존의 농업체계에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대 중반이후에는 아방가르드 집단농장대신 제3인터내셔날 집단농장에 대한 영상물이 빈번히 제작되었다. 대표적으로 1957년에 제작된 ‘제3인터내셔날 집단농장 최 정학’편은 크즐오르다에 위치한 벼농사 중심 고려인 집단농장 가운데 하나인 제3인터내셔널 집단농장의 농장장인 최정학을 소개한 영상물이다. 1960년대에도 제3인터내셔널 집단농장에 대한 영상물이 세 차례 더 제작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집단농장에서 활약하고 있는 농업 전문직 고려인들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1958년에는 알마티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를 소개하는 필름에서 카작스탄 대표로 출전하여 우승한 고려사람(韓人) 빙상선수인 고경희가 나와 있다. 이 대회에는 북한선수단의 장면도 비춰지고 있다. 이를 통해 1950년대 북한과의 상당한 교류를 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54년부터 1959년 사이에는 카작스탄과 북한 사이에 문화 및 체육분야를 중심으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고, 이에 대한 영상물도 거의 매년 제작되었다.
1960년에는 크즐오르다 지역과 함께 고려인들이 다수 정착한 최초도시인 우슈토베에서 고려인 벼농사의 성과를 보여주는 영상물이 제작되었다. ‘달리보스톡(극동) 집단농장 농장장 신형문’을 소개하고 있는 이 영상물은 달리보스톡 집단농장의 탈곡시설, 도정공장 등을 같이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이 영상물에서 과거 한국농촌에서 짚단을 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기계를 통해 짚단을 짜고 있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1961년에는 벼농사 이외에 전문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고려인이 최초로 소개된 영상물이 제작되었다. ‘크즐오르다주-아랄해 항해, 우즈벡-카작간 화물선 선장 이 도하’편에서는 현재는 사해가 되다시피한 아랄해의 1960년대 모습과 함께, 아랄해를 항해하는 화물선 선장 이도하의 모습이 나오고 있다. 1963년에 이도하에 대한 영상물이 한 차례 더 제작되었다.
또한 1961년에는 ‘카작공화국 최고소비에트 회의’편 영상물을 통해 당시 카작공화국 재무부장관인 김 일리야 루키치의 연설 모습과 발언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김 일리야 루키치는 이후 그가 재무부 장관에서 물러나는 1974년까지 거의 매년 영상물에 등장하고 있고, 본 연구자가 1차로 복사한 20회분 중에서도 1961년, 1963년, 1964년, 1970년, 1973년도 카작공화국 최고 소비에트 회의를 보도하는 영상물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1964년에는 전문인력 고려인으로 엔지니어인 최 야곱 P.를 소개하는 영상물이 제작되었다. 이 영상물에서는 지질탐사 장비 제작 등 공업관련 전문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려인의 모습이 잘 보여진다. 아울러 같은 해에는 고려민족극장 배우로 당시 데뷔 30년을 맞이한 카작공화국 인민배우 김 진의 ‘데뷔 30주년 축하’ 영상물이 제작되었다. 이 필름에서는 연해주 고려민족극장에서 배우로 데뷔하여 강제이주를 직접 경험하고, 한국어를 100% 구사한 작가, 연출가 겸 배우인 김 진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1965년에는 수영선수로 활약한 고려인을 찍은 ‘켄타우-수영대회 우승자 최 M.’편이 있다. 이는 카작스탄 남부 켄타우에서 열린 카작공화국 수영대회(다이빙)와 대회 우승자들을 소개한 영상물이다. 이외에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소련체조 선수로 출전한 ‘김 넬리’, 1984년에 제작된 소련 복싱국가대표 공훈 트레이너 ‘최 유리’ 등이 카작스탄의 운동관련 영상물을 통해 만나볼 수 있는 고려인들이다.
1970년대 초반에는 북한 문화계 및 체육계의 카작스탄과의 교류를 다루고 있는 영상물이 다시 몇 차레 제작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북한과 관련된 영상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1977년에는 ‘고려(韓人)극장 성악가 김 블라지미르 독창회’가 제작되었다. 고려말 노래, 정통 성악노래, 카작 노래의 3부작으로 나누어진 이 필름은 현재 카작스탄 인민배우이며 고려극장의 솔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김 블라지미르의 청년시절 독창회에 대한 영상기록물이다.
1990년에는 당시 개별민족의 민족주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고, 스탈린의 강제이주에 대한 비판이 허용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고려인 감독에 의해 제작된 것이 강제이주민족 탄압기(1938-1948) 카라간다주 ‘돌린카’마을(원제는 ‘돌린카(마을)의 운명’)으로 최 E. P.의 회상기(4회분)이다. 강제이주 직후인 1938-48년 사이에 카작스탄 중부 탄광도시 카라간다의 돌린카 마을에 정착한 고려인들의 비참한 초기 정착생활을 회상한 인터뷰 기록이다.


2. 영상물에 나타난 고려인의 이미지
카작스탄에서 제작된 영상물에서 고려인은 초기에는 강제 이주된 지역에 자발적으로 집단농장을 설립하고 새로운 농업인 벼농사를 도입하여 이를 성공시키는 우수한 소비에트 시민의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에는 벼농사와 직접 관련된 영상물은 더 이상 제작되지 않고, 소련 전체사회나 카작공화국내에서 공헌한 개인을 부각시키는 필름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카작스탄에서 고려인은 영상물을 통해 초기에는 ‘농업전문가’의 이미지로, 그리고 1960년대 이후에는 ‘전문직업인’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농업전문가 고려인
1940-60년대의 영상물에서 고려인은 주로 벼농사 전문가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 시기 영상물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내용은 1937년 강제이주 이후 성공적으로 각자의 강제이주지에 정착하여 농업집산화를 이룬 고려인의 모습을 전달하고 있다. 1940년대 영상물에서는 이 가운데에도 특히 크즐오르다 지역의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벼농사에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는 고려인의 모습을 주로 다루고 있다.
크즐오르다와 함께 많은 고려인이 강제이주되었던 우슈토베 지역(카라탈구역)에서도 벼농사에서 크즐오르다와 유사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지만 , 이러한 성과는 1960년대에 가서 영상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와 아울러 북부지역에서 밀농사에도 종사하는 고려인의 모습도 영상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다.
크즐오르다 지역에서 벼농사를 하는 고려인 집단농장들이 40년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배경으로는 거의 황무지이다시피 했던 지역에서 벼농사를 성공시킨 점, 1930년대 초반의 강제집산화로 인한 이 지역에서의 농업생산 및 인구의 공백을 메우고 카작스탄 벼농사의 중심지대로 변모시켰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이 지역에서 벼농사 중심인 고려인 집단농장인 아방가르드, 제3인터내셔널, 기간트, 카작스탄 설립 18년명칭 콜호즈가 주로 영상물의 촬영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오면 이러한 벼농사 고려인에 대한 영상물이 감소현상이 나타나는데, 이 역시 당시 소련이 처했던 상황과 관련이 있다. 우선 1953년 스탈린 사망이후 흐루시초프가 새로운 지도자가 되면서 그는 스탈린 시기의 산물로부터 철저한 탈피를 시도하였다. 스탈린 지도하의 소련체제에서 이룩된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강제집산화보다는 자신의 주도하에 카작스탄 북부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진행된 밀 농사지역 확대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처녀지 개간운동’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처녀지 개간운동’을 통해 소련사회에서 새로이 주목을 받게 된 집단은 크게 두 부류로 구분이 가능하다. 우선 유럽러시아에 거주하던 러시아계 민족들이다. 이들은 당의 파견 또는 자신들의 선택으로 대거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하여 농업지대 확대의 성격을 지닌 ‘처녀지 개간운동’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또 다른 부류는 제2차 세계대전중의 강제이주로 인해 거주지제한을 받고 있던 독일계를 중심으로 하는 소수민족 집단이다. 이들은 스탈린 사후 거주지제한 조치가 해제되면서 시베리아 오지의 강제이주 지역을 떠나 처녀지개간운동으로 농업인력의 수요가 대거 필요했던 카작스탄 북부로 이주하였다.
소련정부 및 카작공화국 당국은 농업생산의 확대 측면에서 이러한 집단들의 농업개발을 독려할 필요가 있었고, 소련전역에서 이를 독려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따라서 카작공화국(카작필름)의 선전영상물 제작도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는 이미 성공한 고려인의 벼농사 성과를 보여주는 영상물 제작편수의 감소로 이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대신 이러한 운동이 벌어졌던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려인을 담은 영상물이 제작되기도 하는데, 이 역시 벼농사가 아닌 밀 농사와 축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고려인이 그 대상이었다.

벼농사와 관련된 고려인 집단농장 및 주요 인물에 대한 영상물은 다음과 같다.

1942-크즐오르다주 칠린구역: 아방가르드 집단농장의 벼 수확과 김 만삼
1946-크즐오르다주 칠린구역: 고려사람(韓人) 집단농장 아방가르드(선봉)
아방가르드(선봉) 집단농장 특집
1948-크즐오르다주 칠린구역: 아방가르드 집단농장의 벼 수확과 김 만삼
1948-아방가르드 집단농장장 김 만삼이 알마티의 업영웅 보고대회 참석
1949-크즐오르다주: 도정공장
1950-크즐오르다-아방가르드 농장장, 벼농사전문가, 사회주의 노동영웅 김만삼
1952-쿠스타나이주 밀 생산 공동농장장 박 모
1957-크즐오르다주: 제3인터내셔날 집단농장 최 정학
1957-‘쿠스타나이’ 집단농장 농장장 박 알렉산드르 안드레비치
1958-딸띄꾸르간- 강 모.(농업 전문가)
1959-쌀 재배 영웅 김만삼
1960-딸띄쿠르간주: 카라탈구역 달리보스톡 집단농장 도정공장의 탈곡준비
농장장 사회주의노동영웅 신 형문
1960-크즐오르다-‘기간트’ 콜호즈 농장장 김 모
1960-크즐오르다 기간트 콜호즈 김 에카테리나
1962-크즐오르다-사회주의 노동영웅, ‘카작스탄 설립 18년명칭’ 집단농장장 박 대한
1963-크즐오르다-‘제3인터내셔널’ 콜호즈 농장장 김 승학
1963-크즐오르다-‘제3인터내셔널’ 콜호즈 지도원 김 알렉세이
1963-쿠스타나이 첼린느이 지역 축산 농장 전 농장장 박 알렉세이 안드레비치
1970-딸띄꾸르간-‘10월혁명 40주년’ 콜호즈 농사전문가 전 모.(1970)
1970-땅과 과학-농업과학자 황 A. I. (1970)
1981-우슈토베 및 탈띄꾸르간 지역의 쌀 생산자 회의
1985-콕체타우 지역 공동농장 농장장 김 A. A.

2) 전문직업인 고려인
1937년 중앙아시아로는 약18만명의 고려인이 강제이주를 당하였는데, 이러한 강제이주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카작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상이한 양상이 나타났다. 1959년 실시된 소련인구 센서스의 결과에 따르면 고려인의 숫자는 1959년 인구조사에서 우즈벡은 약13만9천여명으로 인구가 증가한 반면, 카작스탄은 7만4천여명으로 감소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카작스탄 고려인의 초기 인구감소 원인으로는 크게 대략 세 가지 정도를 들 수 있다. 그 첫째는 강제이주 직후의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나타난 1937-38년의 특히 유아세대의 높은 사망률, 둘째로는 제2차 세계대전중 작업환경이 열악한 노동군으로 고려인 젊은이들이 많이 복무하게 되면서 나타난 이들의 희생으로 인한 젊은 남성 고려인들의 사망자 증가 , 셋째로는 1950년대 중반 많은 고려인 젊은이들의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및 유럽러시아의 공업중심 도시로 유학 및 이주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젊은 세대의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가 가능했던 요인으로는 흐루시초프의 집권 이후 다시 회복한 거주이전의 자유라는 정치적인 측면과 앞서 영상물에서 나타난 것처럼 강제이주 1세대의 기성세대들이 강제이주 이후 벼농사를 중심으로 이룩한 경제적인 기반이 확립을 들 수 있다.
젊은 세대들의 이주 성향 역시 우즈벡과 카작이 약간의 상이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즈벡에서는 주로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로 유학차 이주한 경우가 많으며 , 카작에서는 유럽러시아의 공업중심도시(키예프나 하리코프 등) 및 카작과 인접한 시베리아의 공업도시들로 이주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소위 강제이주 이후의 제2차 이주의 결과로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러시아 지역에서 고려인 사회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강제이주 1세대 가운데 희생이 많았던 어린이 세대들이 김만삼, 최정학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이루어진 경제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고등교육을 받게되거나, 또는 사회로 진출하게되는 시점이었다. 강제이주 당시 어린이에 불과했던 자녀세대들은 이러한 부모세대의 경제적인 성공이라는 뒷받침하에 고등교육을 목적으로 또는 전문직업 교육을 위해 농촌을 떠나 수도인 타쉬켄트와 알마티, 러시아의 주요도시 등 대도시로 이주하는 경우가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소련 전역에서 전형적인 고려인의 대도시 집중 이주 및 거주현상이 전반적으로 나타나게 되며, 러시아에서 현재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그를 중심으로 젊은 세대의 전문인 중심 고려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좋은 농업환경을 찾기 위해 러시아남부나 러시아 북카프카즈,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 지역으로의 농업이주 역시 이 당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강제이주 당시의 시점에서도 농촌과 도시 거주민의 비율에 있어서는 농업중심의 남부지역과 공업중심의 북부지역이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전반적인 고려인 사회의 변화추세가 영상물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 시기부터 특히 전문직으로 진출하여 성공한 고려인의 모습을 다루고 있으며, 크게 산업계, 문화 예술 분야 및 체육 분야의 인물들이 대표적이다. 아울러 집단농장과 관련된 영상물에서도 농사자체의 성과보다는 집단농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전문직 고려인을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카작공화국 재무부 장관이었던 김 일리야 루키치의 경우는 이미 제2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상물에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 배경으로는 고려인으로서 가장 고위직 공무원이었던 점과 아울러 매년 카작공화국 최고 소비에트의 년차 정기회의에 대한 영상물이 제작되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전문직업 고려인에 대한 영상물은 전체 80편 가운데 27편을 차지하고 있지만, 김 일리야 루키치에 대한 영상물이 11회가 되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다루어진 인물은 12명에 불과하다.
이는 카작스탄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농업전문가 이미지로 다루어지던 1940-60년대보다는 고려인 관련 영상물의 비중이 감소하였음을 보여주기도 하며, 이전과는 달리 다양한 분야로 고려인의 진출이 이루어짐에 따라 그 분야에서 아주 탁월한 수준에 도달한 고려인만 영상물에 담겨짐으로 인해 나타난 현상이기도 한다. 다음은 전문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려인을 기록한 영상물의 목록이다.

1961년 크즐오르다주: 아랄해 항해, 우즈벡-카자흐간 화물선 선장 이 도하
1961년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회의,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62년 남카작스탄-이 니콜라이: ‘공산주의의 새벽’ 콜호즈 기계작업단 책임자
1963년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회의,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63년 크즐오르다주: 아랄해 화물선 선장 이 도하
1964년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64년 알마티: 건축엔지니어 최 야곱 P.
1964년 크즐오르다: 카자흐공화국 인민배우 김 진 데뷔 30년 축하공연
1964년 카자흐공화국 인민 배우 김 단
1965년 켄타우: 수영대회 우승자 최 M.
1965년 공업 엔지니어 최 유리 알렉세이비치
1965년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66년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67년 체르다라-체르다라 건설사업소 책임자 태 게르만
1967년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68년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69년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70년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회의,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70년 땅과 과학-농업과학자 황 A. I.
1970년 고려사람 앙상블 ‘아리랑’ 및 고려극장 손 게오르기의 알마티 연주회
1973년 고려(韓人)극장 연주회 및 ‘아리랑-1973’공연
1973년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회의,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74년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회의,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75년 침켄트-체조선수 넬리 김의 훈련-2회
1976년 체조선수 넬리 김이 쿠나예프 카자흐 공산당 제1서기를 만남
1977년 알마티: 고려(韓人)극장 성악가 김 블라지미르(2회분)
1984년 알마티-소련 공훈 복싱 트레이너 최 유리


Ⅲ. 1990년대 이후의 영상기록물

1. 카작국영방송 한국어방송 제작팀 제작 및 방영 영상물
1990년대 이후의 영상기록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카작국영방송내에 있는 한국어방송프로인 ‘고려사람(현재명: 우리민족)’을 들 수 있다. 1991년부터 매주 주 1회 방송되어온 이 프로그램은 199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고려인사회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영상에 담아 카작스탄 전역의 시청자들에게 방송을 해왔다.
이 가운데 본 연구자가 입수할 수 있었던 영상물은 1996년 특집으로 제작된 ‘한국어 하는 우슈토베의 다른 민족’, ‘2002년 방송요약분’등이었다. 물론 본 연구자가 처음 카작스탄에 머물렀던 1996년부터 1998년 사이에도 이 프로는 거의 빠뜨리지 않고 시청을 하였고, 2001년부터 다시 체류하게 되면서 이 프로만은 거의 빠짐없이 시청하여, 전반적인 방송의 흐름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어 하는 우슈토베의 다른 민족’: 고려인 가운데 대표적인 영화감독인 송 라브렌찌가 1996년 ‘고려사람’ 프로그램의 일부로 제작한 프로그램으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이 최초 정착한 이주지 가운데 하나인 우슈토베에 거주하고 있는 타민족들이 고려말을 구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고려사람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고려사람(1991-2002) 및 우리민족(2002-현재)’: 주 1회 20분 방송이 이루어지고 있는 고려말TV프로그램으로 한국문화 소개, 고려인 사회 소식 소개, 한국관련 기관, 카작스탄 방문 한국인사 소개 등이 주요 내용이다. 현재 방송자료는 프로덕션 자체로는 1996년도 분부터 보관되어 있고, 그 이전 자료들은 남아있지 않다.
초기 제작부터 방송언어는 러시아어였고, 간헐적으로 한국어 방송이 시도된 적이 있으며 2002년 프로명이 ‘고려사람’에서 ‘우리민족’으로 바뀌면서 전체 방송 가운데 5-10분 정도를 한국어로 방송하고 있다. 리포터는 한국어를 구사하는 현지인(고려인, 카작인)이 하고 있다.
이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1990년대에 전문직에서 활동하는 고려인들의 삶의 모습이 잘 비추어졌다. 예를 들면 2000년에 사망한 카작스탄 헌법위원회 위원장 ‘김 유리’등이 있으며, ‘김 유리’ 특집편은 방송시간의 제약으로 인해 10분 정도로 단축하여 방영되었으며, 그 이후 알마티의 민영방송에서 전체 50분 길이의 프로그램을 모두 방영하였다. 이외에도 2002년에는 설립 70주년을 맞이한 카작스탄 국립 고려극장 특집편을 제작하여 고려극장의 역사를 영상을 통해 전달하였다.


2. 강제이주 60주년 기념 특별제작 영상물 “나의 제2의 고향”
1997년은 고려인 강제이주가 이루어진지 60년이 된 시점이었다. 그래서 이와 관련되는 행사가 각 국가의 고려인협회 주최로 개최되었고, ‘강제이주 회상열차’가 강제이주당시의 노선을 따라 운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당시의 분위기에서 카작스탄 고려인협회는 강제이주 60주년 기념행사 및 학술대회를 개최하였고, 이와 아울러 강제이주 60주년을 결산하면서 당시까지 한국에 통념적으로 알려져 있던 이미지와는 달리 1937년 강제이주 이후 정착한 카작스탄땅에서 카작스탄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카작스탄 국민으로 자랑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고려인의 모습을 담은 특별 영상물을 제작하였다.
이 영상물에는 카작 고려인의 강제이주, 역사, 현재 및 미래에 대한 전망이 인터뷰와 관련 영상물을 통해 잘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 영상물이 한국이나 다른 국가의 재외한인사회에 공개된 적이 없으며, 단지 카작스탄 고려인협회가 이 6부작 프로그램을 간략히 요약하여 ‘카작스탄의 고려인’이라는 홍보비디오를 만들어 배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러시아어로 제작되어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며, 단지 일부 연구자들이 이 테이프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의 제2의 고향’ 영상물에서 전달하고 있는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제1편에서는 카작스탄 고려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것으로 카작스탄 고려인협회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회장알 맡았던 한 구리 보리소비치의 서두연설 및 강제이주 60주년 기념 차원의 영상물 제작취지가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강제이주 당시의 다수 고려인 정착도시인 우슈토베를 강제이주를 경험했던 최 아폴론 이바노비치 부부 의 우슈토베 건설 회고담, 당시의 한국어 교육 상황과 강제이주 이후의 한국어 교육 페지에 대한 상황이 잘 전달되고 있다.
아울러 우슈토베에서의 정착이후 고려인의 농업에서의 성과가 두 사람의 사회주의 노동영웅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잘 전달되고 있으며, 강제이주의 배경과 그 이후 제2차 세계대전중의 ‘노동군’징집 등과 같은 사회적인 어려움을 극복한 과정이 천 미하일 다니엘로비치와 윤 세르게이 그리고리예비치의 증언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윤 세르게이 그리고리예비치는 강제 이주후 정착과정의 어려움 및 초기의 희생 상황에 대해 생생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로그램 제작당시 카라탈구역 우슈토베시 책임자인 인 발렌찌나의 인터뷰를 통해 현재 우슈토베의 고려인 상황이 잘 전달되고 있다.
제2편인 ‘회상의 길’은 주로 제2차 대전시기 고려인의 상황에 대한 이해와 증언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홍 콘스탄친 예브게니비치는 부친이 사회주의 사상가이며 독립운동가인 홍범우였다. 그는 제2차 대전 참전경험을 증언하고 있다. 주동일은 현재 생존해 있는 강제이주 경험세대로 연해주에서 교원으로 활동하다가 강제이주 이후 고려말 신문 ‘레닌기치’와 고려말라디오에서 활동한 여류 원로언론인이다. 그녀는 소련사회에 적응해야 새로이 적응해야 했던 고려인의 상황을 잘 전달하고 있다. 아울러 현재는 작고한 유만근은 강제이주 이전 연해주의 대표적인 고려인신문인 ‘선봉’의 기자로 활동했고, 강제이주 이후 레닌기치로 이름을 바꾸어 복간된 고려인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한 원로 언론인이다. 그는 연해주 선봉신문의 역할, 강제이주 후 신문사 재건을 위한 과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2편에서는 우슈토베와 함께 고려인이 다수 정착한 도시 가운데 하나인 크즐오르다 고려인사회의 대표적인 인물인 계봉우와 홍범도가 소개되고 있다. 계봉우는 연해주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이기도 했으며, 강제이주 이후에는 고려인사회의 대표적인 인문학자이며 사상가로 활동하였다. 홍범도에 대해서는 홍범도의 활동, 크즐오르다에 홍범도 묘역이 설치된 상황에 대한 소개가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제2차 대전에 고려인은 원칙적으로 전선에 전투인력으로 투입이 될 수 없는 집단이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정규군으로 제2차 대전에 참전한 고려인에 대한 해설과 당사자의 증언 역시 제2편에서 언급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고려인 참전 영웅으로는 ‘민 알렉산드로 파블로비치’를 들 수 있으며, 그 외에도 1000여명의 러시아 거주 고려인이 직접 참전 사실이 고려말라디오 최영근 국장의 당시 상황해설과 참전 당사자인 ‘오 아나톨리 알렉산드로비치’, ‘이 알렉산드로 야코비치’의 인터뷰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제3편의 제목은 ‘우리가 선택한 길’로 주로 카작스탄 전역에서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는 고려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강제이주 당시 카작스탄 중북부 공업지역으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은 이 지역의 광산등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이 지역에 있는 탄광에 노동군으로 파견되어 노동에 종사했던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카작스탄의 대표적인 탄광지역인 카라간다에는 고려인들이 광부로 많이 일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평생을 광부로 활동하다가 ‘공훈칭호 광부’로 은퇴한 조 발렌친 다니엘로비치가 전하고 있다. 이러한 부모 세대들과 달리 강제이주 이후 카작스탄에서 태어난 이들의 2세들은 1950년대 중반부터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 엔지니어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들은 소련체제 붕괴이후에도 계속 그 전문성을 인정받아 현재도 각자의 전문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로 카라간드 금속기업(KARMET)에 서 경영진으로 근무하고 있는 ‘이 그레고리 알렉산드로비치’, 침켄트 도로건설 재료기업소를 운영하는 ‘김 유리 그리고리예비치’, 따라즈 잠불전력사업소의 ‘김 아파나시 M.', 따라즈 시립병원 산부인과 과장 ’김 영수 세르게이예비치‘ 등이 소개되고 있다.
제4편인 ‘시간의 강’에서는 강제이주 이후부터 카작스탄에서 고려인하면 연상되는 분야인 농업과 벼농사 분야에서의 성과, 그리고 카작스탄 독립이후 이들이 처한 여러 상황 변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960년대의 국립 카작필름의 영상물에서 이미 소개된 바 있는 크즐오르다주 제3인터내셔날 농장과 최고 전성기의 농장장인 최정학을 현재 이 곳에서 브리가질(농사작업반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는 사위 강 빅토르가 소개하고 있으며, 아울러 현재도 크즐오르다의 고려인은 벼농사에 종사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잠불주 고려인협회 회장인 홍 게르만은 잠불주 고려인협회의 활동, 한국어 및 한국전통음악을 교육하는 아리랑 학교를 소개하고 있으며, 아리랑 학교 학생들의 가야금 연주 및 전통무용 시연도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32년간 잠불 ‘인터나찌오날 콜호즈’ 농장장으로 활동한 김 빅토르 일리오노비치는 농장장 재임시의 콜호즈 발전 및 여러 활동에 대해 회상하고 있다. 그는 특히 자신이 근무하던 콜호즈가 소련시기 카작스탄 공화국 공산당 서기장인 쿠나예프의 단골방문지였다는 미공개 사실을 밝히고 있다. 강 레오니드 미하일로비치는 현재 브리가질(농사작업반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는 자신의 상황과 카작인과 협력하여 이루어지는 농사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제5편인 ‘어제와 내일사이에서’와 제6편인 ‘기나긴 삶의 길, 새로운 날’편은 바로 현재 카작스탄 고려인 사회가 처한 상황에 대해 소개를 하고 있다. 우선 카작스탄의 한국학자인 김 게르만이 개괄적인 한국사, 고려인 이주사, 고려인사회 특성에 대해 소개를 하고, 한국어 및 한국문화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크즐오르다 제6번 유치원을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카작고려인협회 초대회장인 한 구리는 다민족적인 카작사회의 일원으로 살고 있는 고려인의 모습을 자신의 가족 구성을 통해서 잘 소개하고 있다. 참고로 그는 딸만 4명인데, 사위는 카작인, 고려인,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등 민족이 서로 상이하다.
아울러 제5편에서는 1997년 개최된 고려인강제이주 6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와 이 대회에 참석한 고려인 학자, 엔지니어 등 소위 지식인층 고려인 사회에 대해 소개를 하고 있다. 이외에도 고려인 예술가들이 소개되고 있다. 또한 제5편에서는 카작스탄 전역에 있는 지방 고려인협회 가운데 전통문화 및 한국어 보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카라간다 고려인협회, 잠불 고려인협회, 침켄트 고려인협회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5편 마지막부분에서는 고려인 관련 주요기관인 고려극장, 고려일보, 고려말라디오, 고려사람에 대한 소개도 이루어지고 있다.
제6편에서는 고려인협회가 주최한 강제이주 60주년 관련 행사를 주로 소개하고 있으며, 이의 일환으로 소개된 고려인 문화경연대회 및 콘서트를 소개하고 있다.



Ⅳ. 결론
1937년 러시아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은 정착초기의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척박한 중앙아시아의 토양에서 벼농사를 성공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적인 기반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은 이후 고려인사회가 소련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갈 수 있었던 토대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정착사는 카작스탄의 영상물에 기록으로 잘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영상물 역시 시대 및 주제에 따른 분류가 가능함을 앞선 부분에서 알수 있었다. 이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카작스탄에서는 고려인과 관련된 영상물들이 강제이주 이후인 194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영상물들은 대략 1940-60년 사이에는 거의 매년 주요 인물이나 우수한 성과를 거둔 집단농장을 다루고 있었으며, 주제별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로 농업과 관련된 영상물들이 많았다.
이후 시기에는 1990년대 이전까지 고려인과 관련된 영상물은 1985년까지는 매년 최소 1, 2편은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당시에는 농업과 관련된 인물보다는 전문직인 엔지니어, 체육, 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영상물이 주로 다루어지고 있다. 소련체제 말기라고 할 수 있는 1986년부터 1990년 사이에는 고려인과 관련된 영상물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1990년에 개별민족의 자주성이 강조되었던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를 반영하여, 강제이주를 직접 다룬 영상물이 제작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에는 1991년부터 고려말 TV방송이 주 1회 방송됨에 따라 고려인 관련 영상물은 고려말 TV방송 프로제작팀인 ‘고려사람’팀에서 제작을 하게 되어, 카작국영방송이 직접 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현재도 이러한 방송물들은 주로 민간방송 차원에서 이루어짐음을 알 수 있었다.
본 연구는 카작스탄의 고려인 역사에 대한 영상물만을 대상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소련체제가 기록물의 제작 및 보존에 대하여서는 안정적인 체제를 가지고 있었고, 이 시기에 제작된 다양한 영상물들이 소련체제 붕괴이후의 독립국가연합체제에서도 잘 보존되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고려인들이 밀집해서 거주했던 지역들의 영상물 보관소에 대한 후속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영상자료들 역시 러시아어로 제작되어 바로 이해가 힘들다는 언어적인 장애 요인이 없지 않다. 그러나 영상매체가 가지고 있는 메시지 전달측면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이러한 자료들은 언어적인 장벽에도 불과하고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될 고려인의 역사와 문화를 쉽사리 이해하고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이며, 영상으로 남아있는 소비에트 시기 한민족사의 소중한 기록 유산인 것이다.



<참고 문헌>
Ким, г. н. социально-культурное развитие корейцев казахстана. Алма-Ата: Наука, 1989.

Корейское научно-техническое общество “кахак(과학).” корейцы казахстана в науке
технике и культуре. Алматы, 2002.

Кульбаев, Тлеу & Хегай, Аркадий. “Докладная записка об устройстве корейских
переселенцев.” депортация. Алматы Данекер, 2000.

Пак, А. Д. Демографическая характеристика корецев Казахстана. Алматы, 2002.

Olcott, Martha Brill. The Kazakhs. Hoover Institution Press. 1987.

김 게르만. “카자흐와 중앙아시아의 한인들.” 『제1회 세계한민족학술회의 논문집』.

_________. “고난의 재생.” 『레닌기치』. 1989년 4월 14일.

김승화. 「소련한족사」. 정태수 역.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1989.

김 표트르. “우즈베크 공화국 한인의 사회정치적 위상.”
『박영석 교수 화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1992.

N. 라쟈노프스키.「러시아의 역사 Ⅱ」. 김현택 역. 까치글방. 1982.

박 드미트리 니콜라예비치. “재소한인의 강제이주약사.”
『박영석교수 화갑기념 한민족독립 운동사논총』. 1992.

방일권. “상트 페테르부르그 고려인 3-4 세대의 의식과 생활문화.”「외대사학」제 13집. 2000.

임영상 & 김상철. “중앙아시아 3, 4세대 고려인의 의식과 문화변화,˝
「국제지역연구」제 4권 4호, 2000.

황영삼. “모스크바 고려인 3-4 세대의 의식과 생활문화.” 「외대사학」제 13집. 2000.

<부록>
카작스탄 국립 영상, 사진 및 음성기록물 보관소 소장 고려인관련 영상물 전체목록

알마티주 중등학교 우수교원 이 E. (1939)
크즐오르다주 칠린구역: 아방가르드 집단농장의 벼 수확과 김 만삼(1942)
크즐오르다주 칠린구역: 고려사람(韓人) 집단농장 아방가르드(선봉)
아방가르드(선봉) 집단농장 특집 (1946)
크즐오르다주 칠린구역: 아방가르드 집단농장의 벼 수확과 김 만삼(1948)
알마티: 크즐오르다주 집단농장장 김 만삼이 알마티에서 열린 농업전시회 및 농업영웅 보고대회(1948년 12월 알마티)에 참석 (1948)
크즐오르다주: 도정공장 (1949)
크즐오르다-아방가르드 농장장, 벼농사전문가, 사회주의 노동영웅 김만삼(1950)
쿠스타나이주 밀 생산 공동농장장 박 모. (1952)
알마티를 방문한 북한 작가들(1954)
알마티 아바이명칭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북한음악가들의 연주회(1955)
알마티에서 열린 북한 및 소련 문화 및 예술계 종사자들의 만남(1955)
크즐오르다주: 제3인터내셔날 집단농장 최 단학 (1957)
‘쿠스타나이’ 집단농장 농장장 박 알렉산드르 안드레비치(1957)
프룬제(비쉬켁)에서 만난 카작스탄과 북한 농구 선수들(1958)
딸띄꾸르간- 강 모.(농업 전문가)(1958)
알마티에서 열린 평양 및 알마티 축구팀의 만남(1959)
딸띄쿠르간- 이 운호- 카라탈 강의 선장(1959)
쌀 재배 영웅 김만삼(1959)
카라간다에서 열린 카작스탄 전국 복싱대회에 참가한 김 N. (1959)
딸띄쿠르간주: 카라탈구역 달리보스톡 집단농장 도정공장의 탈곡준비
농장장 사회주의노동영웅 신 행문(1960)
크즐오르다-‘기간트’ 콜호즈 농장장 김 모..(1960)
크즐오르다 기간트 콜호즈 김 에카테리나(1960)
딸띄쿠르간주 카라탈구역의 탈곡준비, 도정공장장 사회주의노동영웅 신 행문(1960)
크즐오르다주: 아랄해 항해, 우즈벡-카자흐간 화물선 선장 이 도하 (1961)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회의,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61)
남카작스탄-이 니콜라이:‘공산주의의 새벽’ 콜호즈 기계화 작업단 기술 책임자(1962)
크즐오르다-사회주의 노동영웅, ‘카작스탄 설립 18년명칭’ 집단농장장 박 대한(1962)
크즐오르다-‘제3인터내셔널’ 콜호즈 농장장 김 승학(1963)
크즐오르다-‘제3인터내셔널’ 콜호즈 지도원 김 알렉세이(1963)
쿠스타나이 첼린느이 지역 축산 농장 전 농장장 박 알렉세이 안드레비치(1963)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회의,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63)
크즐오르다주: 아랄해 화물선 선장 이 도하 (1963)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64)
알마티: 건축엔지니어 최 야곱 P. (1964)
크즐오르다: 카자흐공화국 인민배우 김 진 데뷔 30년 축하 (1964)
카자흐공화국 인민 배우 김 단(1964)
켄타우: 수영대회 우승자 최 M. (1965)
공업 엔지니어 최 유리 알렉세이비치(1965)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65)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66)
체르다라-체르다라 건설사업소 책임자 태 게르만(1967)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67)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68)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69)
딸띄꾸르간-‘10월혁명 40주년’ 콜호즈 농사전문가 전 모.(1970)
땅과 과학-농업과학자 황 A. I. (1970)
고려사람 앙상블 ‘아리랑’ 및 고려극장 손 게오르기의 알마티 연주회 (1970)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회의,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70)
고려(韓人)극장 연주회 및 ‘아리랑-1973’공연 (1973)
아시아음악포럼에 참가한 북한 대표단(1973)
알마티에서 열린 알마티 카이라트 축구팀과 북한 압록강 축구팀의 경기(1973)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회의,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73)
알마티: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회의, 재무부장관 김 일리야 L. (1974)
침켄트-체조선수 넬리 김의 훈련(1975)-2회
체조선수 넬리 김이 쿠나예프 카자흐 공산당 제1서기를 만남(1976)
알마티: 고려(韓人)극장 성악가 김 블라지미르(2회분) (1977)
한인음악 연주회 - 카작국영TV 방영(1978)
우슈토베 및 탈띄꾸르간 지역의 쌀 생산자 회의(1981)
알마티-소련 공훈 트레이너 최 유리(1984)
콕체타우 지역 공동농장 농장장 김 A. A.(1985)
강제이주민족 탄압기1938-1948 돌린카(마을)의 운영, 최 E. P.의 회상기(4회분)(1990)
최 필무의 가족(1990)
태권도-카작국영TV 방영(1992)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