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미, 나의 삶 나의 생명 나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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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미, 나의 삶 나의 생명 나의 노래
  • 월간아리랑
  • 승인 2002.1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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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기 오신 분 중에 ‘조선인’ 손들어 보세요. ‘한국인’ 손들어 보세요.”
때아닌 국적 조사에 관객들은 순간 당황해 하지만 이정미(李政美·44)씨는 곧바로 말을 잇는다.
“무슨 나라, 무슨 민족 나누지 말고 땅 위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 우리 모두 ‘토인(土人)’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녀의 제안에 장내는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
이정미의 노래는 라디오에서도 TV에서도 들을 수 없다. 그렇지만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생생하게 아주 가까이서 들을 수 있다. 그녀의 콘서트는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1년 평균 100여회 이상의 열린다. 작은 레스토랑이나 학교 강당, 한적한 절간, 객석 규모가 큰 콘서트 홀까지 그녀의 노래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어디선지 들어본 듯한 그리움과, 따스함이 느껴지고 무엇보다 안도감이 든다. 그래서 콘서트를 찾은 관객들은 어느새 기쁨과 슬픔을 서로 나누게 되고 때로는 즐거움이 되어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힘을 얻는다.

그녀는 자신이 노래를 할 때도 그렇고 작곡을 할 때도 꼭 ‘무당’과 같다고 생각한다. 좋은 시(詩)를 만나면 몇 번이고 낭독해서 암기할 정도로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멜로디가 되어 노래가 만들어진다. 작곡을 하려고 애쓰지 않고 자기 몸속에 있는 리듬을 일부러 끌어내려고 하지 않고 절로 나오게 하는 것. 이것이 그녀의 작곡법이다. 쓰려고 하지 않아도 주술처럼 써지고, 싫든 좋든 노래를 불러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처럼.
감기에 걸려 몸이 40도의 열이 올라 이번에는 공연이 힘들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막상 무대에 서면 힘이 난다는 이정미 씨. 무대에서 힘이 솟고, 관객과 어우러져 있는 그 시간이 마냥 행복한 타고난 가수이다.

작곡을 할 때는 그녀는 악기를 쓰지 않는다. 악기를 사용하면 코드에 집착하게 되어 본래의 음을 잃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멜로디 중심의 악보를 쓰고 나중에 악기에 맞춰 노래를 만든다.
그녀의 연주 스타일은 포크에 가깝다. 그러나 노래를 들으면 어릴 때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한국 대중 가요, 한국의 민요, 일본 민요, 서양 음악이 한데 섞여 있으면서도 독특한 그녀만의 창법이 있다. 이 소리가 이정미 특유의 음색이고, 사람들이 그녀의 노래를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래를 부르게 된 계기를 말하다보면 그녀의 ‘아버지’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재일 1세인 그녀의 아버지는 준프로급의 가수였다. 동네의 스타처럼 잔치 집마다 불려 다니며 노래를 불렀고, 일요일이 되면 술에 찌들린 채 레코드를 크게 틀어놓고 ‘눈물 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등을 불러댔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반감과 연민이 교차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핏줄을 속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재일 2세로서 줄곧 조선학교를 다녔는데, 일본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으면 음대에 진학할 수 없어 어려운 시험공부를 하며 집 근처의 카츠시카(葛飾)고등학교에 편입했다. 그녀의 자질을 아깝게 생각한 피아노 선생님의 권유로 구니타치(國立)음악대학에 진학해 오페라를 전공하지만 대학 2학년 때 서양 음악이 아닌 자기의 음악이 하고 싶어 가야금과 민요를 배우기 시작했다.

덕분에 스무 살 때부터 각종 집회에서 노래를 불렀다. 「김대중 납치 진상 규명을 위한 모임」. 「재일동포 구속 유학생 지원 모임」 등에서 ‘김민기’씨의 노래를 불렀다. 이탈리아어나 독일어로 오페라를 부르다가 한국어를 노래하면서, 조금씩 ‘자신만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민중가수, 운동가요라고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메시지 가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학하기 위한 수험공부에 매달리다 병든 어머니를 제대로 돌봐드리지 못한 죄책감. 그때부터 그녀는 절실히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노래를 생명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장애인, 외국인, 부락민 등 가르지 말고, 차별이 없는 세상, 살맛 나는 세상이 되는 것이 바람일 뿐이다. 그래서 그녀의 노래 중에 ‘서로 다르지만, 모두 좋은’(みんなちがって,みんないい)이라는 가사가 「공존 공생 사회 운동」의 슬로건이 되기도 했다.

가수의 첫 발을 내딛게 한 ‘기도’(祈り)’라는 노래도 야마오 산세이(山尾三省)라는 일본 시인이 쓴 시를 작곡하면서 출발했다. 낭독하는 시를 들으면서 그는 처음으로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노래로 표현했고, 그 다음에 만든 노래가 ‘케이세이센(京成線)’이다. ‘케이세이센’은 그가 나고 자란 마을을 달리는 전철로 그녀에게는 ‘원점’과 같은 노래이다.
잠시 공백기도 있었지만 ‘슬럼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슬럼프’는 정상에 오른 유명한(?)사람이 겪는 것이고, 그녀는 지금의 음악을 위한 ‘준비기’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부르는 ‘아리랑’이 전통인가, 아류인가 하는 깊은 고민과 함께 자신이 불러 민요를 모독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했다. 그러나 자신과 같이 민요를 부르는 사람도 있으면 어떨까 하는 소박함에서 출발해서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창법의 ‘민요’를 개척하고 있다. 재미있게도 작곡하고 노래를 부를 때나 한국의 시가 쉽고, 말을 할 때는 일본어가 쉽다고 한다.

최근 북일회담의 여파로 납치문제로 일본 여론이 떠들썩해진 틈을 타 그녀의 홈페이지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조선 사람들은 일본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하는데 사실이냐?’, ‘한국인들에 대한 강제 연행은 없었는데 왜 있다고 억지를 부리냐’등 비방의 글이 올라왔다. 그래서 그녀를 아끼는 팬들이 문제의 글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도록 열심히 글을 올려주는 형편이다.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구타와 이지메가 많아지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더욱 ‘아이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20년째 자신의 모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고 있는 그녀는 아이들의 집단심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역사 인식이 부족한 중.고등학생들이 자기 보다 힘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불행한 일이 벌이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노래 할 것이다. 재일 동포가 일본에 태어난 것도 다 의미가 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재일’이라고 움츠리지 말고 모두 당당하게 살아가자고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녀에게 작은 바람이 있다면 자신의 콘서트에 재일동포들이 많이 찾아왔으면 하는 것이다. 서로 어우러져 신명나게 노래를 부르고 싶다. 이 행복한 시간을 좀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李政美の世界」 http://www.bekkoame.ne.jp/~a-nagae/idyonmi.index.html)

이미정 2002-11-26 (130 호)  
image@arirang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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