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은 하나, 언젠가 또 하나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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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은 하나, 언젠가 또 하나될것”
  • 경향신문
  • 승인 2003.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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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당(唐)의 서역(西域)정벌이나 안록산(安祿山)의 난 등 중국사의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이 우리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고선지(高仙芝)라는 고구려 출신 무장(武將)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망국의 한을 가슴속 깊이 품은 채 드넓은 서역평원을 호령하다가 마침내 안록산의 난 진압과정에서 부하의 모함으로 진중(陣中)에서 참수(斬首)당하는 최후를 그려보라. 그 얼마나 통쾌하고 또 비장한가.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등 ‘쿠바현대사의 신화’들이 주축이 된 쿠바혁명도 ‘먼나라 남의 일’만은 아닐 터이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되, 한시도 핏줄을 잊지 않았던 한국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10년동안 직업혁명가로 반정부투쟁에 참여한 뒤 카스트로 정권에서 차관급까지 승진하는 등 30여년간 공직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아바나에서 택시운전을 하고 있는 임은조옹(쿠바명 Jeronimo Im Kim)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재외동포재단 초청으로 방한중인 임옹을 숙소인 서울 올림픽 파크텔에서 만났다.

깊이 패인 주름 사이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매와 열정적인 언변은 그를 일흔일곱살의 평범한 백발노인에서 단번에 젊은 혁명가 헤로니모로 되돌려놓았다. ‘에네켄 노동자’ 후예의 가슴속에서 쏟아지는 육성을 스페인어 통역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게 안타까웠다. 헤로니모는 “조국의 가을하늘이 참 높고 푸르다”고 말문을 열었다.

헤로니모의 3대(代)는 고난의 한국근대사와 격동의 쿠바현대사가 교차하고 있다. 1905년 제물포항을 떠나 멕시코 메리다항에 도착한 1,000여명의 한인 노동자 가운데는 그의 조부모와 두살난 부친(임천택·85년 작고)도 섞여 있었다. 사탕수수밭과 에네켄(용설란의 일종으로 배의 로프 등을 만드는데 사용됨) 밭에서 혹독한 노동을 하면서 짐승같은 대우를 받았던 이민 1세들의 고초는 96년 개봉된 영화 ‘애니깽’과 여러 소설작품 속에서 묘사된 그대로였다. 그의 조부모는 얼마뒤 한인노동자들 일부와 함께 쿠바로 옮겨졌고, 이들은 지금 700명이 넘는 쿠바 한인의 1세대가 됐다.


26년 마탄사스 외곽 에네켄 농장의 한인촌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지켜보면서 성장했다. 아버지가 주도한 독립운동의 방식은 소박하면서도 눈물겨웠다. 한인가정들이 매 끼니때마다 식구수대로 곡식 한숟가락을 아꼈다가 마을 창고에 저장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모인 곡식은 수백달러에서 많게는 1,000달러까지 여러번에 걸쳐 상하이임시정부에 전달됐다. 백범 김구는 이를 임정 관련서류에 기록했고, 1938년 인편을 통해 마움을 표시하는 서신을 쿠바로 보냈다. 헤로니모는 “95년 첫번째 방한때 백범의 아들 김신 장군과 만나 선대(先代)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감격해했다”고 말했다.

헤로니모의 아버지는 독학으로 한글을 깨쳤고, 혹독한 노동이 끝난 뒤에도 다른 동포들에게 한글과 국사를 가르쳤다. 헤로니모는 “군자금 모금보다는 조국의 언어와 역사를 결코 놓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더욱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아버지 임천택은 단 한번도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85년 눈을 감았고, 사후 12년이 지난 97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헤로니모는 “쿠바 정부 최고훈장 등 내가 받은 10여개의 훈장보다 아버지에게 바쳐진 이 훈장이 훨씬 고귀하다”고 말했다.

아홉살때 처음 신발을 신어볼 정도로 궁핍했던 그는 아버지와 함께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는 등 고학끝에 46년 아바나대학 법대에 입학한 뒤 본격적으로 사회에 눈을 떴다. 법대에 진학한 이유에 대해 “법은 정의를 지킬 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며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같은 해에 입학한 카스트로와는 강의를 같이 듣는 것은 물론 시국토론과 시위에도 함께 참여했다. 헤로니모는 동갑내기이자 법대 동기동창인 카스트로에 대해 “명석하고 리더십도 있었지만 최고권력자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5년제 법대 졸업을 1년 앞둔 49년 헤로니모는 학업을 접고 카스트로와 함께 진보정당 ‘오르토독소(Ortodoxo)’에 입당함으로써 바티스타 독재정권에게 본격적으로 저항하는 직업혁명가가 됐다. 이후 10년동안 그는 출생지인 마탄사스 일대에서 도시게릴라활동을 전개했다. 시청을 점령하고 교량을 폭파하는 등 정부군과의 교전에서 몇번이나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지만 그때마다 운좋게 살아났다.

59년 혁명직후 경찰청에서 인사·법무담당관을 지낸 헤로니모가 체 게바라를 만난 것은 63년 산업부의 인사담당관으로 옮기면서였다. 당시 산업부장관이던 게바라는 사르트르가 평가했던 것처럼 헤로니모에게도 ‘완벽하고 위대한 인간’이었다. 부하직원들과 함께 악취가 코를 찌르는 화학비료공장에 자원봉사활동을 갔던 게바라는 심장병을 앓아 호흡도 제대로 못했던 병든 몸으로 헐떡거리면서도 솔선수범했다. 헤로니모는 “장관의 해외출장 차비를 꾸리던 비서관이 가방안에 구멍뚫린 양말 세 켤레만 있는 것을 보고 새 양말을 구입해서 오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게바라는 또 딸과 함께 인형공장에 시찰갔다가 공장 관리인이 딸에게 인형 하나를 선물하자 ‘내 딸아이의 것이 아니라 인민의 것’이라며 되돌려주기도 했다. 헤로니모는 “게바라가 미국 CIA에 의해 볼리비아에서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많은 쿠바인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67년 쿠바정부관리로서 북한을 방문한 그는 생애 처음으로 ‘반쪽의 조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평양은 물론 원산, 함흥까지 들러본 그는 “금강산의 아름다운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쿠바가 공산국가이고 지금도 북한과의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자신을 포함한 모든 쿠바 한인동포들은 남한과 북한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헤로니모는 강조했다. 1세대가 쿠바에 왔을 때 조국은 하나였고, 지금은 비록 둘로 나뉘어 있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합쳐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드니 올림픽에서 남북한이 단일팀으로 활약했을 때와 서해교전으로 양측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을 때 그가 느꼈던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은 따라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30년 가까운 공직생활을 마치고 88년 퇴직한 그는 연금으로만은 생활이 어려워 95년부터 소유하고 있던 82년산 러시아제 라다 승용차로 택시운전을 시작했고 세살 아래의 부인 크리스티나는 간이 음식점을 열었다. 폐차시기를 훨씬 넘긴 고물이지만 쿠바에서는 승용차 소유 자체가 특권이며 택시운전 허가에도 까다로운 절차가 요구된다. 택시운전을 하면서 그는 한국 방문객들이 전해준 카세트 테이프로 노사연의 ‘만남’ 등 한국의 대중가요 몇곡을 서투르게나마 따라부를 수 있는 ‘가창력’을 갖게 됐다.

헤로니모는 그 자신이 공산주의자이자 지금도 혁명참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혁명영웅이지만 쿠바의 낙후된 현실에 대해서는 저으기 비판적이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기회를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기는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마지막 과업은 한인교민회를 조직하는 것과 한글학교, 한국문화 박물관을 개설하는 일이다. 쿠바 전역을 돌면서 한인후예 700여명의 출생증명서를 일일이 챙겨 교민회 설립신청을 했지만 그때마다 정부의 답변은 ‘한국이 2개로 나뉘어 있는 한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헤로니모는 “중국과 일본도 교민회가 있는데 우리만 없다”고 분통을 터뜨리면서 “한국과 쿠바가 수교만되면 앞당겨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5세까지 태어난 쿠바 한인들은 거의 현지화되고 있지만 언어와 문화만 있으면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기는 헤로니모는 “조그만한 한글학교와 문화유적 모조품 몇점이라도 전시되는 박물관을 꼭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그를 만나러 찾아온 국내 종교 관계자들 때문에 서둘러 끝났다. 그는 “아마도 생애 마지막 조국방문이 분명한 만큼 최대한 많이 구경하겠다”고 말했고 나는 “앞으로도 오실 기회가 많을 것”이라며 그의 건강을 기원했다.

〈임은조 연보〉
▲26년 쿠바 마탄사스 출생
▲쿠바명 Jeronimo Im Kim
▲46년 아바나대 법대 입학
▲49년 오르토독소 입당
▲59년 경찰청 인사담당관
▲88년 산업부차관으로 퇴직
〈sdw@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10월 26일 23:2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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