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 출발 당당히 주류사회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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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 출발 당당히 주류사회 진입”
  • 경향신문
  • 승인 2003.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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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브라질. 그 머나먼 곳에도 한인들의 발길이 닿아 있었다. 올해로 40년을 맞은 브라질의 한인 이민사. 그 세월속엔 격동기를 보낸 한인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다. 이역만리에서 인종차별과 텃세를 겪으면서도 이제는 당당히 주류사회를 형성한 한인들. 브라질이민사의 산증인 고광순옹(84)이 고국 땅을 밟았다. 그는 1962년 브라질로 떠났던 첫번째 이주 한국인 14명 가운데 한사람이며, 브라질한인회의 창립을 주도했던 인물. “노점상으로 출발했던 한인들이 이젠 중산층으로 자리잡았다”고 첫마디를 뗀 그는 주름 가득한 노안에 환한 미소를 띤 채 40년 세월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62년 4월에 상파울루 공항에 도착했지요. 제가 마흔네살 때였습니다. 브라질 정부의 비자를 받기 위해 한국에서 파견하는 문화사절단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지만, 사실 속내는 농업 이민이었지요. 우리 일행이 전부 14명이었는데, 일종의 이민 선발대였어요. 당시 박정희 정권이 해외 이민을 장려했거든요. 포르투갈어? 한마디도 못했어요”


당시 브라질에 한인들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6년 먼저 도착했던 한무리의 한인들이 있었다. 바로 반공포로 출신들이었다. 북을 포기했지만 남을 선택할 수도 없었던 사람들. 그들이 인도를 거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흩어졌고, 약 30명에 달하는 반공포로 출신들이 브라질 각처에서 무국적자로 떠돌고 있었다.


브라질에 도착한 ‘14인의 이민 선발대’가 처음 도전한 생업은 농사였다. 한국에서 준비해간 쌈짓돈을 끌어모아 땅을 샀고, 함께 팔을 걷어붙이고 땅을 일구었다. 이름하여 아리랑 농장. 오갈 데 없는 반공포로 출신들도 아리랑 농장에 들어와 함께 땀을 흘렸다. 토마토, 상추, 양파를 재배하고 닭도 키웠다. 하지만 농장 운영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시 상파울루 야채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일본인 농업조합 때문이었다.


“1년 동안 해보니 적자가 이만저만 아니었어요.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있는 시장에서 한국인들이 뿌리내리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 사람들한테 비료나 종자를 비싸게 샀고, 우리가 재배한 농산물은 헐값에 팔았으니까요. 일본인들은 브라질에 자리잡은 지 60년이 되었고, 우린 막 시작하는 처지였잖아요. 결국 한둘씩 농장을 포기하고 상파울루 시내로 들어갔지요”


그때부터 한인들은 보따리 행상을 시작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브라질로 이주한 한인들의 주업은 그곳말로 ‘빠루’라 불리는 행상과 노점상이었다. 반평 남짓한 좌판 위에 커피, 담배, 과일, 그리고 브라질에서 가장 값싼 술인 ‘삥가’를 올려놓고 팔았다. 고옹은 “그래도 농사짓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가족을 먹일 수 있었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와중에 브라질한인회를 결성했다. 고옹은 당시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아 한인회의 틀을 만들었다. 63년 8월15일, 조국의 광복을 기념하고 한인회 결성을 선포하는 그 자리엔 “어림잡아 40여명이 모였다”고 고옹은 기억을 되살렸다.


“초대회장을 맡은 분은 김창수씨였고, 부회장은 장순호씨였어요. 나보다 연배가 10년 가량 위였지요. 나는 한인회에 계속 관여하다가 78년에 회장을 맡았지요”


현재 브라질의 한인 인구는 약 5만명. 40년 전 14명의 선발대가 행상을 하며 개척했던 이국에서의 고달픈 삶은, 이제 이민 1세대의 가슴 속에 ‘전설’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고옹은 “브라질에 한국인 판사가 4명, 대학교수가 5명, 의사가 200명을 넘는다”면서 “특히 월드컵 이후 조국의 힘을 실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요즘엔 한국인들이 회사나 가게를 운영하면서 일본인이나 브라질인을 고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아요. 완전히 브라질의 주류사회에 들어섰지요. 그만큼 한국인들은 생명력이 강해요. 브라질 사회에서 맨손으로 시작해 이 정도로 자리잡은 민족은 없어요. 이젠 브라질 사람들이 ‘자포네스(일본인)’보다 ‘코레아노’를 더 좋아해요. 한국이 월드컵 4강에 오른 덕도 좀 봤지요”


고옹은 그동안 해외 동포에 대해 소홀했던 조국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국이 이렇게 발전해서 매우 고맙다”라며 “브라질로 이민오기를 원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뷰 내내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이 노구(老軀)의 낙관주의자는 “브라질 이민 40년사를 책으로 출판할 준비를 하고 있다”면서 “나는 멀지않아 세상을 떠나겠지만, 앞으로 브라질에 한국인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라고 마지막 남은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문학수기자 sachimo@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10월 30일 00:5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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