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갈림길 ① (서경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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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갈림길 ① (서경석 목사)
  • 서경석
  • 승인 200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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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55년간의 인생행로를 돌아볼 때 나는 여러 번 갈림길을 겪었다. 첫 역경은 해군중위 시절에 군대생활 5개월을 남기고 민청학련사건으로 징역20년형을 받은 일이다. 그때 나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듯한 절망을 느꼈고 또 그로 인해 십여 년 간 숱한 가시밭길을 헤쳐와야 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사건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나는 평범한 엔지니어로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인생의 더 큰 전환점은 89년이었다. 암울했던 박정희 정권 시절에 나는 당시의 많은 운동권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좌익이념으로 무장하고 혁명을 꿈꾸며 살았다. 그렇지만 80년 세 번째 감옥에 들어갔을 때 목사가 될 것을 결심했고 82년부터 6년 간 미국에서 유학하며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런데 미국생활은 우물안 개구리처럼 살았던 나를 크게 변화시켰다.

엑셀자동차가 미국시장에 상륙하는 것을 보며 그동안 내가 신봉해 왔던 <종속이론>이 얼마나 허구였는가를 실감했고 중국유학생들의 모택동 비판을 들으며 내게 잘못된 인식을 주입시킨 선배들을 원망했다. 북한을 다녀온 재미동포들로부터 북한의 실상을 알고 나서는 북을 낙원처럼 생각했던 지난날을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뒷골목의 어두운 게토의 일원으로, 모든 것을 이념의 프리즘으로 보는 삶을 청산하고 開明天地에 나와 대기를 호흡하며 살겠다는 결심을 했다.

88년 1월 귀국후 나는 당시 운동권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연구기관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의 원장서리로 취임했다. 88년의 한국상황을 바라보며 나는 운동권을 크게 걱정했다. 일단 민주화과정에 들어서면 사회운동이 유연하게 변화해야 하는데 운동권은 여전히 과격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내 눈에는 운동권에 대한 민심의 이반이 현저함에도 불구하고 운동권은 도도히 흐르는 민족민주운동의 대세는 아무도 막지 못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게다가 김일성 주체사상파가 운동권을 휩쓸었다. 6개월을 고민하다가 나는 운동권에서 파문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할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기독교운동은 성서에 기초해야지, 특정이념에 기초한 운동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후배들 사이에서 나를 비판하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한번은 가까운 후배를 조용히 불러 “나는 아무래도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스웨덴처럼 되어도 충분히 좋지 않니?”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 후배는 내 말에 완강하게 반발했다. 이 일로 인해 내가 개량주의자라는 꼬투리를 잡힌 셈이 되었다.

89년 1월 <기사연>연구모임에서 기독교운동 후배들이 ‘민족민주운동에 복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기사연>연구원들의 농성이 시작되었다. 나는 반발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생각이 온건하다는 이유로 기독교 기관에서 쫓겨나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렇지만 몇 달후 이사회는 <기사연>의 문을 닫기로 결정했고 원장이하 모든 실무자가 사직했다. 나는 결국 우려한 대로 운동권에서 파문당한 셈이 되었다.

<기사연>을 그만두면 무엇을 하나? 목회를 할 생각으로 서울대학 앞의 <다락방교회>에 이력서를 냈다. 그랬더니 “서경석목사는 운동권이어서 안 된다”라는 답변이 왔다. 또 한번 실의에 빠졌다.

그동안 꾸준히 내 보증인 역할을 했던 친구 김용담판사가 “네가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니? 내가 매달 150만원을 모금해서 석 달간 너를 줄 터이니 새로운 사회운동을 구상해보렴.”하고 제안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새로운 운동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부터 단짝 친구인 박세일 교수와 밤 세워 토론하다가 시민운동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정책대안 마련은 내가 책임질 터이니 너는 시민운동을 하렴.”하며 세일이가 나를 격려했다.

나는 당시 <기사연>이사장이셨던 박형규 목사님께 원장 직을 인계하면서 “<기사연>실무자들이 나를 보고 리더십이 없다고 하는데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운동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때에도 내가 정말 리더십이 없다면 영원히 사회운동을 떠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소신있는 개량주의자로 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경실련 창립당시의 상황은 문익환목사님 방북사건으로 사회전체가 보수화할 때였다. 나는 우리사회가 보수로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산적한 개혁과제 앞에서 다시 보수로 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재야운동을 강화하는 것도 옳지 않다. 급진세력이 커질수록 사회는 더욱 더 보수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중간층(혹은 중산층)에 기반을 둔, 온건한 시민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들 보통시민들은 과거에는 비아냥의 대상이었다.

학생과 민중세력이 길거리에서 데모할 때 이들은 구경만 하는 기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혁명이 아니라 투표로 정권이 바뀌는 세상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표의 향배는 이들 보통시민에 의해 결정된다. 기득권은 항상 여당을 찍고 민중은 항상 야당을 찍지만 보통시민들은 안정 속의 개혁을 원하기 때문에 개혁보다 안정을 원하면 여당에 투표하고 안정보다 개혁을 원하면 야당에 투표한다.

따라서 이들을 개혁의 대열에 묶어 놓아야 사회 전체가 개혁의 길로 간다. 그러려면 우리는 이들이 지지할 수 있는 운동을 만들어내야 한다.

첫째로 새 운동에서는 민중이 아닌 보통시민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이제는 합법운동이어야 한다. 일반시민은 길거리에서 화염병을 던지는 데모대열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다.

셋째로 이제는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정권타도의 구호로는 시민을 움직일 수 없다. 이제는 구체적인 대안을 가지고 설득해야 한다.

넷째로 이제는 소신있게 바른 말을 하는 운동이 나와야 한다. 무조건 노동자, 농민을 지지하면 집단이기주의를 편들 수가 있다. 오히려 땅투기가 극심한 지금의 상황에서는 빈부대결이 아니라 노동자와 기업주를 합친 생산자계층과 불로소득 계층의 대결이 요청된다.... 그야말로 우리는 운동권의 모든 전략을 전부 뒤집어 놓고 있었다.

경실련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경실련은 출범하면서 “시장경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에 기초하되 이로 인한 빈부의 양극화 현상을 정부가 개입하여 시정함으로써 경제성장과 사회적 형평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회를 이룩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가지지 못한 자의 가진 자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조직화해서 가진 자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가진 자든 가지지 않은 자든 상관하지 않고 우리사회가 이렇게 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있는 선한 의지를 조직화해서 그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당시 상황에서 이 선언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예측한 대로 경실련은 운동권으로부터 개량주의라는, 그리고 운동권과 헤게모니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반대로 기득권 층은 경실련이 “운동권이 얼굴을 바꾸어 나타난 또 하나의 운동권”이라고 비판했다. 서경석을 봐라. 전과 3범의 급진 재야인사가 아닌가? 돌이켜볼 때 내가 운동권과 단절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운동권의 이념과 방법론을 정면으로 뒤집는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그랬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운동권에서 축출당한 사실을 알고서야 나를 믿었다. 말하자면 운동권과의 단절이 경실련이 성공한 이유인 셈이었다.

당시에는 운동권과의 갈등이 무척 심각했지만 그래도 지금에 와서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겪을 수 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과정’으로 서로 납득하고 있다. 시간이 약인 셈이다.

95년초 나는 경실련 사무총장직을 사임했다. 서경석이 경실련이라는 등식을 불식해야 경실련이 모두의 것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치개혁의 과제가 등장하자 사람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고 나도 명분 때문에 꼼짝없이 개혁신당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9개월 후 나는 다시 정치를 떠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시민사회로 되돌아 왔다. 선거에서 낙선해서가 아니라 정치는 내가 할 일이 아님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경실련은 내가 떠난 후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흔들렸다.

게다가 과거의 재야세력이 시민운동으로 변신하면서 시민운동의 분위기가 강성으로 바뀌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총선연대였다. 나는 이 운동에 찬성할 수 없었다. 그 해 말에 나는 총선연대를 비판했다. 시민운동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 앞으로 국민 앞에 나와 법과 질서를 지키자는 호소를 할 수 없다.

제아무리 시민운동이 국민의 지지가 높다고 해서 법 위에 군림하면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며 판관(判官)의 역할을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시민운동은 포퓰리즘이 아닌 합리주의에 기초해야 한다.

그러나 이 비판을 하고 나서 나는 다시 강성분위기가 주도하는 시민운동 판에서 소외당했다. 이 정도의 비판도 수용되기 어려울 정도로 당시의 시민운동은 경직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금 89년과 같은 어려운 상황으로 되돌아 간 셈이었다. 그렇지만 침묵은 옳지 않다. 시민운동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나 혼자라도 말해야 한다.

그동안 나는 시민운동 만큼은 전교조와 교총, 여연과 여협처럼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지지 않기를 열망했다. 그랬기 때문에 시민운동이 <시민협>과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로 나뉘어지려고 할 때 나는 시민협을 해소하면서까지 이를 막았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운동의 지도자들은 유감스럽게도 다양성을 존중하는 포용력과 유연함을 갖추지 못했다. 강성시민단체들은 중도의 온건한 목소리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시민운동이 끝내 한편으로 치우치는 길을 간다면 차라리 시민운동이 중도와 강성으로 나뉘어지는 것이 낫다.

우리 사회에 용기있게 바른 말을 하는 합리적인 중도개혁 세력이 커져야 한다는 생각은 경실련 창립당시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나의 소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2001년 말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장으로 복귀하면서 나는 경실련만이라도 바른 말을 하는 균형잡힌 시민운동이 되게 하려고 노력했다.

또 금년에는 보다 광범위하게 중도개혁의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 upkorea신문을 만드는 일도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서 갖는 회한이 있다. 왜 나는 이토록 힘들게 사는가? 왜 모든 사람과 좋게 좋게 지내지 못하고 꼭 자기 색깔을 내야 하는가? 솔직한 성격 탓인가? 아니면 내가 짊어져야 하는 역사의 짐인가? 자기 소신을 피력할 때 감당해야 할 개인의 아픔이 너무 커서 이 번민은 계속되고 있다.
서경석(경실련상임집행위원장)

2003.9.25 ⓒ 2003 UPKOREA 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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