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동포들이 한국에 오는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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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동포들이 한국에 오는 진짜 이유
  • 서경석
  • 승인 200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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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조선족교회를 세우고 동포들을 위한 목회를 하면서 강제추방에 항의하는 집회를 하겠다고 언론사에 취재를 요청하면 가끔가다 매우 '정직한' 언론인과 부딪칠 때가 있다.

'그런데 서목사님, 불법체류하는 동포들은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나는 잠시 망연자실해진다. 답변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 조선족을 위한 목회를 시작할 때 왜 이들이 이렇게 기를 쓰고 한국에 오려고 하는가에 대해 의문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족목회 4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이들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조선족동포들은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또 도저히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또 일제의 혹독한 공출과 징용, 정신대를 피해서 만주로 간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만주로 가서 우리 동포들끼리만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조선반도에서 새로 한 가정이 찾아오면 동네 사람들은 젓가락에서 식량까지 모든 것을 십시일반으로 나누어 새로 온 사람들이 무사히 겨울을 날 수 있도록 했다. 이들은 이렇게 서로 도우며 살았다. 그리고 마을사람의 숫자가 어느 정도 되면 제일먼저 소학교를 세웠다. 아이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만주 북쪽의 흑룡강성 할빈지역에 까지 올라가 살면서도 쌀농사를지었다. 그래서 만주에서 조선족동포를 찾는 방법은 간단하다. 강을 따라, 물을 따라 올라가면 반드시 논이 있고 그리고 그곳에서 쌀농사를 짓는 우리 동포와 만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동포들은 사실은 제대로 공부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중국말을 잘 하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말만 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선족동포들은 옥수수농사를 짓는 한족보다 훨씬 더 잘 살았다. 쌀값이 훨씬 비쌌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족들은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에 가장 우수한 소수민족이었고 많은 우수한 젊은이들이 일류대학에 진학했다.

이렇게 사는 동안 동포들은 오매불망 고국을 생각하며 살았다. 부모들은 돌아가실 때 꼭 '너희들은 고향에 돌아가서 살아라'하고 유언하셨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중국에 묘도 만들지 않았다. 화장을 해서는 그 재를 두만강이나 압록강에뿌렸다. 흘러 흘러 고향에 닿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죽어서 뼈를 고향에 묻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다. 일제시대에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 일본에서, 남방에서, 중국에서 전부 돌아왔다. 그렇지만 만주로 떠난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었다. 북에 김일성정권이 들어서면서 귀국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이제나 저제나 길이 뚫릴까하고 기다렸지만 3.8선은 더욱 굳어지기만 하고 나중에는 6.25전쟁까지 터졌다.

그리고 조선족 동포의 일부는 인민군대의 최전선에서 총알받이가 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리고 나니 고국으로 돌아오는 일은 다 틀려버리고 중국공민으로 살 수 밖에 없었다. 이기간 동안에 동포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은 KBS 단파방송이었다. 동포들은 밤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KBS의 '보고싶은 얼굴,그리운 목소리'프로를 들으며 눈물을 안으로 삼켰다.

그러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은 이들에게 너무도 큰 감동이었다. 한국이 이렇게 잘사는 줄 몰랐다. 그리고 92년 한중수교가 맺어졌다.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꿈에 부풀었다. 그런데 웬걸 한국은 독립유공자의 자손만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부모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확실히 알지만 그 증거를 찾아낼 길이 없다.

일본순사의 수색이 무서워서 일체 증거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낙심했다. 어쩌다가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 자기들을 얼마나 환대했는가를 설명했다. 그럴수록 더욱 고향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갈 수 있는 방법은 산업연수생밖에 없다. 그런데 연수생 쿼터는 제한되어 있는데 가려는 동포들은 그 몇 배가 되니 자연히 프리미엄이 하늘로 치솟는다.

IMF 전까지만 해도 7백만원하던 프리미엄이 IMF 후에 환율이 바뀌면서 천만원대를 넘어섰다. 중국정부가 생각할 때 이 많은 프리미엄이 전부 부로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송출업체의 수속비를 5백만원대로 올려 이 프리미엄의 절반을 공식 수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금액은 부로커가 동포들로부터 받아서 부로커, 송출업체의 간부, 상납자금 등으로 나누어 썼다. 이들 돈의 일부는 한국의 중기협에까지 상납이 되었다.

그렇게 상납을 해야 나중에 동포들이 불법체류로 빠지더라도 연수생 쿼터가 줄지 않는다. 한동안 중국의 송출업체들은 송출권을 따느라고 한국에 와서 줄을 섰다. 송출업체들은 수억원의 상납금과 앞으로도 계속 상납하겠다는 이면계약을 하고 송출권을 땄으며 송출권을 따지 못한 일부 송출업체는 이 비리를 폭로하기도 했다.

그런데 동포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한심했다. 도대체 산업연수생으로 가는 방법은 부로커를 통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니 내가 만난 부로커가 진짜인지 아니면 사기인지를 알 도리가 없다. 재수 좋으면 한국에 가고 재수 나쁘면 사기를 당한다. 그러다 보니 96년 조선족 입국사기 피해자 문제가 불거졌을 때 사기 당했다는 신고를 한 동포들의 숫자는 2만 7천명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잘못된 외국인노동자제도가 동포들에게 끼친 해악이 이렇게 큰 것이었다. 그러고도 한국의 정책당국자는 남의 나라에서 발생하는 비리에 대해서는 우리는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해 왔다.

연수생제도만 한국에 들어오는 방법은 아니다. 친척방문, 공무(公務)입국, 국제결혼 등이 있다. 어떤 방법도 다 프리미엄이 천만원이다. 하다 못해 밀입국(그들은 도둑배라고 한다)을 해도 천만원이다.  연수생으로 들어올 때는 아예 불법체류할 생각을 하고 연수생으로 들어온다. 연수생으로 받는 봉급으로는 천만원 빚의 이자도 갚을 수 없다. '연변위해'와 같은 연길시의 송출업체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3만위안짜리 집을 두채나 저당 잡힌다. 그래도 동포들은 도망간다. 도망가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송출업체는 은근히 도망가기를 원한다. 그래야 저당잡힌 물건들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동포들이 기를 쓰고 한국에 오려고 하는가? 지난 십년의 기간동안에 동포들에게는 세가지 바람이 불어닥쳤다. 첫째는 개혁개방바람이다. 이 때문에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면 엄청난 돈이 있어야 한다. 사회가 자본주의화하면서 더 이상 농사 수입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두 번째 바람은 도시화바람이다. 우리나라에서 지난 60년대에 불었던 바람과 같다.

농촌사람들이 도시로 떠난다. 점점 더 쌀농사짓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쌀값이 크게 하락하게 되니 동포들도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동포들은 도시로 갈 수가 없다. 첫째 중국말을 잘 못하니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다. 둘째로 동포들은 아이들을 인문계학교에 진학시킨다. 기술학교는 좀처럼 보내지 않았다. 그러하니 도시로 나간들 직장을 구할 수가 없다. 젊은 처녀들은 도시로 나가 술집으로 빠졌다. 이때 동포사회에 거세게 불어닥친 바람이 코리안 드림이다. 몇 년만 고생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 그러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난 조선족마을에서 끝까지 버티고 살던 사람도 결국은 한국행을 결심하고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족이 왜 이렇게 많이 들어오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고려인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조선족이나 고려인이나 형성과정은 똑같다. 조선족은 중국땅에, 고려인은 러시아 연해주땅에 정착한 것 뿐이다. 그런데 1938년 스탈린은 일본과의 전쟁을 앞두고 고려인을 강제이주시키기로 결심했다. 고려인은 자칫 일본군의 밀정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38년 10월 초 어느 날 고려인 지도자 3천명을 새벽에 불러내서는 전원 총살시켰다. 그리고는 3일내로 시베리아열차를 타게 했다. 15만명의 동포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정처모를 기차여행을 했다.

이 과정에서 만오천명이 희생당했다. 변을 보다 기차에 깔려 죽고, 얼어죽고, 설사가 나서 죽었다. 우리민족의 해외이주사상 가장 큰 비극이 이 강제이주다. 동포들은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내던져졌다. 그들은 땅굴을 파고 살면서 겨울을 견뎌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용케 살아남았다. 그렇지만 이들은 불행하게도 우리말과 글을 잃고 말았다. 3천명의 민족지도자들이 총살당하고 민초들만 살아남아 중앙아시아에 정착하면서 우리문화와 언어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인은 한국에 오지 못한다. 한국에 와서 큰돈을 벌 수 있음을 잘 알면서도 한국에 오지 못한다.

조선족이 왜 한국으로 몰려오는가? 그 이유는 딱 하나다. 우리말을 유지하고 보존했기 때문이다. 그러느라 중국말도 잘하지 못했다. 독립운동을 한 선조들 탓에 생명지키듯 민족의 언어를 유지했고, 그 때문에 지금 기를 쓰고 한국에 올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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