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왜 천리장성을 쌓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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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왜 천리장성을 쌓았는가”
  • 이석호 기자
  • 승인 2008.07.0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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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한인민족연구소, 천리장성 통해 한민족공동체 정체성 규명

해외한인민족연구소는 지난달 27일 서울 신문로 역사박물관 대회의실에서‘고구려는 왜 천리장성을 쌓았는가’라는 주제로 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재외동포재단이 후원한 이번 학술회의에서 한민족연구소는 고구려 천리장성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통해 문화적 공동체로서의 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정립하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시도했다.

특히 이날 한민족연구소는 “고구려가 정치·문화적으로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었음을 나타냈다”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천리장성의 구조와 특성을 밝히는 데 세미나의 주안점을 뒀다. 최근 확산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의 논리적 근거 즉, 다인종 중국소수민족이 고구려에 영입됐다는 이론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반박하는 것이다.

또한 연구소는 천리장성의 핵심적인 요충인 안시성의 지금까지 알려진 위치에 대한 오류를 밝히고, 다양한 문헌과 현지답사를 거쳐 실제 위치를 확인, 고구려사의 우리 민족사적 위상을 재조명했다.

이화여대 신형식 명예교수는 ‘고구려의 민족사적 위상’이라는 발제를 통해 정치·사회·문화적 시각에서 본 고구려의 위상에 대해 고찰했다. 그는 정치·사회·문화적 시각에서 본 고구려에서 “고구려는 지리적인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근검·절약하는 국민성을 갖게 되었으며, 북방의 중국세력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상무적·호전적 특성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면서 무엇보다도 국민적 단결과 강건한 애국심이 요구된 국가임을 설명했다.

또한 “고구려의 주체적인 자주성은 그 나라의 정치제도에서 나타나 3세기 『삼국지』에 나타난 사자·대노 등의 관직은 망할 때까지도 존재하는 등 당나라의 3성 6부 제도를 끝까지 채용하지 않고 있었다”면서 “고구려는 우리 문화 유출을 막기위해 요녕성 일대의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이어 “중국 측에 대한 도발적인 장성 축조에 중국 측 항의와 반대를 받은 일이 없었다”면서 “천리장성은 고구려의 국가적 위상과 정체성을 지켜준 상징물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같이 고구려는 군사적인 강국만이 아니라 외교와 문화상에도 당당한 국가였다는 것을 발제 내내 강조했다.

하나의 예로 고구려가 중국과 그 주변국가간에 널리 존재하던 조공외교를 탄력적으로 활용하여 중국정부를 역이용하였다는 것. 또한 압록강유역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요하, 북쪽으로 송화강 유역을 지배하여 유목민족의 문화를 변용시켰으며, 대동강, 한강, 낙동강 유역까지 그 문화권을 확대시켜 유목민족의 전통에다 농경민족의 문화를 융합시고 동시에 내륙문화에다 해양문화를 접속시키면서, 북방문화와 남방문화를 융합시켜 민족문화의 틀을 크게 확장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고구려 문화는 백제·신라로 이어져 민족문화의 기틀이 되었으며 이를 일본에 전해줌으로써 동아시아문화권을 형성하는데 주역이 되었다”고 해석했다.

윤명철 동국대학교 교수는 천리장성의 구축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천리장성은 요동반도의 자연환경과 국제환경을 고려할 때 해양적 요인이 분명하게 작용했고, 이것은 당연히 해양방어체제의 구축으로 나타났을 것이다”고 전제했다.

그는 천리장성의 중요한 성들과 그를 보위 또는 보완하는 대성들은 결국 육상방어와 해양방어를 복합적으로 구축한 것으로서 해양도시와 항구도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륙수로와 육로를 연결한 후 해로와 통합되는 경제물류를 확장하고 대륙의 정치적인 통일을 이루는 데 효율성이 높다”면서 “천리장성의 유기적인 시스템을 갖춘 해항 및 하항을 활용하여 동아지중해의 대부분 지역과 이어지는 대외항로를 사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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