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끼시마마루 폭침의 진실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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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끼시마마루 폭침의 진실은 무엇인가?
  • 김정동
  • 승인 2003.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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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일본동경에서 발행되는 총련계 일간신문인 <조선신보>에 실린 "우끼시마마루(浮島丸) 폭침사건관련 새자료발견"에 관한 <오마이뉴스> 기사를 읽고 목원대학 건축과 교수이며 문화재위원인 김정동 교수가 <오마이뉴스> 일본지사에 보내온 글이다.

김 교수는 건축사학전공자로 일본속의 한국근대사 현장을 탐구하는 건축학자이며 지난 9년 동안 일본 동경에서 발행되는 교민잡지 월간 <아리랑>에 일본 전역을 돌면서 발굴한 한국 관련 역사자료를 2003년 10월호로 100회 연재한 보기드문 연재기록을 가지고 있다.

김 교수는 아래의 자료글이 현재 일본의 코리안 사회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우끼시마마루(浮島丸) 폭침 사건 재조명을 위한 심도깊은 논의에 도움이 되는 자료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편집자 주>

고혼을 다시 불러내

몇 년 전 북한은 ‘우끼시마마루(浮島丸) 폭침사건’을 영화로 제작했다. 제목은 <살아있는 영혼들>이었다. 북한 조선중앙방송은 이 영화가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하늘을 보지도 못하고 현해탄에서 생죽음을 당하게 된 수천명의 조선사람들이 일제 야수들을 절규하는 울부짖음이 끝없이 메아리 치는 것”으로 끝났다며 “역사적 사실을 진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영화는 일제의 범죄적 만행으로 숨진 조선 사람들의 영혼들이 오늘도 일제야말로 우리 인민의 철천지 원수이며 수난에 찬 과거를 절대 잊지말고 일제의 엄중한 죄행을 반드시 결산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다시금 새겨주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2000.12.12, 연합)

사실 우끼시마마루 폭침사건은 몇년 전 부산의 극단 ‘새벽’이 연극화했다. 1992년 처음 서울 혜화동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상연될 때의 제목은 <폭침- 우끼시마마루는 부산항으로 못 간다!>였다. 그 후 3년만인 1995년 8월 3일 부산의 소극장 실천무대에서 다시 올렸을 때는 이성민(李性旻) 작?연출의 <피의자- 우끼시마 호 폭침에 관한 단상>이란 이름으로였다.

일본에서도 이 사건은 영화화된 바 있다. 우끼시마마루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아시안 블루>가 1995년 7월 28일 도쿄에서 개봉됐다.

마이니치 신문은 영화는 ‘우끼시마마루 사건 제작지원 연락회의’가 결성된 지 3년만에 빛을 보게 되는 것이라 했는데 이에는 재일동포들의 도움도 컸다고 한다. 신문평은 ‘현대의 청춘 군상과 패전 직후의 사건을 중첩시켜 묘사한 문예작품’이라 했는데, 같은 해 8월 14일 저녁 한겨레신문 문화센터에서도 상영된 바 있었다.

우끼시마마루 폭침사건은 어떻게 폭로되어 왔든지 그 몇 사람의 공로를 추적해 보자. 이 사건은 1945년 이후 남북한, 그리고 일본에서도 관심 사항이 되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재일동포 박경식(朴慶植 1922-98)씨가 1965년 <조선인 강제연행기록>에서 다루어 알려지기 시작했다. NHK 는 1977년 8월 13일 이 사건을 <폭침>이란 제하에 다큐멘터리로 제작 방송,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재일동포 김찬정(金贊汀)이 1984년에 고단샤(講談社)에서 <우끼시마마루, 부산항으로 향하지 않다>를 출간하면서 전면에 부각됐다.

1992년 시모기타 지역문제 연구소 사이토 사쿠지(齊藤作治) 소장이 <아이고의 바다>를 펴냈고, 이것을 1996년 <우끼시마마루 폭침사건 진상>이란 제목으로 가람기획에서 출판,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책은 ‘우끼시마마루 폭침 진상규명위원회’전재진(田在鎭) 회장의 편역으로 나온 것이다. 동경에서 발행되는 교민잡지 월간<아리랑>에서도 1996년 8월 곽미정 편집장의 취재로 이 사건을 다룬바 있으니 이 사건은 전후 55년 간의 풀리지 않는 숙제가 되어 있는 셈이다.

우끼시마마루 귀환선으로 출항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북쪽 가장자리 땅 아오모리현[靑森縣]의 시모기타(下北) 반도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시모기타 반도는 도끼같이 생긴 땅으로 반도 초입에 있는 오미나토 항[大津港]에는 오미나토 경비사령부가 포진하고 있어 이쪽 해안 방어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오미나토 항은 현재의 무쓰시에 속해 있는 항구로 아오모리 시와는 오미나토 선[大津線]으로 연결되어 있다.

오미나토 해군 경비사령부는 패전 3일 만인 8월 18일 우끼시마마루 함장인 도리우미 긴고(鳥海金吾) 중좌에게 조선으로 돌아가는 귀환자를 태우고 부산으로 가라고 출항 명령을 내렸다. 매우 발빠른 조치였다.

우끼시마마루는 4,730t짜리 대형 배로 1937년 오사카 상선 소속의 화물 및 여객선으로 건조된 것이었다. 태평양 항로와 오키나와 항로를 운항하다가 전쟁 중이던 1941년 9월 3일에 징발되어 전함으로 개조되어 해군의 특무함으로 쓰였고 해군 특별 수송선이 되었다. 주로 쓰가루 해협[津經海峽]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오미나토 부두 앞으로 이동시켜 ‘배에 타지 않는 자에게는 배급을 주지 않는다’며 강제 승선시켰다.

귀환자들은 홋카이도 지방에서 혹사 당하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3,725명이 이 배에 강제로 태워졌는데 숫자는 매우 불확실하다. 약 4천명에서 7천 5백명이라는 설까지 있다. 승선 명부도 작성되지 않았고 마구잡이로 태웠기 때문인데 사람은 그저 짐짝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태운 이유는 딴 데 있었다.

일본인 승객은 단 한명도 없었으며 일본 해군 255명만이 호송 담당으로 승선했다. 해군들 역시 가고 싶지 않은 항해였다. 조선으로 가봤자 좋은 일은 전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부산에서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명령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찝찝했다. 그들은 호시탐탐 뛰어 내릴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 배의 운명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차피 수장될 사람이었다. 그러나 귀환자들은 다가오는 운명을 모른 채 귀국의 기쁨에 지난 모든 것을 털고 그 배에 올라 탔던 것이다.

5일이 지난 후인 22일 밤 10시 우끼시마마루는 오미나토 항을 출항했다. 우끼시마마루는 "뜬섬 같은 배"란 뜻이 된다.

배는 쓰가루 해협을 지나 동해 쪽으로 나와 니가타 앞바다를 거쳐 쓰루가[敦賀]를 지났다. 이틀간의 항해가 계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배 안은 그야말로 지옥도(地獄圖)와 다름없었다. 콩나무 칸같은 배 속에서 그들은 먹고 자는 것과 배설을 해결해야 했다. 승객들은 배가 부산으로 가는지 진해로 가는지 혹은 원산으로 가는지 그 방향도 모르고 있었다. 배는 이제 더 이상 가지 않을 것인데 그것도 모르면서 말이다.

붉은벽돌의 도시

배는 드디어 운명의 종착지가 될 교토부[京都府]의 마이쓰루 만[舞鶴灣]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일본은 보통 남태평양 쪽을 표일본(表日本), 우리나라 동해 쪽은 이일본(裏日本)이라 부른다. 교토 시는 혼슈(本州)의 남쪽 도시이므로 표일본에 해당하고 마이쓰루 시는 이일본에 해당한다. 교토 부는 일본의 허리에 해당하는 곳인 것이다.

마이쓰루시[舞鶴市]는 멀리 북쪽 나라에서 이곳까지 날라온 학이 날개를 펴고 쉬는 모습이 마치 학이 춤을 추는 것 같다하여 이름 붙여진 곳으로 여름에는 비가 많고 겨울에는 눈이 많은 지역이다.

마이쓰루는 천혜의 항구로 청일전쟁이 일어날 즈음에는 이미 일본 해군의 거점이 되어 있었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그 전리품으로 마이쓰루에 군항을 건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러일전쟁 때는 도고(東鄕平八郞, 1847-1934) 중장이 이곳에 진을 치며 승리를 이끈 곳이기도 했다. 마이쓰루는 요코스카[橫須賀], 구레[吳], 시세보(佐世保)와 함께 일본 4대 군항으로 해군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전쟁 전 일본에서 해군 장교를 양성하는 곳은 세 군데 있었는데 그 곳은 히로시마 현의 에타시마(江田島) 해군병학교, 도쿄의 쓰키지[筑地] 해군경리학교,그리고 마이쓰루의 해군기관[機關] 학교였다. 마이쓰루 역 뒤편 언덕에 있던 해군기관학교 학생들은 제복에 단검을 차고 시내를 활보, 여성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곤 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해군 군사기지로 벽돌창고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중 70여 동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어뢰, 총포 등을 넣어두던 창고들이었다. 이곳 창고에서 나온 어뢰들이 우끼시마마루 폭침에 쓰여졌을지도 모른다.

그 군용창고 건물들이 지금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마이쓰루시의 개성을 상징하는 건물로 보호,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시민 운동가들에 의해 붉은 벽돌 건조물의 조사 활동이 이뤄지고 붉은 벽돌 심포지엄이란 것도 열렸으며 매년 여름이면 이 창고군에서 야외 재즈 페스티벌이 벌어지기도 한다.

1993년 11월에는 세계최초의 ‘붉은 벽돌 박물관’이 이곳에 들어섰다. 붉은 벽돌 창고 중 하나가 지금 ‘붉은 벽돌 박물관’이 되어 있는 것이다. 지방자치체가 도시 관광의 초점을 붉은 벽돌에 맞춘 것이다. ‘붉은 벽돌 거리’도 만들어지고 붉은 벽돌을 주제로 하는 많은 관광상품도 나왔다.(前 久夫, <京都의 붉은 벽돌>, 京都新聞社, 1997)
비록 우리에게는 비극의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지만 보존주의자에게는 참으로 부러운 곳이기도 했다.

자폭? 피폭?

8월 24일 오후 5시. 배는 ‘음료수 보급이라는 명목으로 기항하기 위해’ 마이쓰루 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항해의 종말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일이었다.

오후 5시 20분경 시모사바가[下佐波賀] 앞에 배가 이를 무렵 배는 폭발음을 일으키며 침몰했다. 만으로 들어 온 지 20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시모사바가는 마이쓰루 만내에 어촌이었는데 그 마을에서 해상으로 3백m 떨어진 지점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우끼시마마루 사건’이다.

이름에서 배는 떠있는 의미를 주고 있지만 그 배는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조선인 524명과 일본군 25인을 포함한 549명이 일시에 수장되었는데 이 숫자는 일본군이 발표한 것이라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수장된 조선인이 6천 5백명이라는 추정치도 있어 타이타닉 호의 참변보다 더한 대형 해상사고였다. 타이타닉 호는 1912년 침몰했는데 승선인 2,228명 중 1,523명이 사망한 사건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침몰이 ‘자폭침몰’인가 ‘피폭침몰’이었는가다. 일본은 이 사건을 ‘미국 기뢰에 의한 단순 해상사고’로 발표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그 사건의 사후처리이다. 일본 정부는 쉬쉬하고 입막음했다. 우리나라의 그 뒤처리 방법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데도 제대로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이 도시는 군사 도시였기에 조선인에게는 더 괴로운 도시이기도 했다. 군경의 경계가 무척 삼엄했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스파이로 몰리는 지경이어서 숨어서 지내는 편이 오히려 좋았다.

폭침사건도 그런 경계 하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비밀이 오래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죽은 사람 명단, 그 현장 사진 한 장 남지 않았던 것이 다 그런 연유였다.

엉터리 신문들은 그 날 일어난 ‘하치고 선(八高線) 열차 충돌사건’을 대문짝 만하게 취급하고 있었다. 또 그즈음 공교롭게도 마이쓰루 항구 부근 타이라 해병단 숙소에서 또 다시 원인모를 증기폭발 사고로 50여 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우끼시마마루에서 구조된 일본군들이 수용되었던 숙소에서였다. 입막음 작전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은폐 중

재일 근대사 연구가 최석의(崔碩義)씨는 ‘8?15 해방 전후 마이쓰루의 추억’(재일조선인 운동사연구회, 재일조선인사연구, 1993.9)이란 글에서 마이쓰루에서의 개인적 경험을 적고 있다. 그는 1943년부터 46년까지 이곳에 살았는데 그가 이곳에 살게된 경위는 군수경기로 비교적 살기가 좋았고 미군 공격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마이쓰루 시에도 강제연행된 조선인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다. 역시 조선부락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이들은 대개 군사도시를 만들 때 동원된 사람들인데 대개 1939년에서 45년까지 7년동안 끌려왔다.

최석의씨는 이곳에서 우끼시마마루 폭침사건 뒷마무리를 하기도 했고 그 후 일본으로 귀환하는 동포들, 조선 땅에서 돌아오는 일본인들의 귀환 모습을 목격한 사실을 이 글에서 증언하고 있다.

1천명 중 살아난 사람들은 그 후 다시 조국으로 돌아갔지만 그대로 일본 땅에 남은 사람도 많았다. 현재 66세가 된 사람도 있는데 배를 탈 당시 10세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었다.

배는 침몰하고 나서 1954년 10월까지 그 바다에 수장된 채로 있었다. 수장된 조선인의 시신도 그대로였으며 후생성 원호국이 인양했을 때 283구의 유골만이 수습되었다.

그리고 인양된 배는 이노(飯野)중공업주식회사에 고철로 팔려나가 분해되어 버렸다. 그렇게 서두를 일이 아니었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한국전쟁과 그 후 전재복구로 고철이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기록을 잘 남기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하는 일본인들이 왜 이 배를 마이쓰루 항구에 보존하지 않고 내버렸을까. 그 이유는 알만한 것이다.

이 수장자들을 위로하는 추도회는 두 곳에서 열리고 있다. 그 수습된 유골들은 도쿄 메쿠로 구[目黑區]의 절 유텐지[祐天寺]에 안치되었다. 때문에 그 추도회가 매년 8월 22일 유텐지에서 열리고 있는 것이다.

추도회에는 패전 뒤 포로 학대 등의 혐의로 B,C급 전범으로 억울하게 구속되었던 재일동포들의 모임인 동진회의 회원들도 참석해 일본의 전후 보상문제를 추궁했다.

일본 정부는 이들의 유골들을 유족들에게 반환할 방침이라고 1995년 6월 9일 밝혔다. 유족과 생존자들은 이미 약 30억엔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있다. 교토 지방법원은 인도적 관점에서 조기반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다. 인도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고 조기반환은 무슨 말인가.

2002년 교토 재판소의 판결에서는 승객에 대한 안전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과오를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지만, 2003년 5월의 오오사카 재판소의 판결은 일본정부는 책임이 없다였다. 이 판결로 일본정부는 지금까지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또 하나 ‘우끼시마마루 순난자(殉難者)를 추도하는 모임’은 마이쓰루 ‘순난의 비’ 앞에서 치러지고 있다. 이름이 ‘순난’으로 교묘하게 포장되고 있다. 추도 집회는 지역주민과 재일동포 등에 의해 치러지고 있다. 물론 일본 정부는 외면하고 있다.

1996년 8월 24일 후생성장관 간 나오토(菅直人-현 민주당 당수)는 우끼시마마루 사건의 조선인 희생자 등을 애도하는 전보를 이 추도집회에 보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조난으로 숨진 분들에게 삼가 애도의 뜻을 전한다.…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존귀함을 다음 세대에 계속 전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전후 범죄사건 이후 장관급이 보인 첫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 애도전보는 폭파 침몰을 지시한 자에 대한 책임자 문제, 이에 대한 사죄문제, 그리고 보상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시간은 그렇게 가고 있다. 문제를 제시하는 유족들의 소리도 메아리로 사라져 버릴 뿐이다.  

2.'우끼시마마루' 침몰사건 관련 새 자료 발견

<조선신보> 보도...일본정부의 배상회피 새자료 발견

  지난 9월 29일 일본 동경에서 발행되는 총련계 일간신문인 <조선신보>의 발표에 따르면, 해방직후인 1945년 8월 24일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따라 징용으로 끌려 왔던 조선인을 귀환시키려고 한 “우끼시마마루(浮島丸)”가 마이즈루(舞鶴) 앞바다에서 폭발, 침몰한 사건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최근 발견되였다고 한다.

이 자료는 일본정부가 1950년 2월 당시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GHQ(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에 제출한 보고서의 일부라고 밝혔다.

당시 일본정부는 5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이 사건과 관련 말로는 인도적으로 대응한다고 하면서도 진상규명은커녕 피해자의 유골수집조차 회피했을뿐만 아니라 GHQ에 “조선측이 배상요구를 제기해 와도 이를 용인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자료에 의해 밝혀졌다고 한다.

조선인강제연행조사단이 발굴한 이 자료는 29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및 해외동포 연구인들에 의한 “우끼시마마루(浮島丸)"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평양토론회에서 발표되었다고 <조선신보>는 밝혔다.


우끼시마마루(浮島丸)사건이란?  


일본의 동북부에 위치한 아오모리(靑林)현의 일본 해군기지에 끌려와 강제노역을 하던 조선인과 그들의 가족 3735명을 해방 직후인 45년 8월 22일 부산으로 귀환시키기 위해 군함에 싣고서 출발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부산을 향하여 출발한 우끼시마마루호는 갑자기 진로를 변경하여 교토(京都)의 마이즈루항(舞鶴港)에 입항하여 정박한 후 24일 저녁 다시 출발한다. 하지만 출발 직후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 사고와 함께 배가 침몰, 524명(일본 정부의 공식발표)이 수장되었다.

폭파사고와 배의 침몰은 당시 일본군에 의한 계획적인 범행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아직도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우끼시마마루(浮島丸)사건은 한국의 목원대학 건축과의 김정동 선생에 의해 발굴되어 일본에서 발행되는 교민잡지 월간 "아리랑"에 소개된 것을 제외하곤,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진 바 없는 일본군의 조선인 학살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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