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민시대]“더 늦기전에…” 40대들도 한국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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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민시대]“더 늦기전에…” 40대들도 한국 탈출
  • 미주중앙일보
  • 승인 2003.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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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 화이트칼러의 이민바람은 ‘대탈출’ 또는 ‘이민열풍’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히 폭발적이다.

최근 한국서 TV 쇼핑업체가 실시한 이민상품은 단 90분만에 2천9백53명 신청에, 5백3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매출실적을 기록했다.

이러한 열풍을 반영이라도 하듯 코엑스를 비롯한 한국 곳곳에서는 대성황의 해외 이민박람회가 이어지고 있다.

TV 쇼핑업체의 이민상품에서든 이민 박람회에서든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은 역시 40대 전후의 중산 장년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이들은 누구인가.



“따지고 보면 이민오는 이유 다 같은 것 아녜요? 나도 한국서 제법 살았다는 사람이지만 정말 자식 교육 제대로 시키면서 남 눈치 보지 않고 편히 살아봤으면 싶더라구요.”
한국 유수 섬유업체의 중견간부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왔다는 이모(45)씨.

그는 지난해 큰 결심을 했다. 사직서를 내고 홀로 LA로 날아왔다. 더 늦기전에 미국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리고는 미국 생활이 어느정도 안정됐다는 판단 아래 올해초 가족을 불러들였다.

무역업에 종사하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현재는 그의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유망한 비즈니스를 물색중이다.

두번째 케이스.

유명 대기업의 컴퓨터 네트워크 기술자인 박모(40)씨는 지난 6월 자청해 LA 자회사로 전근해왔다. 미국에 영주하는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의도에서다. 한편 피아니스트인 그의 아내는 부업으로 피아노를 가르치며 조만간 예능학원을 차릴 계획에 있다.

세번째 케이스.

약사인 조모(39·여)씨는 남편을 한국에 홀로 둔채 지난해 여름 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아들과 함께 미국에 들어왔다.

남가주의 제8학군이라고 불리는 어바인에 제2의 둥지를 틀었다. 브로커를 통해 E2비자 신청에도 들어갔다.

대학 강사로 있는 남편은 자신 명의의 부동산을 정리하는대로 지금껏 살아온 한국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의 가족과 합류할 계획이다.

사람의 일생 중에서, 한창 기운이 왕성하고 활동이 활발할때라는 마흔 안팎의 장년층. 이중에서도 전문직 출신의 중산층.

오늘날 한국서 미국땅으로 찾아드는 신이민자들의 주류는 바로 이들이다.

외교통상부의 통계에 따르면 시즌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지만 이민 신고자수는 월평균 1천명선. 이중 미국행은 상대적으로 허가가 까다로운 탓에 20% 내외.

하지만 한국서 이민 절차를 밟지 않고 방문비자, 주재원 등의 임시체류 신분으로 들어온 다음 추후 신분을 변경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을 고려하면 40대의 미이민 러시는 분명 한인 이민사에서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추세다.

과거 “50달러만 달랑 손에 쥐고 와서 온갖 고생끝에 이렇게 일궈냈다” 등의 아무개 성공담이 한인 이민사회에서 늘 회자되는 이야깃거리였다면 오늘날 이들의 이민사회에서는 “xx 유형의 사업체가 투자성으론 최고라고 하더라. xx네 엄마는 얼마나 극성맞은지, 아들 추천서까지 직접 받아내느라 이리저리로 뛰어다니고 하더니 존스홉킨스를, 그것도 풀 장학생으로 보냈다더라”등 교육·사업 관련의 이야기가 이들의 화두다.

남의 전설적인 이야기 보다는 실질적인 이민 정보에 민감한 부류다.

이들에게서는 한국서 축적한 재산을 바탕으로 편하면서 또한 효과적으로 미국에서의 ‘가능한 삶’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만큼 이들은 적응력도 뛰어나고 허황된 꿈도 꾸지 않는다.

그렇다면 재력과 전문성을 두루 갖춘 이들 40대의 화이트칼러들은 과연 누구길래 상대적으로 나은 삶을 살아온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오려는 것일까.

이민상품이 나오기가 무섭게 팔려나가고, 이민박람회 마다 성황을 이루고 있는 ‘이민열풍’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선 이들의 이민동기부터 알아보자.

하지만 이들이 자신들이 살아온 한국을 떠자고자 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한마디로 “한국에서는 ‘사람답게’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이들은 말한다.

감당할 수 없는 사교육비, 보장할 수 없는 자녀의 미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기만 하는 아파트 값, 치고받기만 하는 정치판, 앞이 보이지 않는 자신의 미래 등이 바로 이들이 꼽는 주된 이유다.

교육환경만 봐도 그렇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저녁 10시까지 사교육을 시켜야 하고 이에따른 사교육비로 가계에는 주름살이 깊어만 간다.

그러나 이들이 겪는 더욱 큰 괴리는 이렇게 한들 자녀의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 거꾸로 본다면 이들 40대에게 ‘미국은 사교육비도 별로 들지 않고 입시 지옥도 없는데다 자녀로 하여금 국제시민으로서 영어 구사능력까지 갖출 수 있게 해주는 매력의 나라’다. 이것만으로도 이민은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자녀들이 본격적으로 입시 지옥의 관문으로 가는 시기인 사십 줄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미국으로의 이민이 뿌리칠 수 없는 유혹으로 등장하게 마련.

이들은 또한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상대적인 박탈감을 크게 느끼는 부류다.

“어떤 사람이 부동산으로 한번에 버는 게 월급쟁이 평생 모은 돈 보다 많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디 살 맛이 나겠어요?”
이민을 계획중이라는 이현석(40·서울 거주)씨는 이렇게 반문한다.

하지만 그 역시 따지고 보면 35평짜리 아파트 한채를 비롯해 총 10억원을 웃도는 자산 소유의 재력가.

그는 자신이 느끼는 괴리를 이렇게 토로한다.

“30평대 아파트가 7-8억 한다면 솔직히 그게 말이나 됩니까. 이돈을 가지고 미국으로 가면 이곳 보다 더 편하고 윤택하게 살 수 있겠더라구요. 여기처럼 막무가내로 얘들 공부시키지 않아도 되고···.”
미국으로의 이민을 꿈꾸는 한국의 40대 중산층.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갖고 있는 불만과 불안 심리는 이씨의 경우처럼 40대의 탈 한국 러시를 부추기고 있다.


지익주 기자


입력시간 :2003. 09. 22   13: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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