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씌어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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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씌어진 시
  • 윤동주
  • 승인 2007.10.2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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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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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 1917년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출생. 1943년 7월 교토대학 재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 1945년 2월 29세 나이로 일본 후쿠오카감옥에서 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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