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용 기사모음 9-11면
상태바
편집용 기사모음 9-11면
  • dongpo
  • 승인 2003.09.0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및 리히텐쉬타인 등 5개국과의 국경선을 두고 있는 중부유럽 알프스의 나라 스위스 연방공화국, 지리학적으로 수도는 베른으로 남한의 절반이 채 못된다.

PHOTO 4 : Korean Ambassador in Bern, Switzerland

유럽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고 있는 재외동포들은 유핫, 국제결혼, 취업, 상사주재원, 학생 등 다양한 형태로 진출하여 오늘날의 동포사회를 형성하고 크고 작은 지역마다 지역한인회가 있고 국가마다 연합회한인회가 있으며, 유럽 전지역을 총괄하는 구주총한인연합회가 조직되어 주로 친목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스위스 연방공화국에 최초 거주한 한국인들은 유학생이었으며 1921년에 이관용 박사는 한국
사람으로서는 유럽에서 최초로 취리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세계최고의 호텔
사관학교로 불리우는 로잔호텔경영전문대학을 비롯해 스위스 주요 도시마다 산재해 있는 11
개가 넘는 관광경영, 호텔경영전문학교, 그리고 쮸리히와 로잔의 스위스연방공과대학, 노바
티스연구소 등지에서 1백명이 넘는 한국 유학생들이 써비스분야와 전문분야의 경영자가 되
기위해 유학의 길을 걷고 있다.
1958년이후 1천여명이 넘는 한국어린이들이 스위스로 입양되었고 60년대 중반이후 독일지역
에 광부 또는 간호요원으로 취업하였다가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난 한국인들중 일부가 스위
스에 정착함으로써 교민의 주류를 이루기 시작하였다. 1965년 유럽에서 유학을 마친 후 스
위스에 거주하는 교민들간에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차복재씨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하여
1966년 초부터는 김연주씨가 16년간 한인회장직을 맡아 봉사하면서 스위스 한인연합회가 자
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1968년 11월에 13명의 간호사들이 한국에서 스위스로 취업을 기화로 1972년에는 54명의 간
호사들이 베른의 병원에 취업을 함으로 한인사회 및 교민의 규모는 더 커졌다. 1980년 김정
해씨가 회장으로 재임시에는 스위스한인회 체육대회의 전신인 탁구대회가 발족되었고, 1985
년 하태규씨가 회장으로 재임중에는 쮜리히 한국학교가 창설되어 스위스 주류사회에 한인사
회의 참여가 시작되었다. 송지열씨가 재임중엔 새로운 한인회칙이 개정되면서 ‘스위스한인
회’ 명칭이 ‘스위스한인연합회’로 개정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1988년 당시 한인사회
에는 연합회 산하에 4개의 지역한인회가 운영되고 있었고 4개지역한인회의 연합인 중앙 본
부회로 회장은 이때부터 연합회장이라 불렀다. 1989년부터 이용종 전임회장이 재임중에는
연합회를 상징하는 연합회 로고를 도안하였고 본격적인 스위스한인체육대회가 시작되면서
매년 한인회 활동이 본격화 되었다. 1993년 송리산 전임 회장때는 연중 한인행사때마다 문
화행사를 실시하기 시작했고 1995년 윤세철 전임회장은 한인소식지인 ‘메아리’를 매년 2
회씩 발행해 왔으며, 새천년에 이종진 전 회장은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스위스생활책자를
펴냈다. 현재 스위스한인연합회에서는 신구 회원 모두에게 유익한 ‘스위스생활’이라는 책
자를 발행하고 개정판을 내고 있으며, 소식지 ‘메아리’는 1995년 이래 년 2회, ‘한인회
보’는 1988년 6월 창간호 이래로 년 1회 발행해 나가고 있다. 연합회에서 발간하는 소식지
와 회보는 유럽 주변국들의 한인사회 관계자들에게도 배포하고 있다.
스위스는 작은 나라이면서 독일어, 이탈리아어,불어 등 언어권을 달리하다보니 자연히 지역
한인회도 그 언어권을 경계지역으로 나눠진다. 예를들면, 스위스 북부지역으로부터 독일어권
지역 한인으로 구성된 스위스한인회의 막내동이로 창립된 샹갈렌동부지역한인회, 다른 지역
한인회가 1개의 한인교회가 있는데 반해 4개의 교회와 1개의 천주교회, 그리고 도서관까지
있어 스위스 한인사회의 중심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쮜리히지역한인회, 프랑스와 독일 스
위스의 3개국이 국경을 접하고 있는 바젤지역한인회, 스위스의 중심지이자 정치의 수도인
베른지역한인회가 있고, 유일하게 스위스남부 불어권지역 한인동포로 구성된 레만지역한인
회 등이 있다.
이렇게 모두 5개의 지역한인회 임원들이 다시 모여 운영하는 스위스한인연합회가 실질적으
로 오늘날 1천5백명의 한인가족들을 위하여 봉사하고, 더 나아가 스위스 가정에 입양되어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는 2000명 이상의 입양인들과도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티치노 등지의 이탈리아어권 지역에는 230여명이 의사직으로부터 학생층에 이르기까지 다양
한 직업분포를 가진 교민이 거주하고 있으나 아직 한인회가 구성되어 있지 않다.
스위스한인사회에서 봉사하고 있는 운영위원단들의 구성을 살펴보면 여성들의 활동이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 쮜리히지역한인회(이준배 회장)와 레만지역한인회(쟈니킴 회장)
를 제외하고는 스위스한인연합회(이명숙 회장)를 비롯하여 샹갈렌지역(차현숙 회장), 바젤지
역(박명설 회장), 그리고 베른지역(강성희 회장)에서는 여성회장들이 줄곧 대를 이어 가고
있으며, 쮜리히지역 박경애 부회장과 레만지역 수잔리 부회장이 여성부회장들로써 활발한
사회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음은 다른 나라에서 보기 드문 스위스 한인회의 이색풍경이라 할
수 있다.
한국출신으로 스위스 양부모를 두고 두고 있는 입양자들도 이젠 가정을 이룬 가장이자 주부
로써 스위스에서의 중추로 떠 오르고 있다. 이들도 한인회와 마찬가지로 스위스내에서만도
지역별로 언어가 다르다 보니 동일 언어권을 중심으로 모임단체를 결성하고 유대관계를 지
속하고 있는데 독일어권지역의 ‘동아리’와 ‘한서문화협회’, 그리고 불어권지역의 ‘김
치’와 ‘한서친서협회’가 바로 그들의 친목단체이다. 이들 단체와 협회는 연합회나 지역
한인회가 주최하는 굵직한 행사때마다 참석하고 음식을 장만하기도 하며 한인회의 협조를
받아 한국음식만들기 등의 생생한 현장실습도 하는 등 한국배우고 체험하기에 적극적이다.
우리나라 남한 면적의 절반도 채 안되는 스위스에는 금융과 교육의 수도인 쮜리히와 외교의
수도이자 종교개혁의 발생지 제네바에 각각 3개씩의 한국레스토랑이 성업중이다.
지역한인사회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는 한인단체들로는 여성합창단이 있으며 이들은 매년 한
인동포들을 초대하여 발표회를 가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파견된 지사로는 72년도부터 파견 근무중인 한국무역진흥공사(KOTRA),
76년이후의 대한항공 쮜리히지점, 91년부터 현대자동차, 그리고 96년도부터는 대우자동차와
종근당, 그 이후 대우증권, LG화학이 주로 쮜리히 부근과 제네바 등지에서 영업을 하고 있
다.
국제결혼과 입양자가 많은 스위스 한인사회
2003년은 스위스가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일원으로 한국에 주둔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주스위스대사관에서는 본국과 제네바에 있는 국제연합유럽본부의 지원을 받아 서울
시립무용단들의 한국전통무용의 진수를 지난 6월에 선 보인 바도 있다.
스위스 한인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스위스인과 국제결혼으로 이루어진 세대가 많다는 점이
다. 원래 스위스내 사회적 분위기가 130만 외국인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로 익숙해 있지
만 외국인과의 화합과 융화를 위한 스위스 정부의 외국인 정책과도 관계가 있다.
스위스는 세계최고의 부국이자 영세중립국으로 안정되어 있어 이곳의 한인동포사회도 변화
가 거의 없는 편으로 안정된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직업별로는 한국레
스토랑 및 한국식품, 관광대국인 만큼 국내관광객들을 지상수배하는 10개 이상의 인바운드
한국여행사와 전문가이드, 기념품점, 기타 숙박업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한인들이 대부분
이며, 간호사, 의료업, 제조업, 예체능 및 학계 등 나름대로 다양한 분야에서 고급인력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32년째 스위스 최고의 권위있는 쮜리히연방공과대학 교수로 근무하는 하
태규 박사와 로잔대학교의 교수인 조경하 박사, 유민정 박사가 스위스 유명대학교에서 재직
하며 연구활동중이다. 스위스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로는 동양화가 묵림당 소운 이한경씨를
비롯하여, 유경화씨, 선명희씨, 정도영씨, 최현비씨, 김금옥씨, 이필남씨, 유기성씨, 또 도예가
양승호씨와 입양청년인 김가미씨, 사진작가 김점순씨, 피아니스트 오정숙씨 등이 있다.
우리나라는 40여년전에 스위스와 외교관계를 시작했었고 1962년 12월에 최초로 국교가 수립
되고 그 이듬해 3월에 초대 이한빈 대사와 함께 스위스의 수도 베른주재 상주공관이 설치된
이래로 현재 제15대 문동석 대사에 이르고 있다.
쮜리히, 베른, 바젤, 샹갈렌, 그리고 레만지역의 제네바에는 각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2세를 위한 한글학교가 운용되고 있다. 18년 전통의 한글학교 역사를 가지고 있는 쮜리히
한글학교는 모국어 언어문화교육기관으로 작년에 쮜리히주 문교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은
외국인 학교로 70명의 학생이 있으며 지역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오늘날 스위스 5개 지역한인회와 한인연합회는 각종 행사시 주베른 스위스대사관(문동석 대
사)과 협력하는 등 다른 때와 달리 아주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38년 역사를 가
진 스위스한인연합회는 스위스 주류 사회 참여에 필요한 제반 활동을 통하여 스위스 전 지
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회원들간의 상호친목과 협력관계를 도모하고 있다. ♣
1차 교정 및 줄임 22매
버려진 한인 혼혈아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버려진 혼혈아들을 건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게 하자!


파라과이에서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한인 혼혈2세들을 위한 "캠프 파라과이(CAMP PARAGUAY)"가 힘차게 발돋움했다.
지난주간 예비모임을 가졌던 한국인 2세 혼혈아들을 돕기 위한 특수사역이 23일(토) 오후3시 CAMP PARAGUAY 사무실이 위치하고 있는 감리교 선교병원 2층 선교관에서 그 첫 테이프를 끊었다.
이 행사에는 16명의 한국인 혼혈2세들과 재파라과이교육원장, 한국학교 교장, 교육문화재단 이사장, 한인선교사 등 50여명의 한인교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혼혈2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캠프 파라과이는 설립자인 뉴욕 감리교회 이강 목사의 지원 아래 파라과이에서 원주민 선교를 하고 있는 김돈수 선교사가 단체의 대표로 사역을 맡게 되었으며, 감리교회 최도진 장로와 조하나 양이 함께 이 일을 감당하게 됐다.
대표를 밭은 김돈수 선교사는 캠프코리아 설립취지 및 목적에 대하여 "버려진 우리 한국인 혼혈아를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섬겨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게 하여 현지사회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훌륭한 한국인으로 진출하도록 보살피는 역할을 하는데 있고 궁극적으로는 파라과이의 젊은 세대들을 양육시켜서 차세대 지도자로 준비시키기 위해 이 단체를 설립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앞으로 캠프 파라과이는 혼혈2세들에게 신앙교육, 컴퓨터교육, 언어교육(영어,한글), 성교육, 정체성을 위한 인성교육, 직업교육을 통하여 현지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고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캠프 파라과이 선교회에서는 매월 정기간행물을 발간하고 정기적으로 사무실에서 모임을 가지며 정기건강검진을 실시하고 특수학교를 만들어 교육을 확대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 파라과이 고용철 통신원 -



부라질 경찰에 자전거 지원(찾지 못했음)



동서 문명의 접점인 터키,
과거 화려했던 콘스탄티노플의 후신인 이스탄불을 비롯해서, 카파도키아, 에페스,
안탈리야 등... 수많은 역사유물과 자연유적들로 인해 세계적인 관광지로 손꼽히는 터키의 관광산업의 전망을 살펴본다.

터키의 외환수입은 크게 세가지(수출,관광및 해외근로자송금)로 대별 되는데,
그중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이 관광산업의 육성이라 할수 있다.

2003년 한해동안 1천만명 이상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85억불의 관광수입을 예상하고 있으며, 향후 5년동안 계속적인 투자와 홍보를 통해 년간 2천만명의 관광객 유치를 통해 185억불의 관광수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 년도별 관광객 유치및 관광수입 목표

  2004년  15.0백만명   118억불
  2005년  16.6백만명   135억불
  2006년  16.9백만명   154억불
  2007년  18.2백만명   169억불
  2008년  19.5백만명   185억불
  2009년  20.9백만명   203억불
  2010년  22.4백만명   221억불

이와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 관광홍보물을 신규로 제작하였고, 금년에 유럽에서 열린 관광박람회에서 터키홍보 CD가 홍보물분야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디즈니랜드와 합작으로 터키 디즈니랜드를 개장 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는데, 아직 어느 위치에 설치 할 것인지 확실한 결정이 되지 않았지만, 이스탄불, 보드룸(에게해), 안탈리야(지중해) 등지에서 유치 경쟁이 치열한 것 같다.
위치적으로 보면 이스탄불이 가장 좋긴한데... 그 넓은 땅을 확보하는 비용이 만만할 것 같지가 않아서 걱정인 모양이며, 현재 가장 유력한 곳은 역시 지중해의 휴양도시인 안탈리야 인 것 같다.


스위스 은행인 UBS의 "세계의 도시 물가"조사 발표(찾지 못했음)




[러시아어 구사능력에 따라 자신의 사업도 비례한다]
최근 모스크바 비즈니스맨들의 러시아어(노어)을 습득하려는 열기가 뜨겁기만 하다.모스크바 상인연합회 소속 최우영(이사.동시물산)씨는 러시아 현지에서 실무분야인 시장속에서 겪어야하는 언어의 벽 때문에 굵직한 바이어와 깊은 대화를 못해 손실을 볼때가 많다고 말했다.

최이사는 수년전 부터 러시아어 강좌를 계획하게 됐다며 특히 러시아에서는 노어구사 능력에 따라 자신들의 사업에 많은 영향을 봐 왔다며 이에 지난 8월부터 약15명정도로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확대시킬 전망이라고 밝혔다. 본 강좌는 비영리목적으로 개설,운영 실시되고 있으며 장소는 원광 한국학교측에서 교실을 무료 사용토록 배려했다고 전했다.

아울러 노어를 배우려는 교민층이 다양하다.남여노소는 물론 연령과 각분야에 제한없이 누구나 참여 할수 있는 여건이 조성 되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며 특히 이들은 시간 관계상 러시아학교나 학원에서 전문적으로 노어를 습득하지 못한 성인들이기 때문에 생활용어에서 기초문법.회화에까지 학습방향을 설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나이가 지긋한 어느 학생은 한달정도 배우고 있지만 너무 재미있고 동심으로 돌아간 느낌이라며 꾸준한 인내와 끈기로 배운다면 최소한 지하철의 입간판및 안내판은 술술 읽을 것이라고 밝혔고,또다른 남학생은 쉬는시간에 흡연을 해도 돼냐며 학생으로서의 신분을 감추지 못했다.

따라서 본 강사는 베테랑급 한국인으로 초빙되어 기초적 문법을 강의 지도하면서 노어를 배우려는 나이든 학생들이지만 학습받는 열의가 진지하다고 평했다. 본 강사(여.교민)는 노문학전공자이자 박사과정에 있으며, 강좌시간은 매주2회(수.금)18:00~20;00 이다.(교재비는 자부담)

러시아 교민들의 노어구사 능력은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러시아에서는 필수적이다.러시아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생활하던 노어의 기초를 꼭 알아두어야 할 문형과 핵심문법,전문분야의 회화를 습득하여 적어도 상호 대인관계에 있어 언어가 소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신성준기자(iskrashin@hanmail.net)



한복(韓服)
재외동포문학상 수필가작

dongpo




민영일/미국

얼마 전 잠시 귀국하게 되었을 때, 미국에 있는 친지 여인으로부터 한 가지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전화로 한국에다 한복 한 벌을 맞추어 놓았는데 미국 올 때 좀 찾아다 달라는 것이었다.
한국에 가서, 급한 일부터 보고 나서, 예의 그 한복집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하필 내가 미국으로 돌아오는 날인 15일이라야 다 된다고 했다. 이거 야단 났구나 싶어, 통사정 하다시피 간청을 해 보았다.
"출발하는 날 여기저기 급한 인사도 해야 하고, 준비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어느 결에 그 곳에 다녀와서 짐은 언제 싸고……. 공항에도 좀 미리 나가야지요. 14일 밤에라도 좀 찾을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선생님 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거쳐야 할 불가피한 공정이 있어서요. 오후 6시 반 비행기면 아침 일찍 찾아 가시면 되겠네요."
"아니, 조금만 서두르시면, 하루쯤, 아니 한 10시간쯤 앞당길 수 있잖아요?"
"허, 허, 그렇게 해 드릴 수 있다면 서로 좋겠지만, 저의 집에서는……."
"알았습니다."
울화통이 치밀어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 버렸다. 나의 과격한 행동에 대해 금방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급한 사람에게는 좀 앞당겨서 해 줄 수도 있는 일이지, 원……. 흥! 공정이라고? 무슨 공산품(工産品)을 만드나? 얼마나 유명한 집인지 몰라도 이렇게도 고자세일 수 있는가? 더군다나 미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입을 옷이라면 찾지 말아 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남의 부탁을 외면할 수도 없고…….
볼멘 얼굴을 하고서, 15일 아침 일찍 한복집을 찾아 나섰다. 오래 전에는 일본식 적산 가옥들이 즐비하던 X동 뒷골목, 여기저기 그 옛날의 저택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어느 새 크고 작은 빌딩들이 꽉 들어찬 가운데 딱 한집, 전형적인 서울식 ㅁ 자 형 한옥이 있었다. 대문 위에는 쪽빛 테두리를 한 흰색 바탕의 나무 간판에 역시 쪽빛으로 'XX 한복집'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런데 순 한글로 된 이 간판의 필체가 결코 범상치 않아 보였다. '누군가 글 솜씨 하나는 뛰어나구만…….'
열려 있는 대문을 들어서자, 아담한 정원 풍경에 나도 모르는 사이 매혹되고 말았다. 정면 안채 오른쪽 빈 공간으로 뒷뜰이 보였는데, 언뜻 대나무 숲을 이루고 있는 듯했다. 마당 한가운데는 작지만 오밀조밀한 연못이 있고, 연못 중앙엔 손바닥 만한 동산이 있는데 그 곳에는 오래 된 매화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그리고 사방 뜰 계단에는 온통 각종 난 화분들로 가득했다. 사군자(四君子)! 지금이 가을이라면 국화도 있겠지! 누군지 모르지만 인품이 꽤 고매한가 보군!
난 향기에 취해 한참을 서 있었는데도, 넓은 대청마루에 가득한 일손들이 어느 누구 한 사람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대청 계단을 올라서며, 헛기침을 몇 번 하자, 그제서야 젊은 아낙이,
"옷 맞추시려고요?"
하고 묻는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 그렇게 물어 본 모양이다.
"아니요, 저, 미국서 XX씨 부탁으로 옷 찾으러 왔습니다."
"아, 네, 어서 올라오시죠."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으니, 그녀는 이내 끓는 주전자를 들고 와서 차를 따른다. 그윽한 녹차 향기!
"몹시 언짢았던가 보죠?"
마주 앉은 그녀는 도시 내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데, 딴에는 차근차근 말을 이어 갔다.
"미국 XX씨가 주문한 옷감은……라고 하는 모시……. 쪽물 들이기를 최소한 3번……, 풀 먹이고, 재우고, 다듬질하고, 마르고, 다시 빨고……, 이렇게 3번을 반복해야 제대로 품이 나오지요. 또…… 중요한 부분은 일일이 손으로 박음질……. 수놓는 것도…… 손으로……. 금박 입히는 것도…… 금박 종이를…… 인두로……. 이 모든 과정을 다 설명드릴 순 없지만, 아무튼 우리로서는 최대한 빨리 해 드리는 겁니다."
무슨 변명을 하려니 하고, 지레 짐작을 하고서 애써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모시 종류인지, 모시처럼 이었는지, 또는 모시와 달리였는지 분명치 않았다. 또한 무엇인가 3번 한다고 했는데,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도 알 길 없다. 다만, 우리 조상들이 개발, 발전시켜 온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때였다. 안방 쪽에서, 보자기에 단정히 싼 넓적한 상자를 고이 받혀 들고, 나이 지긋한 여인이 나왔다. 훤한 이마에 오똑한 콧날, 촉촉이 젖은 듯한 빛나는 눈망울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기품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무엇인가에 취한 듯, 그녀를 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위로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오래 전에 타계하신 어머님을 뵙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다소곳이 목례를 하고선, 나의 맞은편 자리에 조용히 앉으면서, 아마도 주문한 한복이 들어 있는 듯한 그 상자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수인사가 끝나고, 통상적인 간단한 대화 끝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
"한국 사람은 한복을 입어야 제격이지요. 우리 조상들께서 오랜 기간, 우리 몸에 그리고 우리 풍토와 문화에 맞게 개발하고 다듬어 온 옷이니까요."
이렇듯 그녀의 한복 예찬론 시동이 걸리려는 듯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비행기 시간에 쫓기고 있음을 상기하고,
"이 다음에 제가 한복을 맞추고자 할 때는 꼭 이리로 오고 싶습니다. 시간이 없어 이만 실례해야겠습니다. 시간 맞춰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서둘러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문을 나서면서 언뜻 뒤돌아보니 그녀는 마루 끝에 조용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자식을 배웅하며 아쉬워하듯이…….
시간 맞춰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그 집을 찾아갈 때는 한바탕 퍼부어 주고라도 싶었던 내 마음이, 그 집을 나설 때는 180도로 바뀌어 있었다. 더욱이, 그녀는 늦어서 미안하다든가 이런저런 이유로 불가피했다든가 한 마디 변명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틈에, 왜, 나의 불평불만이 봄눈 녹듯 사라진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어머님으로부터 느꼈던 기품을 그녀로부터 다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 기품이란 것이, 내 핏속에 흐르고 있는,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운 인품, 그 인품을 받쳐 주는 우아한 한복의 멋스러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그렇다! 내가 보았던 어머님의 상은, 결코 나 개인의 어머니가 아니라, 이 땅의 선비들을 길러 주던, 우리 모두의 어머니였던 것이며. 한복에 깃들어 있는 기품, 그것은 이제는 거의 사라지려고 하는, 우리의 자랑스런 선비정신,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입고 다니는 두루마기는 일종의 간편복이요, 원래, 우리 선비의 정장은 도포 차림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누군가가 전통적 도포 차림을 하고 거리에 나선다든가, 대학 강단에 선다면, 사람들은 포복 절도할지 모른다. 왜 그럴까? 한국인이 서양 복장, 즉 양복을 입은 모습은 자연스러워 보이고, 한국인이 한국 복장 즉 한복, 특히 선비의 정장인 도포를 입고 있는 모습이 왜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일제 침략으로 단절된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백여 년 전으로 무리하게 연결시키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정신적·물질적 면에서, 우리의 끊어진 맥을 다시 잇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단절된 맥을 이어 가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의 한복에 깃들어 있는, 선비정신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선비 사(士) 자 들어간 직업을 가진 자는 모두가 도둑이다.'라는 말이 없어져야 할 것이며, 감옥에서 바지 저고리를 입는 한복 모독 행위도 근절되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대학 졸업식에서 학사, 석사, 박사에게, 우리 전통의 도포 차림을 하게 함으로써, 선비정신을 각성시켜 주는 것이 어떨까? 또한 국내 뿐만 아니라, 국제 무대에서도, 한복을 입은, 당당하고 진정한 선비들의 모습이 뼈저리게 보고 싶어진다.

미국에 돌아와서 부탁 받았던 여인에게 한복을 전해 준 지 얼마인가 지나서였다. 그녀로부터 어떤 모임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바쁜 일정 중에 틈을 내어 참석하게 되었다. 그 때, 그녀가 예의 그 한복을 입고 나온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한 마디로 품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물론, 근본적으로 인품이 중요한 것이지만, 그 인품을 받쳐 주는 것이 몸에 지닌 부착물, 즉 옷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수인사가 끝나고 그녀가 입은 한복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전문 지식이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모시 종류가 아닌가 싶었다. 모시라면 나 자신도 흰 바지적삼을 입은 적이 있는데, 내가 입던 모시옷은 뻣뻣해서, 여기저기 볼품 없이 불룩불룩 튀어 나오고 구겨지는 것이 예사였는데, 이 여인의 옷은 결코 그렇지 않고, 가지런한 것이 한껏 더 품위가 있어 보였다. 옷감 종류가 달라서였을까? 아니면 3번 했다던 그 과정 때문이었을까? 쪽빛 겉감에 흰색 안감을 받쳐 은은히 풍겨 나오는, 멋드러진 치마 색감, 연한 쪽빛을 띨 듯 말 듯한 고상한 흰 저고리, 치마 색상과 어울린 끝동과 섶, 거기에 수놓은, 결코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워 보이는 자수……,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이 없다. 이에 비하여, 다른 여자 분들의 옷을 보면, 저고리 뒷끝이 너무 처져 있거나 불룩 튀어 나오기도 하고, 간혹 너무 짧아서 동여맨 흰색 끈이 보이기도 한다. 갑사 저고리에 미싱 자수를 마구 수놓은 것도 있고, 치마에도 어울리지 않게 너무 많은 수를 놓은 것도 있다. 그러나 이 여인의 옷은 군계일학처럼 단연 돋보였다.
나는 이 여인의 한복 입은 단아하고 고상한 모습을 보고서, 이 다음 우리 큰아이 혼사 때는, 기필코 그 집에서 한복을 맞추리라고 마음먹게 되었다.
수년 후, 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나는 부득불 우겨서 그 한복 집을 찾아 나섰다. 고결한 선비님들을 길러 내던, 우리 모두의 어머님 상을 보고자 마음 설레이면서.
그러나 오! 하느님 !
한복집이 있던 그 자리엔 높다란 낯선 빌딩이 들어서 있고 한복집은 온데 간데 없었다. 누구에게 물어 보아도 아는 이가 없다. 가까운 세탁소에 가서 수소문해 보았다
"물루지유, 어디로 갔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근데 그래가지고 장사가 돼요? 시대에 맞게, 손님들 비위를 적당히 맞춰 가며, 돈벌이에 치중해야지! 그놈의 전통인가 뭔가가 밥 먹여 주나, 원!"
(끝)


시론 재외동포연대 창립 연기된 사연

2003년 재외동포연대 추진위가 내세운 상징적인 모토는 무엇이었을까? 재외동포연대 추진위는 지난 2월 26일 서울프레스센터에서 국내외 인사 60인이 모인 가운데 발족식을 가졌다. 발족식에서는 ▷ 2003년 재외동포법의 평등한 개정 ▷ 재외국민참정권 실현 ▷ 재외동포정책의 근본적인 대안 제시를 3대 목표로, 각국 재외동포의 요구를 담은 핵심내용을 10대 실천과제로 설정, 노무현 새정부에도 재외동포정책 관련 10대 정책 건의문을 공식 전달한 바 있다. 기나긴 여정의 첫 발은 디딘 셈이다.

‘역사와 인권의 관점에서 일관되고 평등하게’. ‘재외동포연대’라는 구상 자체는 어느 정책 전문가의 말처럼, ‘국가 하나를 새로이 만드는 것보다 더 험란하고 힘든 일’로 취급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연대 창립 구상은 단지 재외동포 관련 단체간의 소위 ‘세속적인’ 필요성에서 비롯되지는 않았다. 전세계 약 160여 나라에 거주하는 700만 재외동포는 과거 일제 식민지시대, 남북분단과 극심한 체제경쟁이라는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고, 특히 중국, CIS 지역에 거주하는 재외동포가 우리 사회의 관심권에 들어온 것도 불과 10여년 전이다. 이런 시각에서, 그동안 ‘기민․감시․안보’라는 국가정책의 최대 희생양이던 재외동포들과 함께, ‘역사와 인권의 관점에서’ 재외동포정책․제도적 과제를 새롭게 도출해내고자 함이며, 이를 실천전략으로 펼쳐나가고자 하는 일종의 대안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각 국 재외동포의 시각으로’. 그 간의 재외동포법개정운동, 재외국민참정권회복운동 등에서, 정부와 시민사회의 무관심과 무대책을 극명하게 보여주었고, 재외동포 관련 시민단체 또는 지식인 역시 지엽적인 접근, 혹은 동일한 집단 대상의 이기주의적인 행태를 보였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관련 단체․지식인 네트워크를 수평적으로 연결, 국내외 재외동포관련 단체 및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본국 중심의 운동을 지양하고 ‘각국 재외동포의 구체적인 삶과 현실’에서 출발하는 연대운동을 구상한 것 자체가 국내외 주목을 끈 것이고, ‘시대적인 요청’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뜻은 좋으나 이를 현실로 푸는 구체적인 실천이 없는 한, ‘빛깔좋은 개살구’라는 비웃음만 살 가능성이 크다. ‘역사와 인권’이라는 큰 화두로 재외동포사회와 재외동포정책을 바라보고자 하는 재외동포연대 추진위가 현재의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우선 최소한의 실무단위를 구성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국내단체의 실무자가 파견된 형태나 혹은 재외동포연대 추진위원간의 명확한 합의를 통해 공동사무국 실무역량을 확충하지 못한 점은 뼈아픈 오류로 지적될 수 있다. 최소한의 실무단위가 마련되지 못한 결과는, 사실상 추진위에 참여한 각 단체의 일정에 따라 추진위 활동이 운영되는 비주체적 상황을 야기시켰으며, 결국 개별 단체의 필요에 따라 추진위 정기회의가 개최되는 등 애초 재외동포연대 추진위 창립의 초발심을 무색케할 정도다. 사실 아래의 평가는 이 같은 연유에서 대부분 비롯된다.
둘째, 최소한의 2-3명의 핵심 실무자 활동가들을 위한 재정 마련에, 결과적으로 추진위 상층단위에서조차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비단 추진위 상층부만의 문제가 아니며, 결과적으로 명확한 비젼이 서로 공유되지 않은 까닦으로 이해된다. 또한 최소한이 실무역량조차도 각 개별 단체 사정으로 긴밀히 결합하기 어려워, 정기회의의 성격이 점차 모호해졌으며, 최소한의 정기회의 참여구조도 정착시켜내지 못했다.
셋째, 연대 추진위원들간에 창립식 이후의 활동상에 대한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창립 이후의 운영 및 활동구조가 전혀 마련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넷째, 각 국 추진위원의 참여도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는 점이다. 물론 현재 국내를 제외한 각국에서 약 100여명의 뜻있는 인사들이 연대 추진위 활동을 꾸준히 지켜보고 참여할 방안들을 모색하고는 있지만, 구체적인 참여와 실천활동을 전개하기에는 참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추진위 발족식 이후 6개월 동안, 재외동포연대 창립 연기 사연을 소상히 밝힌 것은 애초의 초발심을 잊지 말자는 다짐이다. 아울러, 특정 사안 및 개별단체 영역에 매몰되지 않고, 소위 ‘700만 재외동포 당파성’으로 연대의 3대 목표 및 10대 실천과제들을 모두 담는 큰 구상과 함께, 구체적 실천을 하나하나 펼쳐내고 싶은 소망 때문이리라. 배덕호[KIN(지구촌동포청년연대 대표집행위원)]




중국교포 귀화신청 관련소송을 제기하며  

dongpo




필자는 얼마전 한 50대 여인의 방문을 받았다. 그녀는 중국 요녕성에서 태어난 중국교포출신으로 중국에서 살기가 너무 힘들어 1993년경 역시 중국교포인 남편과 함께 한국에 들어와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싸구려 여관방에서 숙식하던 그들은 연탄가스에 중독되었고, 여인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나 남편은 끝내 숨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들 부부는 슬하에 아들이 하나 있었다. 한국에 입국허가를 받을 수 없어 중국에 그냥 머물고 있던 당시 만 18세의 아들은 1994년 3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한 용도의 유효기간 30일짜리 단기비자를 받아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장례를 치른 후 남편을 잃은 여인은 아들과 함께 한국에서 일하며 지내고 싶었으나 당국은 체류기간 연장을 해주지 않았고 결국 아들은 불법체류상태로 한국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은 이후 1995년 5월에 아이가 둘 딸린 한국 남성과 만나 재혼하였는데, 여인의 새남편은 여인의 아들을 불쌍히 여기고 또 품행이 바른 점을 높이 사 1997년 12월에 양자로 입양하여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여인의 아들이 한국남성에 의해 입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체류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여인과 새남편은 아들에게 한국국적을 취득시켜주고자 귀화신청을 하길 원했으나 서울출입국관리소의 담당창구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귀화신청서를 제출조차 할 수 없었다. 서울출입국관리소는 "중국교포 국적취득신청"이라는 별도의 양식으로 중국교포의 경우 별도 처리를 하고 있었는데, 여인의 아들은 성년이 된 후 한국남성에게 입양된 것이므로 국적법 제6조 제1항에 의한 귀화신청이 가능할 것이나, 위 국적법 제6조 제1항은 "외국인으로서 대한민국에 3년이상 계속하여 주소"가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바, 서울출입국관리소는 위 "주소"를 "외국인등록"이 3년 이상 되있을 것으로 해석하여 이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즉, 여인의 아들과 같은 중국교포의 경우 한국에 합법적으로 체류하며 외국인등록을 할 수 있는 길을 사실상 봉쇄하고 있으면서도, 입양이 되어 귀화신청을 하려는 경우 3년이상의 외국인등록을 요구함으로써 사실상 귀화신청의 길조차 막고 있는 것이다.

결국 "눈가리고 아웅"이라고나 할까? 중국교포가 한국국적을 취득 내지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당국은 사실상 봉쇄하고 있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2001. 11. 29. 결정 99헌마494 "재외동포의출입국과법적지위에관한법률제2조제2호위헌확인사건"에서 재외동포법의 적용대상에 정부수립이전이주동포, 즉 대부분의 중국동포와 구 소련동포 등을 제외한 것이 평등원칙에 위반되어 위헌이라고 결정하면서 "...정부수립이후이주동포(주로 재미동포, 그 중에서도 시민권을 취득한 재미동포 1세)의 요망사항은 재외동포법에 의하여 거의 완전히 해결된 반면, 정부수립이전이주동포(주로 중국동포 및 구 소련동포)는 재외동포법의 적용대상에서 제외됨으로써 그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출입국기회와 대한민국 내에서의 취업기회를 차단당하였고,...일제시대 독립운동을 위하여 또는 일제의 강제징용이나 수탈을 피하기 위해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중국동포나 구 소련동포가 대부분인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이주한 자들에게 외국국적 취득 이전에 대한민국의 국적을 명시적으로 확인받은 사실을 입증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이들을 재외동포법의 수혜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고 판시한 바 있다.

헌법재판소가 적절히 판시한 바와 같이 중국교포들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위하여 또는 일제의 강제징용이나 수탈을 피하기 위해 조국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을 위해 혹은 빼앗긴 조국에서 살 수 없어 떠났던 중국교포들이 조국으로 돌아올 수 없도록 하는 당국의 정책은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위헌적 정책이라 할 것이다. 당국은 중국교포들이 밀려들어오면 감당하기 힘들다는 사회경제적 이유와 중국교포들이 공산권 출신들이라는 안보적 이유를 들고 있다. 그러나, 중국교포들의 입국이 한국에 어떤 사회적, 경제적 부담을 미칠지 검증된 바도 없고 설사 단기적으로 어느 정도 영향이 있다 하더라도 긴 안목의 역사적 차원에서 볼 때 중국교포들의 입국을 보장하는 것이 국민들의 민족관과 역사의식을 고양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지 결코 한국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중국교포들에게 역사적 빚을 지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을 외면하는 것은 역사적 파렴치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공산권 출신 운운하는 핑계에는 사실 대꾸조차 하고 싶지가 않다. 지금이 도대체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냉전시대라도 된단 말인가?

필자는 결국 여인의 가족과 상의 끝에 법무부장관을 상대로 "귀화신청반려처분 취소청구의 소"를 서울행정법원에 제기하였다. 입법자나 행정당국이 올바른 길을 가지 못한다면 법원이 그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헌법정신과 역사의식에 입각한 법원의 전향적 판결을 기대한다. 13.6매 임상철 변호사/본지 객원논설위원


사설 (찾지 못했음)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