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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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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면>
주불대사관에서 생활법률 책자를 펴낸 이유는?  
dongpo
프랑스에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 발행된 해는 1748년, 나폴레옹 법전이 간행된 해는 1804년이다. 그래서 법이 가장 발달한 나라 프랑스를 중국인들은 ‘법국(法國)’이라고 부른다.

그런데도 프랑스의 대학이나 관공서에서 법대로 규정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때문에 프랑스에 사는 한국 유학생이나 동포들은 큰 혼란에 빠지곤 한다. 이미 2백50여년전에 법의 정신이라는 불후의 저서를 민족 자산으로 가지고 있고 법에 대한 경험이 축적돼 있는 이 나라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들은 인간이 만든 법과 규정이 다시 인간을 구속할 수 있다는 데에 주목한다. 그리고 법을 최일선에서 운용 집행하는 관공서의 창구에서 일하는 직원의 ‘인간적인’ 판단이 개입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프랑스 법 운용의 특징으로 법규정의 안팍으로 각각 10%씩의 오차를 인정하는 관행이 생겨난 것이다. 이같은 관행을 이해하지 못해 처음 빠리에 온 유학생들은 종종 “싸데빵”이라는 말을 한다. 모든 것이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뜻의 이말에는 같은 서류도 직원에 따라서 통과되기도 하고 불허되기도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담겨있다. 이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살면서 법을 제대로 지키는 것은 다른 나라보다 더 어려울 것은 자명하다.

최근 주프랑스대사관에서 ‘프랑스생활법률안내’를 펴냈다. 신국판 480쪽으로 주택 임차 계약, 체류증 취득, 교통사고시 대처등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대부분 망라했다. 법을 잘 지키며 사는 일이 쉽지 않은 프랑스이기에 이 책의 발간은 더욱 뜻이 깊다. 이 책을 펴내기 위해서 주불대사관은 2001년초부터 2년여에 걸친 작업을 거쳤다. 대사관내에 공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담당영사가 주무로서 심혈을 기울였다. 번역은 법률 전공 유학생 3명이 참여했으며 편집 전문가도 힘을 모았다. 모든 법을 다 번역할 수는 없으므로 기본 법전 참고 서적을 중심으로 동포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분야를 번역, 요약하고 이를 책자로 편집했다.

그동안 각공관에서 잡다한 정보를 모아 프린트해서 영사과에 비치하는 정도의 사례는 있었지만 이같이 책자의 형식을 갖춰서 공식적으로 발행한 것은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대사관이라는 국가기관에서 이같은 다른 나라의 법률정보를 담은 책을 펴내는 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예상된다. 만일 이 책에 쓰여진대로 했는데 실정은 이와 달라서 일을 그르친 사람이 있다면 국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할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니 외교부 차원도 아니고 한 공관 차원에서 하는 일이라면 어느 공관이 이같은 일에 선뜻 나서려고 하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법률편찬작업의 실무책임자인 담당 영사가 얼마나 고심을 했는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주복룡영사는 이 책의 교열작업을 하다가 50세에 나타난다는 어깨 통증 ‘50견’에 걸렸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 책자에 실린 정보들을 인터넷에서 볼 수 없는 점은 아쉬운 일이다. 국내 출판사에서 발행됐지만 국내의 서점에서 구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주불대사관에 찾아오면 무료로 배포한다지만 다른 나라에서 거주하는 사람은 구입해서 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책자의 모체가 된 프랑스 법률안내서의 발행출판사와의 출판계약상의 문제로 이같은 일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보다더 적극적으로 교섭을 해서 이 책의 내용을 인터넷에서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8매  김제완

시카고 오딧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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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 수많은 불면의 밤을 사르며 쓴 이 보잘 것 없는 글은 내 인생의 또 다른 전기를 장식하는 기념비이자, 긴 인생 귀로의 몇 안 되는 표석이다. 수많은 유혹과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간 오딧세이의 영웅담에 감히 비할 수는 없지만 그저 독자 강호가 읽고 내 상념의 한 귀퉁이라도 엿보는데 도움이 되길 감히 바랄 뿐이다.” 1977년 9월 미국 시카고로 유학을 갔던 차상구. 시카고의 루즈벨트 대학교 및 대학원에서 회계학을 전공했으며  미국 공인회계사로서 10만 시카고 교민사회에 큰 기여를 했던 그가, 이제 미국에서 보낸 자신의 청장년시기의 이야기들을 이 책을 통해 진솔하게 들려주고 있다.

저자는 또한 1970년대 미국에 건너간 이민 1세대로 살면서 한국과 미국, 그리고 한국이민사회에 대해 보고 느꼈던 바를 담백하게 서술하고 있다. 최근 성공적으로 치뤄 낸 월드컵과 민주적인 대통령 선거를 통해 한국 발전의 무한한 가능성을 진단해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한국발전을 저해하는 세가지 요소로 교수집단과 언론계, 그리고 정치를 들기도 한다. 우리가 배워야 할 미국의 선진문화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세금을 낸 만큼 복지혜택을 돌려주는 정부와 그것을 믿고 세금신고에 충실한 국민, 그리고 이들 뒤에서 관리, 통솔하는 미국의 투명한 실명경제가 그것이다. 이에 더하여, 이제 이민 1세들이 사라져 가고 2,3세들 중심으로 변하고 있는 우리 이민사회의 저항할 수 없는 변화의 물결에 대해 다루면서, 그러나 그러한 변화 가운데에서도 조국인 한국의 발전을 염원하는 애틋한 그들의 짝사랑은 영원히 변할 수 없을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

이민이라는 그의 오랜 여정을 통해 얻은 것은 조국에 대한 지독한 향수와 사랑이었다. 이제 돌아가 제 2의 인생을 조국의 발전을 위해 살아보겠다는 그의 결심은 수많은 유혹과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오딧세이의 마음과 아마 비슷하리라.  민지영기자

(1차교열)
재일작가 이회성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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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를 떠나는 북한응원단원이 울고 있는 사진을 보며 “아름다워요.”라고 말하는 이회성씨에게 북한에 대한 정치적인 입장은 큰 의미가 없다. 그는 1972년 소설 ‘다듬이질하는 여자’로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다가와상을 받았다. 재일 조선인으로는 처음이었다.
그의 삶은 일본사회의 차별, 분단으로 인한 재일동포사회의 분열과 갈등의 역사 그 자체다. 고등학교때까지 일본식 이름을 사용해야했고 대학에서 비로소 '민족의 자부심'을 되찾았다. 당시 대부분의 청년들처럼 그도 조총련계 민족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조직을 떠나 작가가 되었다. 국적도 ‘조선’적에서 ‘한국’으로 바꾸었다. 그 선택이 생각을 달리하는 재일동포 지식인들과 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늘 하나다.
“우리 민족이 이루어야 할 것은 분단의 극복입니다. 5천년 역사니, 민족의 우수성이라는 말보다 타자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민족성이 필요합니다. 조총련도 민단도 잘못된 부분을 스스로 비판하고, 서로의 지혜를 배우고 살릴 수 있는 자기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
그는 재일동포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일본에 동화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걱정하고 있다.  
“요즘의 젊은 세대는 일본사람이 되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쉽게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자기 민족의 역사를 모르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거죠. 나는 작가가 문학작품을 통해 현시대가 안고 있는 위기나 과제를 알리는 종을 울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재일동포 지식인은 68세의 그를 ‘영원한 청년’이라고 불렀다. 늘 시대에 맞서려는 자세가 그를 만년청년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4.0매)이성기자

재일작가 이회성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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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온 북한의 미녀응원단은 정말 해석하기가 어렵네. 진짜 아름다움이란게 도대체 뭔지를 생각하게 하는 미인이었죠 ”

이회성씨는 이렇게 말하면서 곁에 있는 신문을 봤다. 거기에는 북한에 돌아가기 위하여 대구를 떠나려는 응원단원이 작별을 아쉬워하며 울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 표정은 참 좋아요. 자연스러우니까. 아름답네요. 김정일 장군이 비에 젖는다고 현수막을 끌어 내린 그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달라요”

그는 1972년 소설‘다듬이질하는 여자’로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다가와상을 받았다. 재일조선인으로서는 처음이었는데, 그 전까지 그는 조총련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조직을 떠난 뒤 작가가 됐다.

그는 일본지배하의 사할린에서 태어났고, 해방후에 일본에 오게 됐다. 가난한 어린 시절. 고등학교까지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여 뿌리를 감추고 살아온 그는 대학시절에야 비로소 '민족의 자부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진지했던 당시의 대부분의 청년들이 그랬듯이 그도 조총련계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

사실 소설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바로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사회의 차별, 그리고 조국 분단으로 인한 재일동포사회의 분열과 갈등 등. 지금 그는 분명히 북한과 조총련 체제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다. 국적도 무국적을 의미하는 ‘조선’적에서 한국으로 바꾸고, 한국사람으로서 활동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것이 때로는 생각을 달리 하는 다른 재일동포 지식인들과의 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도 했다. 그러나 미녀응원단의 눈물을 “아름답다”고 말했을 때, 북한을 어떻게 보느냐는 정치적인 입장은 큰 의미가 없었다.

“우리 민족이 이루어야 하는 것은 분단의 극복입니다.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시야나 지식이 지금 우리 민족에 요구되고 있죠. 그러나 5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의 우수성이라든지 하는 그런 말은 더 이상 쓰지 맙시다. 타자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민족성이야말로 지금 필요합니다. 재일동포도 마찬가지예요. 조총련도 민단도 과거의 잘못된 부분은 솔직히 스스로 비판하고, 서로의 지혜를 배우고 그것을 살릴 수 있는 자기성찰이 있어야 할 겁니다 ”

그러나 재일동포들, 특히 그중 젊은 세대들이 일본에 동화하는 경향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분단의 극복이나 민족성에 대해 말하더라도 과연 재일동포는 그런 일에 참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대답했다.

“그것은 나도 예상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의 젊은 세대는 일본사람이 되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쉽게 말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자기 만족의 역사를 모르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거죠. 나는 작가가 문학작품을 통하여 현시대가 안고 있는 위기나 과제를 알리는 종을 울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볼수록  우리의 역할이 크다고 느낍니다”

그는 올해 68살이다. 그러나 실제나이 보다 훨신 젊어 보인다. 어떤 재일동포 지식인은 그를 ‘영원한 청년’이라고 블렀다. 늘 시대와 맞서려는 자세가 그를 만년청년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성기자

러시아의 한인 작가 아나톨리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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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낳은 한국계 대문호' 아나톨리 김(1938- )의 작품은 러시아에서도 '20세기의 아방가르드(전위)'로 인정받고 있을 뿐 아니라 세계 2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의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한인 3세로, 소련 카자흐스탄에서 출생, 모스크바 미술대학, 고리키 문학대학을 거쳐 문단에 데뷔했다. 최초의 작품집 《푸른 섬》에 이어 《사할린의 사람들》,  《다람쥐》, 《아버지 숲》등을 발표, 러시아 문학계를 대표하는 작가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한국어로도 번역된 대표적 환상문학 《켄타우로스의 마을》(1993)로 모스크바 시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어 1995년에는 같은 환상문학이면서 신과 인간의 문제를 독특한 형식을 빌어 탐구한 《신의 플루트》를 발표하였다. 최근작 《요나섬》이 러시아 문학신문 차트 1위에 오르며 러시아에서의 아나톨리 김의 인기를 실감케 했는데 러시아 주류 작가들과는 다른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재외동포재단의 '한민족 문학 포럼'(9.3~9.4, 서울 아미가 호텔)에 참가한 그를 만나보았다.

이번 포럼의 주제가 <디아스포라, 정체성 그리고 문학>인데 한인 3세인 자신의 정체성은 어떻게 규정하고 계신지?
-'내가 누구냐'하는 문제는 아주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났고 한국인으로 죽을 것이다. 나는 러시아어로, 한국의 내 친척들은 한국어로 말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보다도 잘 통한다. 언어로 하는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외모나 기질이 너무 많이 닮아서 피를 나눈 끈끈한 정을 느낀다.
친척들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몇 년 전 한국에 왔을 때 성씨를 '진천 김'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 때 할아버지 뻘 되는 분이 나를 찾아오셨다. 한국에 올 때마다 새로운 일가를 만나는데 낯선 사람이라는 느낌이 없고 오히려 너무 편하고 힘이 많이 된다.
당신의 작품은 철학적 성격이 강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는데... 문학작품의 번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원문의 독특한 감성, 톤을 무시하고 사건의 추이 등 줄거리만 그대로 번역하는 작업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완성도 높은 번역이란 글자 그대로의 건조한 번역이 아니라, 번역되는 언어세계 속에서 원문의 톤과 감성을 되살리는 재창조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작품은 러시아어 화자들에게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한국어로 제대로 번역되기는 더욱 어렵지 않나 싶다. 세계 각 국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는 내 작품이 정작 한국어로 흡족한 수준으로 번역된 작품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신애기자 -2차 줄임

사라지지 않는 ‘검은 꽃’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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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한민족의 자취들이 발견될 때마다 우리들은 문득 시간의 역류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재외동포들, 그들은 과연 어떠한 경로로 그곳에 심겨졌던 것일까. ‘검은 꽃’은 바로 작가 김영하의 멕시코 이민사에 대한 궁금증과 이에 대한 집요한 노력이 빛나는 책이다. 멕시코 이민의 뿌리, 우리 이민사 한 켠에 숨겨지고 가리워진 또 하나의 이야기가 우리를 역사의 진실 앞으로 안내한다.

‘검은 꽃’은 기울어가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에 돌입한 즈음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다. 1905년 4월 영국 기선 일포드 호가 조선인 1033명을 싣고 낯선 땅 미지의 땅 멕시코를 향하여 제물포 항을 출발한다. 멕시코에 가면 좋은 일자리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승선한 조선인 승객들, 그 중에는 황족의 일가도 있고 도둑도 섞여있다. 하지만 좋은 일자리와 미래에 대한 환상이 가져다 준 것은 낯선 환경과 에네켄 농장에서의 가혹한 노동, 그리고 멕시코에 불어 닥친 혁명과 내전의 바람에 휩쓸려 벌어진 죽고 죽이는 싸움뿐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신대한’을 국호로 한 임시정부를 세우려는 노력들이 있었지만, 결국 모두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미지의 땅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꿈들을 이렇게 끝까지 허물어뜨리며 이야기를 맺으면서도 작가는 시종일관 덤덤하다. 이는 미지의 땅에 대한 순진한 환상으로 가슴 부푼 모든 이들에게 보내고자 하는 애정 어린 충고일 수도 있고, 제2의 ‘검은 꽃’ 이야기가 현재 우리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귀띔해 주려는 의도에서인지도 모른다. 기울어 가던 대한제국의 운명과 오늘의 시대상황, 그리고 각 시대상황 속에서 대처하는 국민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교집합을 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검은 꽃’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민지영 기자

‘창씨개명’된 섬

한라에서 백두까지
분노의 흰 파도로 일어서자
남극에서 북극까지
이 세상 모든 지도에
독도의 이름표를 붙여주자
우리의 땅, 독도에게
박정순<독도사랑1>-‘이름표’에서

2003년 8월 29일(금) 오후 4시 ‘남산 문학의 집 서울’에서 시집<영혼까지 독도에 산골하고> 출판기념회가 인터넷 문학신문(imoonhak.com) 주최로 열렸다. 이 시집은 캐나다에서 독도 지키기 서명운동을 전개한 박정순 시인, 시집<그리운 독도>를 펴낸 재미동포 오정방 시인, 미국 텍사스대 고대진 교수 등 재외동포시인과 국내의 ‘섬의 시인’ 이생진 시인, 본적을 독도로 옮겨놓을 만큼 독도사랑에 앞장서고 있는 편부겸 시인, 인터넷 문학신문 발행인 나호열 시인 등이 함께 펴낸 시집이다. 이날 행사는 개회사에 이어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봉창, 순국선열 및 애국문인을 위한 묵념 등 다소 딱딱하게 시작하였으나, 김명회 정치학 박사이자 한국학술연구회 원장의 ‘독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강연에 이어 시집에 참여한 시인들이 직접 나와 자작시를 낭송하는 등 문학적인 향취가 물씬 풍기는 그곳 문학의 집과도 잘 조화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동시에 나호열 시인의 시 ‘영혼까지 독도에 산골(散骨;뼈를 흩다, 뿌리다)하고’라는 제목처럼 비장함과 절연함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아이들의 한국어 공부를 위해 여름 동안 한국에 잠시 와있다는 캐나다 교포인 박정순 시인은 시종일관 행사진행을 돕느라 바쁜 모습이었는데 아들과 딸이 어머니의 시를 영어와 한국어로 낭송하는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해 시선을 끌었다. 박정순 시인은 한국학술연구원 원장 김명회 교수에게서 독도와 관련한 일본의 치밀한 외교, 독도 점유를 위한 일본의 학계와 민간 협의회 그리고 일본 정부가 획책하고 있는 활동에 대한 자료들을 접하고 나서부터 독도사랑협의회 활동을 시작했다 한다. 박 시인은 특히 세계 여러 나라의 지도에서 독도의 이름이 다케시마로,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캐나다 교포사회에 독도 지키기 서명운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국제적인 영향력을 가진 내셔널 지오그래픽사를 상대로 그들이 펴낸 지도에 일본해를 동해로 개칭할 것과 다케시마라고 표기된 섬은 한국령 독도라는 사실을 알리는 편지 보내기를 했다. 아쉽게도 박 시인의 편지내용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이다. 일본정부가, 잊을 만하면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그 발언들을 기록으로 남겨두려는 외교적 술책이라는 김명회 교수의 의견을 감안한다면, 현재 한국이 독도를 점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독도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실질적인 자료를 남겨놓아야 한다고 박 시인은 이야기한다. 더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다른 시인들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다며 수줍은 웃음을 짓는 박 시인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사가 독도사랑협의회의 편지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은 만큼 앞으로 지속적으로 독도 지키기 서명 활동과 국제 관련 기관에 편지 보내기 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라고 했다. 9월 세째주에는 캐나다 토론토 한국 총영사관 전시실에서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모아 독도사랑 시화전을 열 계획이다.
이신애

외교부가 재외동포정책에 소극적인 이유는
재외동포정책 주제 1호 박사 이형규 전북 행정부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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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정책의 주무부서인 외교부는 왜 재외동포정책에 대해서 그렇게 소극적인가. 왜 외교부는 재외동포재단의 활성화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걸까." 이런 의문은 이형규 박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이형규 박사는 재외동포정책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재외동포정책전문가이다. 그는 1999년에 "정책의제 형성과 전이에 관한 연구 -재외동포사회 활성화 지원방안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성균관대에서 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본래 직업은 학자가 아니라 행정관료이다.

그는 성균관대 통계학과 재학시절에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국무총리실로 발령을 받아 줄곧 총리실에서 잔뼈가 굵어온 전형적인 관료이다. 하지만 서글서글한 그의 얼굴에서는 행정관료의 엄숙함이나 답답한 위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현재 그는 전라북도 행정부지사이다. 얼마 전 전라북도로 발령을 받아 20년 넘게 근무하던 정든 국무총리실을 떠났던 것이다. "정부 중앙부처의 총괄조정관(1급)을 하다가 지방의 부지사로 가게 되었는데, 이게 영전인지 좌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부지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새만금, 원전수거물관리시설 등 현장의 복잡한 현안들 때문에 정신이 없지만, 그의 관심 한 켠에는 언제나 '재외동포문제'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형규 부지사는 재외동포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1호 박사이다.

사실 대한민국 가구 중 일가친척 중에 해외동포 한두 명 없는 집은 거의 없을 것이다. 통계치로 어림잡아 계산해도, 두 집 건너 한 집이 재외동포 친척을 갖고 있는 꼴이다. 그런데도 재외동포에 대한 정책적인 관심은 여전히 미미하고 주무부서인 외교부는 전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도대체 왜 그럴까. 이형규 부지사가 총리실 외교안보심의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재외동포문제에 천착하면서 가졌던 문제의식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부지사가 본격적으로 재외동포문제와 씨름하기 시작한 것은 94년부터였다. 당시 해외순방을 다녀온 김영삼 대통령은 본격적인 세계화를 선언했고, 세계화정책에 맞는 총리로 이홍구 총리를 임명한다. 이총리는 총리실에 '세계화추진위원회'를 두었는데, 외교안보심의관이었던 이부지사는 실무작업을 담당하던 세계화추진기획단에 참가하게 된다. 세계화추진기획단은 세계화추진을 위한 18대국정과제 중에 '해외동포사회활성화지원'을 포함시켰는데, 국정과제의 하나로 재외동포정책이 들어간 것은 처음있는 일이라 굉장히 파격적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후 재외동포정책위원회가 신설되고 재외동포재단이 설립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런 실무작업에 참여하면서 그는 어느새 재외동포정책전문가가 되어갔다. 결국 그는 몇 년 동안의 조사연구와 모아놓은 자료가 아까와서 박사논문까지 쓰게 되었다고 한다. 1971년 대선 당시 야당의 김대중후보가  처음으로 '재외동포를 위한 교민청 설치'를 선거공약으로 내걸었고 그후 직선제 대통령선거때마다 주요정당의 선거공약으로 제시되는 등 사회적, 정치적으로 쟁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외동포문제가 장기적 정책의제로 채택되지 못한 이유를 그는 박사논문에서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문제는 외교부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외교부는 재외동포정책의 주무부서인데도 불구하고 재외동포문제가 쟁점화되는 것을 싫어했고. 오히려 재외동포정책에 대해 사사건건 반대를 해왔다는 것이다. 외교부 엘리트들은 재외동포정책의 대상이 국적상으로는 외국인들이고, 또한 재외동포문제가 중국, 미국, 일본 등 주변국들과 외교적 마찰의 소지가 있는 민감한 부분이어서 이 문제가 부각되는 것을 의식적으로 회피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행정부처의 경우, 부처산하기관을 신설하는 것을 적극 환영하고 산하기관을 지원하는 것이 보통의 관례이다. 하지만, 외교부는 산하에 재외동포재단을 신설하는 것도 꺼려왔고, 재외동포재단의 역할이 강화되는 것도 계속 반대해 왔다고 한다. 참으로 예외적인 경우이다.

"우리나라의 재외동포들은 외국의 경우와는 달리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주한 경우가 많고, 외국 국적도 원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특수성을 이해해야 한다"며 재외동포의 역사성을 강조한 그는 재외동포문제를 국적문제나 외교적인 사안만으로 환원하려는 외교부 관리들의 안이한 문제의식에 질타를 가했다. 제3대 재외동포재단이사장 선임문제에 대해 묻자, 그는 서슴없이 뼈있는 충고를 던졌다.

"전문외교관출신이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을 맡는 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외교부 자체가 재외동포정책에 대해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재외동포재단의 예산도 외교부 밥그릇 갈라먹기로 인식해서는 곤란하다. 외교부 눈치를 안보고 총리실 차원에서 아니면 정부 차원에서 크게 볼 수 있고 재외동포문제를 통일이나 민족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인식할수 있는 그런 정치력있는 사람이 이사장으로 바람직하다."  
12매 최연구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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