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우리는 유령처럼 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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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리는 유령처럼 살고있다'
  • 정영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승인 2007.08.3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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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유령처럼 살고있다'. 지난 광복절날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방랑하는 무국적 고려인의 참상을 보도한 한 TV 프로는 제목을 그렇게 뽑았다. 1991년 구소련이 붕괴되고 여러개의 민족국가로 분할되면서 생겨난 민족주의의 희생양이 되어 고려인들의 삶이 불안해졌다는 얘기는 자주 들어왔지만 최근 소개되는 무국적 고려인의 사례는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구 소련 시기에는 나름대로 고학력에 전문직을 갖고 그런대로 안정적 생활을 유지하고 있던 이들이 벌판의 움막에서 값싼 임금을 받으면서 몇 년씩 고생하고 있는 장면들을 방송에서 접한 이들은 어떻게 그런 일들이 생길 수 있는지 의아해하기도 하였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역사는 70년 전인 19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스탈린의 소련정부는 연해주의 한인들이 일본과 연결되어 소련에 대항할 것을 우려하였고, 그리하여 그곳에 살고있는 한인 모두를 미개척지인 중앙아시아지역으로 이주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한인들은 3일 안으로 떠날 준비를 하도록 명령받았고, 그같은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한인사회 지도자들은 국가에 대한 반역죄 명목으로 처형되었다. 그때 처형된 이들이 2천500여명. 나머지 한인들은 옷가지와 약간의 식량만을 챙겨서 쫒기듯 화물열차를 타야했다.

40여일의 열차여행 끝에 그들이 끌려온 곳이 바로 연해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가 떨어진 중앙아시아 카자크스탄과 우즈벡스탄지역이었다. 이렇게 이주해온 한인의 수가 17만 5천명이며, 중앙아시아 고려인, 까레이스키의 역사는 이로부터 시작된다.

열차 이주과정의 고통과 이주초기의 힘든 사정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글들을 통하여 소개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과 풍토병에 시달리면서 수만명의 사람들이 더 죽어가야 했고, 이후에도 오랫동안 적성(敵性)민족으로 간주되어 감시와 여행제한 및 취업과 진학상의 불이익을 받았다는 점만을 적어두기로 하자.

그러나 중앙아시아에 내던져진 고려인들은 갖가지의 핍박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특유의 근면성과 우수한 자질들로 인하여 여러 방면에서 성공적으로 진출하였고 중앙아시아의 모범민족으로 자리 잡았다. 그간 숫자도 50만명 가까이로 늘어났다. 그러나 구소련이 붕괴되면서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중앙아시아지역에는 소수민족별로 15개의 독립국가가 세워졌고, 각 국가는 민족중심적 정책을 취하며 다른 민족을 배척하였다. 잦은 내란에 치안도 불안해졌으며, 경제난도 심화되었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살길을 찾아 다시 이곳저곳으로 떠돌아야 했다. 원거주지인 연해주로 재이주하려는 움직임도 생겼고,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지역으로의 농업이민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나 어느 것도 안정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였고, 더군다나 그 혼란의 와중에 생겨난 많은 무국적자들의 처지는 참으로 기구하기까지 하다.

이들 무국자들은 떠도는 와중에서 여권과 신분증명서를 분실하였거나 불법체류 상태인 사람들로, 거주국의 시민도 아니고 원거주국의 시민도 아닌, 원거주국도 현거주국도 러시아정부도 책임지지 않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학교도 다닐 수 없고, 의료와 연금 같은 복지 혜택도 못받으며,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도 자유롭게 여행할 수도 없는 딱한 처지에 고통받고 있다.

보도에 의하면, 이들 고려인 무국적자가 우크라이나 지역에만 2만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결론은 한국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이나 이스라엘ㆍ폴란드 등은 소련이 무너진 후 소련지역에 거주하던 자국계 주민의 안전이 불안해지자 그들의 안위를 적극 챙기는 정책을 실시하여 그중 많은 사람들을 자국으로 이주시키기까지 하였다.

중앙아시아에 난민상태로 방치된 고려인문제를 보는 서구인들을 한국정부가 이들에 대해 무관심하고 소극적인 것에 의아해 한다. 중앙아시아의 무국적 고려인들에게 안정된 삶의 조건을 만들어주기 위한 정책을 더 서둘러야 한다. 그들에게 조국과 동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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