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토로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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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에서 온 편지
  • 정영훈
  • 승인 2007.08.0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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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영훈(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저는 황순례라고 합니다. 금년에 75세가 됩니다. 11세 때에 우토로에 왔습니다. 1943년이었습니다. 우토로는, 그 때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우토로 주민 황순례 노인이 한국정부에 보낸 편지는 갖은 차별과 역경을 견디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온 우토로 거주 재일 동포의 한많은 역사를 담담하게 회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우토로는 일본 교토부 우지시에 있는 재일조선인 마을이다. 육상자위대 오쿠보 기지 옆에 붙어 있는 6400평 작은 땅 덩어리에 65세대 200여 주민이 대를 이으면서 살아오고 있다. 우토로의 역사는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정부는 그곳에 군비행장 건설을 결정했고, 그 건설작업에 조선인을 징용하여 부려먹었다. 비행장 건설이 한창일 땐 조선인 인부가 1300여 명에 이르렀고, 노동자 집단합숙소가 들어서면서 마을의 꼴을 갖춰나갔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공사는 중지되고 주민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많았지만, 갈 곳 없는 사람들은 우토로에 남아서 세대를 이으면서 전후의 극빈생활에서 살아남았다. 일본정부는 조선인을 노동자로 끌고와서 죽도록 부려먹었지만 아무런 보상 없이 방치하였다. 그러나 우토로주민은 가난과 멸시-차별과 싸우면서 터전을 지켜왔다.

그동안 우토로의 땅은 주민 의사와 상관없이 세차례나 명의가 바뀌었다. 주민들은 그동안 일본 법원과 정부를 상대로 일본의 역사적 책임문제와 점유해온 기득권 등을 들어서 거주권을 요구하였지만 모두 패하였고, 퇴거요구를 받아왔다. 드디어는 금년 7월말까지 땅을 구입하지 않으면 (7억엔 상당) 제3자에게 넘겨 강제퇴거시키겠다는 최후통첩까지 왔다.

우토로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자 양심있는 일본인들이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을 만들어 주민들의 투쟁을 후원해주었다. 2004년부터는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우토로돕기에 나섰다. 우토로국제대책회의도 조직되고 언론에서도 자주 보도해주었다. 돕기운동은 토지매입을 위한 모금활동으로 이어져서 모두 14만명이 참여하여 5억원 이상을 모금하기도 했다.

한국정부도 처음에는 민간모금에서 부족한 부분은 정부예산으로 메워주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금년 들어서 정부 입장은 예산지원이 어렵다는 쪽으로 바뀐 모양이다. 정부는 우토로 토지매입자금을 지원해주면 다른 동포사회와 형평성 문제가 생긴다는 이유 등을 들면서, 강제퇴거를 전제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아무튼 한국정부의 입장전환으로 인하여 우토로지키기 운동을 전개하던 사람들이나 주민들의 입장은 매우 당혹스럽게 되었다. 이제 그 땅에서 강제로 퇴거당할 위기가 눈앞에 닥쳐온 것이다.

황순례노인의 편지는 그동안 동포들의 지원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마감하고 있다. “우토로에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쟁의 역사이며, 식민지의 역사입니다. 전후 60년이 지난 오늘도 일본 정부는 저희들에게 어떤 보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희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우토로를 지키겠습니다. 그렇지만 저희들 우토로 동포들의 힘만으로는 아무래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 정부를 나서게 할 수 없습니다. 조국에 부탁합니다. 제발 일본 정부를 혼내주세요. 그리고 역사의 마을, 우토로를 지키는 싸움에 조금만 더 도움을 주십시오.”

황노인은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 대해 징용자에 대한 보상 등 역사적 책임 문제를 제기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지만 그러나 한국정부는 이런 쪽으로의 개입을 꺼리고 있다. 아마도 한일협정에서 청구권자금을 챙기면서 전후보상문제는 종결된 것으로 하기로 한 탓인듯 하다. 바라건대는 한국정부가 우토로 문제에 좀더 적극적으로 임했으면 한다. 기왕 토지매입을 통한 해결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으면 토지매입자금 조성에 적극 나서서 우토로를 재일동포의 역사를 가르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방안 등을 모색할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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