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과 저항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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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과 저항의 경계
  • 이종태
  • 승인 2007.07.1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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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태(금융경제연구소 연구원, 본지 칼럼니스트)
“기나긴 밤이었거든~ 죽음의 밤이었거든~”

‘80년대’‘운동권 명곡’인 「이 산하에」는 한국 민주화운동 세력의 ‘역사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식민지-학살-분단-전쟁-독재로 이루어진 ‘죽음과 압제의 밤’이 우리 근대사였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관(觀)’이란 것은 유한한 인간의 제한적 인식 능력으로 둘러싸인 ‘생각의 감옥’일 뿐. 지난 세월이 ‘죽음의 밤’이기만 했다면 상당수의 국민들이 다이어트를 고민하고 해외여행수지가 만성 적자를 기록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어찌 가능했을까.

이런 점에서 볼 때 민주화운동 세력의 역사인식은 ‘불충분하고’ ‘불공정하다.’ 그래서, 급기야 이에 대한 정치적 공세가 시작되었다. 지난해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2」(이하 「재인식」), 그리고 이를 축약 정리했다는 「대한민국 이야기」(이하 「이야기」)가 그것이다.

뉴라이트의 대표 논객으로 알려진 이영훈 교수의 「이야기」는 「재인식」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정치적인 책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의 민족주의가 “한국의 사회와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힘으로 살아있기 때문에” “「인식」을 물고 늘어진다”고 이교수 스스로 말하고 있다.

또한 「인식」은 마오쩌둥(모택동)의 신민주주의혁명론에 입각하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결국 모택동주의가 한국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건데, 세계 최고 수준의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현 집권세력에겐 무척 섭섭한 말이 되겠다.

그러나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 ‘불충분하고 불공정한’ 민주화운동세력의 역사인식을 보완 내지 반박해서 우리의 인식지평을 넓히는 측면과 ‘뉴라이트 역사인식’이란 것의 정체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에서 이교수는 나름대로의 실증적 근거에 바탕, 식민지 시대에 ‘신분제 해체’, ‘공장과 노동자 수의 증가’, ‘비교적 양호한 경제성장률’(연평균 3.7%), ‘소유권 및 계약자유 원칙에 기반한 민법 도입’ 등 ‘자본주의 발전’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의 ‘자본주의 발전’을 애써 폄하하거나, 일제의 점거가 없었다면 조선에서 자연스러운 ‘자본주의 발생’이 이뤄졌을 거라고 주장(이른바 ‘맹아론’)해온 기존 진보 역사학계의 이데올로기적 강박에 비교할 때 오히려 건전한 입장이다.

그러나 이교수의 뉴라이트적 설명은 우리 근대사 서술을 ‘자유주의적 개인’의 발생과 발전에 편집증적으로 환원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일제의 억압으로 “조선인들이” “소멸의 위기에 봉착”하면서 비로소 ‘민족이라는 집단의식’이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자유주의적 개인’이란 관념 역시 근대 이후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라는 ‘사실’엔 애써 둔감하려고 노력한다. 민족이 관념이라면 개인도 관념이다.

이교수가 우리 근대사를 ‘자유주의적 개인’과 그 조건인 ‘소유권’ ‘자유계약권’ 등의 발전을 중심으로 서술한 결과는 무엇일까. 대한민국을 일제의 계승국가로 ‘재인식’하는 것이다. 이교수가 설명하는 대한민국 건국의 의의는 ‘근대적 법․제도의 확대’ ‘개인의 재산권 및 경제활동 보장’ 등인데 이런 흐름들은, 적어도 그의 서술 속에서, ‘8․15’가 없었더라도 성취되었을 종류의 사건들이다.(일제는 조선인의 참정권을 1946년부터 인정할 방침이었다고 그는 쓰고 있다.)

또한 민족 개념에 대한 그의 거리두기는 때로 우스꽝스러운 ‘오버’로 나타난다. 예컨대 조정래 소설 「아리랑」의 즉결처형 장면에 대해 이교수는 “식민지기이지만 법이 있었다는 사실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혹은 “조선형사령이란 법에 그런 조항이 있는지 묻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이교수에게 필자가 정말 묻고 싶은 것은 “제암리학살, 난징학살, 731부대의 생체실험 등은 법이 없어서 자행된 것이냐”이다. 또한 조정래의 소설은 나름대로의 현지 취재를 거친 것이다. 특히 최정희 같은 적극적인 친일부역 문인에 대한 이교수의 평가는 가히 읽을 만한 명문장이다. “(대일) 협력은 절망이고 죽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저항이 아닙니까. 협력과 저항의 경계는 그렇게 다시 애매해졌습니다.”

유감스럽지만, 공부 많이 한 지식인들이나 뉴라이트와 달리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협력과 저항의 개념 정도는 아주 쉽게 구별한다. 협력은 협력이고 저항은 저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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