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을 두 번 건넌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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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을 두 번 건넌 사람
  • 객원기자
  • 승인 2003.09.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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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만으로는 그 사람의 내력을 쉽게 알 수 없는 경우가 가끔 있다. 개혁국민정당 안동일(44) 대변인도 그런 사람중의 하나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약간 희끗희끗한 머릿결이 외모에는 별 신경을 안 쓰는 눈치다. 한여름 더위로 땀에 젖은 탓인지 입고있는 양복도 어딘지 후줄근해 보였다. 미국생활만 22년, 인생의 절반을 미국 뉴욕에서 보낸 셈인데 세련된 '뉴요커'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더구나 신생 정당이라고는 하지만 어엿한 공당(公堂)의 대변인인데, 그런 걸로 티를 내는 것은 애당초 싫어하는 것 같았다.
지난 8월 하순 어느 날 기자가 찾아간 날도 그랬다. 이미 한두 차례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취재'를 당한다는 긴장감이 전혀 없었다. 약속장소도 여의도 무슨 역의 몇 번 출구 앞에서 만나자는 식이다. 막상 만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어디 가서 뭘 먹을지'에 대한 의논이었다. 보통의 정치인이라면 음식점 한 군데 미리 예약해놓은 채 점잖을 뺐을 법도 한데... 아무튼 흥미로웠다.
식사 후 자리를 옮긴 곳은 서울 영등포에서 열린 지역행사. 안 대변인으로서는 이 지역 당원들에게 처음 인사하는 자리다. 하지만 스스럼이 없기는 여전했다. "반갑습니다. 대변인을 맡고있는 안동일입니다"하고 인사한 뒤 방바닥에 철퍼덕 앉는다. 그리고는 주변 당원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대며 '작업'을 시작한다. "어느 지역(위원회)에서 왔어요?" "동작구요" "이런 촌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네" "여기가 촌인가요?" "동작에 비하면 촌이지 뭐, 어어 농담이요 농담. 여기 분들 들으면 화내겠네. 허허"

작년 대선보며 귀국 결심

서먹했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도 간간이 들리기 시작했다. 안 대변인은 이런 분야의 작업에 일가견이 있다. 누구를 만나도 격의 없이 상대방에 파고드는 친화력의 소유자다. 나이가 어리거나 엇비슷할 경우에는 대충 말을 낮추면서 관계를 튼다. 나이나 사회적 위치상 어려운 상대를 만나도 비슷할 것 같다. 그러면서도 결코 불쾌한 감정을 남기지 않는 기술을 갖췄다. 이를테면 사람과 사람간의 경계를 낮추는 전문가인 셈이다.
친화력이 그의 가장 큰 무기라면 그 바탕에는 솔직함이라는 동력이 깔려있다. 가식없이 속내를 털어놓기 때문에 조금은 당황스러울 정도다. '내가 이 만큼 속사정을 내보였으니 너도 그 만큼 털어놓지'란 격이다.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지나친 자신감, 또는 경박함으로까지 비춰질 법하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이라고 함부로 다 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풍토에 비춰 더욱 그렇다.
이쯤 되면 말 때문에 집권 초기부터 말이 많았던 어느 분과도 '코드'가 맞는 것 같다. 사실 안 대변인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승리가 귀국을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라고 밝혔다. 그는 지난 6월 귀국 직전 뉴욕에서 개최한 자신의 후원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국정치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왔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해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미국생활이 오래 지속되면서 그저 스쳐간 막연한 꿈이라고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서울을 방문했을 때 새로운 감회를 받았고 그게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7년만의 귀국이었던 그때, 한국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중략)… 그 무렵 2002년 11월말 12월초의 분위기는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습니다. IMF 극복이며 월드컵 4강신화의 구축으로 이어진 민족 에너지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으로 다시 분출됐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의 당선이야말로 제 인생을 뒤흔든 일대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후략)… "
그러나 이 같은 '솔직한 고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요즘 세태로 볼 때 많지 않을 것 같다. '솔직함'이 의심받고 공격당하는 세상이다. 그의 말처럼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과 한국사회의 변화, 발전'이 과연 불혹을 넘긴 나이에 미국 내에서의 기반과 입지를 포기하고 고국에 돌아 올만한 이유가 될 수 있는지, 궁금증을 낳는다. 아무튼 그는 이번에 귀국을 결심하며 미국 시민권을 반납했다. 사족을 달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면 미국정부가 6개월간의 유예기간을 준다고 한다. 그 따기 힘들다는 미국 시민권을 스스로 반납하는 경우가 매우 드문 상황이다보니 '당신의 선택이 후회되지 않도록 한 번 더 생각할 기회를 준다'는 의미인 셈이다.

운동권은 무슨... 그냥 순진한 학생이었죠

솔직함에 대한 의심은 '왜 미국으로 갔나'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어려웠던 시절 고국을 떠났다 이제 돌아오는 이유'에 대한 물음도 내포돼 있었다. 그는 폭압정치가 한창이던 전두환 정권 초인 지난 81년 겨울 미국으로 건너갔다. 돌아온 대답에는 한 사내의 간단치 않은 인생역정이 담겨있었다.
"당시 시국이 하수상해 잠시 몸을 피하러 간다는 것이 돌아오는데 22년8개월이 걸렸습니다"
지난 77년 동국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 안 대변인은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다 이듬해 10월 긴급조치 위반으로 검거됐다.
"나는 뭐 운동권도 아니고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어요. 다만 남보다 좀더 순수했다면 순수했죠. 순진하다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르고..."
당시 동국대 문리대학장이었던 김희규 교수가 갑작스레 실종된 뒤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이 발생했다. 학생기자였던 그는 여러 정황상 정보기관의 개입을 확신했고 '의문사 의혹'이라는 제목으로 학보 발간을 준비했다. 하지만 학교당국에 의해 인쇄가 중지되자 지하신문 형태로 소식지를 발행했다 적발된 것이다.
"의식화니 뭐니 그런 건 없었어요. 학생기자도 기자랍시고 있는 사실 그대로 알리려고 한 것뿐이죠. 당시 학생과에 상주했던 중앙정보부 직원이 사건발생 직전에 "김 박사가 어디어디를 지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아는 선배가 우연히 엿들었다는 거예요. 그 교수가 평소 과격한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온건한 성품인데, 강의 중 잠깐 내뱉는 말로 박정희 정권을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됐다고 생각했죠. 재작년엔가는 의문사 진상위에도 올렸는데 아직까지 별 소식이 없네요"

사람도 못먹는 금치를 던져?

이 사건으로 그는 징역 2년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 구치소에서 복역하다 아홉달만에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하지만 감옥까지 갖다오고도 '순진한'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좀 어리숙했죠. 한 번은 전경들에게 돌멩이 대신 김치를 던졌다고 동대문서 정보과 형사들에게 엄청나게 맞은 적도 있어요"  
그는 지난 79년 여름 유신정권이 말기로 치닫던 무렵의 일이다. 서울의 어느 성당에서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온 학생운동 동료들을 환영하기 위한 모임을 준비중이었다. 상 위에는 떡과 막걸리, 그리고 문제의 김치도 차려졌다. 그런데 경찰이 덜컥 집회를 원천봉쇄 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런 모임마저 못한다는 사실에 분개한 그는 김치통을 들고 나섰다. 김치로 형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겨냥했고 곧 형사들의 와이셔츠며 점퍼는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김치 투척 사건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색적이면서도 불쾌한' 무기에 열이 잔뜩 달아오른 경찰은 그를 집중 추적해 붙잡은 뒤 씩씩거리며 발길질과 주먹세례를 퍼부었다.
"김치통을 버리고 뛰었어야 했는데 아까워서 끼고 있다가 그렇게 당했죠. 그때 김치가 무지 비싸서 금치라고 했거든요. 경찰도 날 패면서 그럽디다. 이놈의 자식, 사람도 못먹는 금치를 던져?"
--- 그 아버지에 그 딸이던가? 피를 못 속이는 해프닝이 최근 안 대변인의 집안에서 일어났다. 뉴욕에 있는 16살 된 둘째딸이 지난 2월 맨해턴으로 놀러간다며 집을 나가 늦도록 연락이 없는 것이었다. 이라크 전 발발후 최대규모의 반전집회가 열린 날이었다. 한참 뒤 알려진 소식은 딸이 시위중 체포돼 구금상태라는 것이었다. 안 대변인이 더욱 놀란 사실은 수십만명의 시위대중 체포된 것은 폴리스라인을 넘은 겨우 2백여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딸이 그 2백명에 끼었다는게 걱정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는데, 다행히 미성년자라는 점이 감안돼 다음날 훈방됐다.
"왜 갔냐고 물었더니 "무고한 생명이 죽어가야하는 전쟁을 막아야하며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한 목소리를 내면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그런데 가더라도 앞장서지는 마라"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죠. 아비의 마음이란게 그런 것 같아요"  ---(2.5매)
80년 초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학교에서 제적됐던 안 대변인은 복학해 이번에는 동국백서라는 제목의 또 하나의 '불온문서' 제작에 참여했다. 유신정권의 몰락으로 생긴 열린 공간속에서 학내외의 제반 부조리를 폭로, 시정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너무 짧았다. 그 해 5월 광주에서의 일로 인해 또다시 수배자 명단에 올랐고 그 이듬해 도피성 미국유학의 길에 올랐다. 태평양을 처음 건넌 것이다.
그런데 한 1년만 머물다 온다던 미국생활은 뜻밖의 일로 길어졌다. 미국 도착 후 한 달여 만에 '불교 사회주의 사건'이라는 대규모 조직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그 사건도 알고 보면 참 우스운 사건입니다. 200명이나 무더기로 걸려들고 당국은 조직도까지 그려가면서 마치 간첩단이나 잡은 것처럼 떠들어댔는데, 그 시절 다른 사건도 그랬겠지만 엄청나게 뻥튀기된 겁니다. 뭐 좀 의식화돼 있긴 했지요. 하지만 정부가 밝힌 것처럼 사회주의에 경도되고, 뭐 그런 건 절대 아니었거든요. 불교계통 학생단체들이 지방에서 MT 비슷하게 모여서 세미나 같은 걸 하는 자리였는데, 보고있는 책이나 문서들이 이상하니까 등산객의 신고로 잡혀 들어갔어요. 그런 어수룩한 지하조직도 있나요?"

임수경 단독취재때 가슴 뿌듯

아무튼 이 사건으로 안 대변인은 5공화국이 거의 끝날 때까지 돌아갈 조국을 잃어버렸다. 생계를 위해 선택한 수단은 동포신문 기자였다. 이 때부터 그는 언론인으로서의 이름을 국내외에 알리게 된다. 매일신문을 시작으로 미주 동아일보와 미주 세계일보 기자, 라디오 서울 앵커 등을 거치며 족적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89년 임수경씨의 평양방문 독점 취재. 미국 시민권자 자격으로 북한취재가 처음이 아니었던 그는 당시 평양축전 취재를 위해 북한에 들어갔다 임수경이란 존재를 알게된다.  
"눈이 번쩍 뜨이는 사건이었죠. 기자로서도 행운이었지만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 가슴 벅찬 기억들이었습니다. 특히 (임)수경이가 북한체제를 무조건 찬양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방식대로 당당히 행동하는 모습, 그리고 그런 수경이의 행동에 처음엔 낯설어하다가 점차 열광하는 북한 주민들, 이런 것을 직접 보고 기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저는 정말 행운아입니다"
임수경 특종으로 그는 최고의 성가를 올렸지만, 그와 동시에 당시 북한취재를 지원했던 소속 신문사를 떠나야 했다. 이번에도 대충 굽히지못하는 그의 성격이 원인이 됐다. 북한취재기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소속 신문사에서 연재를 못하게 되자 진보적인 모 월간지에 게재했고, 이를 다시 한겨레신문이 특집으로 실은 것이다. 대노한 경영진은 그를 곧바로 해고했다.

윤도현의 눈물

이처럼 소신을 쫓는 그의 행동을 보다보면 자신감을 넘어선 당돌함마저 느껴진다. 최근 연재중인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의 고정란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태평양을 두 번 건넌 사람들'이라는 코너에는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에 대한 기억을 담고있는데, 이들과의 인간관계의 단면을 거침없이 소개하고 있다. 일면 과시적인 욕구로 읽혀질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실관계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당당한 노력인 듯 싶다.
이와 관련, 최근 개혁국민정당 홈페이지에 올린 칼럼 한 편은 그의 진정성을 엿보게 한다. '윤도현의 눈물과 레이건의 편지'라는 글은 지난해 윤도현 등 남한가수들의 북한 방문공연을 소재로 삼고 있다.
글은 "나는 가수 윤도현에 대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알지 못했다"고 시작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북한 주민들도 윤도현을 몰랐고, 따라서 윤도현의 울부짖는 듯한 창법은 물론 소매없는 티셔츠 등 자본주의적인 기괴한(?) 외모에도 무척이나 낯설어하며 차가운 반응이었다고 글은 적고 있다. 하지만 윤도현이 마지막으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를 때 감정에 복받친 윤도현이 눈물을 주르르 흘렸고, 감정이 전이된 북한 관중들도 감동의 물결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이후 평양텔레비전은 윤도현의 눈물을 몇 번이나 재방송했다.
안 대변인은 끝으로 이렇게 적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진심과 진정은 어디서나 통한다는 것이다. 어떤 장벽도 뚫는다는 것이다. 통일을 노래하며 눈물을 흘렸던 윤도현의 진심이 북한의 완고한 관중과 방송국 사람들을 변하게 했듯이 바람직한 개혁을 원하는 우리의 간절한 바람도 자신을 던짐으로써 진심으로 다가설 때 완강한 사람들을 변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총 31.4매
길 경우 중간에 서체가 다른 부분(약 2.5매)을 들어내시기 바랍니다.


사진 설명
1. 작은 사진 : 안동일 대변인이 개혁당사 회의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2. 큰사진 : 지난달 세계한민족지도자대회 참석차 서울을 방문한 김기철 뉴욕 한인회장과 롯데호텔에서 만났다. 뉴욕은 안동일대변인이 미국 체류시 줄곧 거주해온 도시로 그의 제2의 고향이라할 만하다. 김회장은 그의 고향친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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