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다가와 조선학교를 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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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다가와 조선학교를 살리자
  • 정영훈
  • 승인 2007.05.24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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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영훈(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에다가와 조선학교의 정식이름은 ‘도쿄 제2 조선 초급학교’이다. 재일 조선인들이 에다가와지역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정부는 1940년에 열릴 동경올림픽을 위한(이 동경올림픽은 중일전쟁 발발 후 취소되었음) 시설을 조선인들이 집단 거주하던 지역에 짓기로 하고, 그곳에 살던 조선인들은 더 변두리 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켰는데, 동포들이 강제이주된 곳이 바로 에다가와 지역이었다.

당시 에다가와 지역은 쓰레기매립장으로 이용되는 황무지였으며, 강제이주된 조선인들은 쓰레기 침출수가 흘러나오고 장마가 들면 허리까지 물이 차던 그 지역에 간이주택을 짓고 고달픈 삶을 개척해야 하였다. 해방이 되면서 많은 동포들이 고국으로 귀국하였지만, 귀국을 뒤로 미룬 다수 동포들은 이 지역에 여전히 거주하면서 삶을 이어갔다.

그들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민족의 말과 정체성을 잃지않기 위하여 분투하였고, 이때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려고 세운 국어강습소가 오늘날의 에다가와 조선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이국에서의 차별과 멸시에 분개할수록 동포들은 학교를 지키고 가꾸는데 열정을 쏟았다. 학교의 운동장을 정비하고 건물을 짓는 것 역시 전적으로 동포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학교의 부지가 동경도의 소유로 있었기 때문에 사용권을 둘러싸고 오랜 협상이 있었는데, 이 협상은 1971년에 와서 하나의 합의에 도달하게 된다.

그 합의서에서는 일본정부가 1939년에 조선인을 이 지역에 강제이주시킨 것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보상차원에서 학교로 하여금 20년간 토지를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같은 관례는 계약기간이 만료된 1990년 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그같은 상황은 2003년에 들어 갑자기 돌변하게 된다.

동경도가 1990년으로 토지사용계약이 종료되었는데도 학교측이 동경도의 땅을 불법점유하고 있다면서 학교를 상대로 부지반환과 그간 밀린 임대료 4억엔을 지불하라는 소송을 법원에 제기한 것이다. 동경도의 이같은 태도는 우리동포가 에다가와로 강제이주되었던 특수한 역사와 학교가 땅에 대해 갖는 연고권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가혹한 것이었다.

동경도가 이렇게 태도를 돌변한 데는 극우인사로 유명한 이시하라가 지사로 취임한 것과 일본의 극우화하고, 북일관계가 악화한 것 등이 배후에 작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학교와 동경도 사이에 소송이 벌어지자 동포사회와 일본내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학교를 돕고나섰다. 국내에도 에다가와 학교를 돕는 모임이 결성되어 동경도를 규탄하는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 재판은 3년3개월을 지속하다가 금년 3월에 법원이 제시한 중재안을 양측이 받아들임으로써 종결되었는데, 당시 합의된 중재안에서는 학교가 땅을 현시가의 1/10 수준의 가격인 1억 7천만엔(14억원)에 3개월안에 매입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같은 합의는 동경도의 무리한 주장을 거부해온 학교측의 승리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로써 학교측에는 3개월 안에 토지매입대금을 조달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다시 대두되었다.

학교문제가 새 국면으로 접어들자 그동안 학교를 지지하여 후원하던 사람들은 당면과제인 토지매입대금을 모금하는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국내에서도‘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 모금’(www.edagawa.net)이란 이름의 기구가 조직되어 모금운동에 본격 나서고 있다.

기구에서는 그동안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우리말과 정체성을 지켜온 에다가와 민족학교의 장한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이 학교가 폐교위기를 극복하고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발전해갈 수 있도록 지원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지금 남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에다가와 조선학교 살리기 운동은 우리가 냉전의 잔설을 극복하고 민족적 통일을 이룰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시금석이 되고 있다. 에다가와 살리기 운동이 우량한 결실을 맺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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