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들도 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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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인들도 동포"
  • 강국진
  • 승인 2003.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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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부터 지금까지 사할린한인회장을 맡고 있는 박해룡회장(75)은 한국정부에 서운한 점이 많다. "사할린 한인들은 모두 일본식민지배의 피해자들이고 한국에 귀국하게 해 달라고 호소하는 곳도 전세계 한인사회 가운데 사할린뿐이다.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할 일본에선 시간을 끌며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 한국정부는 아무런 관심도 안기울인다. 영주귀국을 원하는 사람이 2천5백명이나 되는데 자리가 없어서 기다리고 있다"라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박 회장의 아버지는 1905년 경남 진주생인데 1927년 어머니와 결혼하던해 남강에 큰 홍수가 져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자 혼자 사할린으로 일하러 떠났다. 36년에는 어머니까지 사할린에 정착했다. 어머니는 48년에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는 재혼도 안한 채 자식들을 혼자서 키웠다. 1959년부터 64년까지 연해주축산농업대학을 다닌 그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 협동농장의 총책임자가 되었고 소련공산당에도 가입했다. 1972년부턴 주정부의 축산을 총괄하는 일을 30여년 하면서 훈장도 여러 개 받았다. 그는 사촌형이 부산에 산다.
강국진 기자(2.7매)-1차교열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한민족이고 동포들입니다"
1999년부터 사할린한인회장이 된 이후 세 번째 임기를 수행하고 있는 박해룡(75) 사할린한인회 회장은 한국정부에 서운한 점도 많다. "사할린 한인들은 모두 일본식민지배의 피해자"들이고 "한국에 귀국하게 해 달라고 호소하는 곳도 전세계 한인사회 가운데 사할린뿐"이란 것이다. 그는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할 일본에선 시간을 끌며 기다리라는 말만 한다"고 말했다. "영주귀국을 원하는 사람이 2천5백명이나 되는데 자리가 없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귀국을 못할거면 영주귀국한 사람들이 받는 생활비의 절반만이라도 받았으면 하는 사람들도 많죠"라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심지어는 지난 5월 외교부의 한 부장이 사할린을 방문해 "당신들은 외국국적을 가진 사람들인테 한국에서 왜 생활비를 주느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며 불만을 터트렸다.

박 회장의 아버지는 1905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해 1927년 어머니와 결혼했다. 그 해 남강에 큰 홍수가 져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자 혼자서 사할린으로 일하러 떠났다. 36년에는 어머니까지 사할린에 정착했다.

당시 그의 부모님은 돈만 벌면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해방이 되자 너도나도 부두로 몰려가서 배를 타려고 했지만 결국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당시 나는 일본국적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름도 있었죠. 하지만 고국으로 귀환한 사람은 '일본사람' 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48년에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는 재혼도 안한 채 자식들을 혼자서 키웠다. 아버지가 일하던 벌목장에서 학교까진 7-8Km가 넘었다. "겨울이 되면 썰매를 타고 학교에 다녔지만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학교 못간 적도 있었습니다."

1959년부터 64년까지 연해주축산농업대학을 다닌 그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 협동농장의 총책임자가 되었고 소련공산당에도 가입했다. 1972년부턴 주정부의 축산을 총괄하는 일을 30여년 하면서 훈장도 여러 개 받았다. 사할린 한인 가운데 드물게 '출세'한 경우이다. "남조선 출신이면서도 당원이 된 건 정말 특이한 경우죠."

62년 결혼한 그는 "2녀1남"을 슬하에 두고 있다. 73년에 낳은 늦둥이 막내아들은 큰누이와 열 살이나 차이가 난다. "아버지가 장손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한다는 성화를 못이긴 거죠."

그는 사촌형이 부산에 산다. 그 밖에도 경남 진주와 부산 등에 많이 있다. 그는 한국을 방문할 때면 친척들과 자주 만난다며 얼마 전 참석했던 어느 친척의 결혼식 얘기를 했다. "한국은 결혼식 하고 밥만 먹고 집에 가더군요. 사할린에선 결혼식 한 번 하면 기본으로 사흘은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벌이는데."

강국진 기자 tengis@ngotimes.net (6.7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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