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상하던 그때를 어찌 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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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상하던 그때를 어찌 잊을까"
  • 강국진
  • 승인 2003.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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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2월 부산항을 출발한 91명이 브라질에 도착했다. 이후 수많은 이민자들이 남미로 향했고 오늘날 중남미거주 한인은 10만여명에 이른다.  이순덕(61) 칠레한인회장은 말도 안통하는 머나먼 객지에서 야채장사를 하며 고생했던 경험이 30년 가까운 이민생활에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에서 생활이 어려워져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76년 4월에 아내와 4남매를 이끌고 칠레로 갔다. 한국에선 제법 중산층 소리를 들었던 그였지만 여행경비로 돈을 모두 써 버리고 이역만리에서 빈손으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 1년 동안은 토마토, 감자, 양파같은 야채를 팔며 온갖 고생을 했다. 그는 이제 잡화수입상과 쉐타생산공장을 경영하는 어엿한 '사장님'이다. 게다가 작년 2월에는 칠레한인회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칠레에는 약 2천명의 한인들이 있다. 대부분 수도인 산티아고에 모여 살고 주로 봉제, 무역 등에 종사한다 세계한인지도자대회에 참석한 이 회장은 대회 기간 내내 "소외된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미국과 일본 쪽 잔치에 들러리 선 기분"이라는 것이다. (2.7매)-1차줄임


1962년 12월 부산항을 출발한 91명이 브라질에 도착했다. 이후 수많은 이민자들이 남미로 향했고 이들은 오늘날 10만여명에 이르는 중남미 한인사회의 근간이 되었다.

이순덕(61) 칠레한인회장은 "말도 안통하는 머나먼 객지에서 야채장사를 하며 고생했던 경험"이 30년 가까운 이민생활에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에서 생활이 어려워져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76년 4월에 아내와 4남매를 이끌고 칠레로 갔다. 한국에선 제법 중산층 소리를 들었던 그였지만 여행경비로 돈을 모두 써 버리고 이역만리에서 빈손으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 1년 동안 토마토, 감자, 양파같은 야채를 팔았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그는 이제 잡화수입상과 쉐타생산공장을 경영하는 어엿한 '사장님'이다. 게다가 작년 2월에는 칠레한인회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칠레에는 약 2천명의 한인들이 있다. 대부분 수도인 산티아고에 모여 살고 주로 봉제, 무역 등에 종사한다.

산티아고에는 이민2세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한인들이 모금한 돈으로 90년에 세운 한글학교가 있다. 당시 그는 한글학교 건립추진위원장이었다. 현재 한글학교 학생은 2백명 가량이고 20명에 이르는 자원봉사 교사가 있다.

2002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는 칠레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칠레 사람들이 전에는 한국을 잘 몰랐는데 한국팀이 4강신화를 이루면서 이미지가 엄청나게 좋아졌다"며 흐믓해 했다. "물론 한인회에서도 칠레 사람들과 융화하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

세계한인지도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다시 찾은 이 회장은 대회 기간 내내 "소외된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미국과 일본 쪽 잔치에 들러리 선 기분"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산적한 현안을 처리하는데 2박3일은 너무 짧다. 칠레에서 한국에 오는 데만 사흘이 걸린다. 참가자들이 서로 믿음을 갖고 얘기하는 자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점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강국진 기자 tengis@ngotimes.net (5.3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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