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와 재벌, 그리고 보수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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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와 재벌, 그리고 보수언론
  • 이종태
  • 승인 2007.05.03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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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태(금융경제연구소 연구원)
재벌개혁론자들은 기뻐하셔도 된다. 재벌을 뿌리 채 흔들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임박했다. 그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재벌 기업들이 학수고대하던 한미 FTA이다.

현재 한국의 대기업들에 대한 ‘외국인 소유한도 제한’은 이미 폐지된 상황이다. 외국인들이 주식 매입으로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가 활짝 열려 있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현재 대주주인 재벌 가문들의 입장에서는 이른바 ‘5% 룰’(특정 기업의 총주식 중 5% 이상을 사들인 뒤부터 소유주식 변동 상황을 금융감독위원회와 증권거래소에 신고) 이외엔 딱히 제도적 경영권 보호 수단이 없다. 지금까지는 계열사 우호 지분으로 장난을 쳐왔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더욱이 한국 기업들은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주식가치가 저평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투기꾼들이 볼 때 이보다 더 좋은 먹이감은 없다. 일단 경영권 장악 이후 기존의 ‘느슨한 경영’을 ‘개혁’해서 주가를 올린 뒤 기업을 되팔면 엄청난 프리미엄이 약속된다.

한미 FTA가 발효되면 투기꾼들이 아무리 귀찮게 굴어도 경영권 보호 수단을 제도화할 수는 없다. 모두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미국엔 이미 주요 기업의 경영권이 외국인에게 넘어가는 사태를 견제하기 위한 엑슨-플로리오법이 입법화되어 있다. S&P 500대 기업의 94%는 경영권 방어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한국엔 없다.

한자리 수 지분으로 전체 기업집단을 전횡하는 재벌, 시사저널 사태 등으로 알 수 있듯이 부당한 사회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재벌. 그들을 이렇게라도 퇴치할 수 있다는 것은 일견 속 시원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느슨한 경영’엔 이른바 ‘과잉 노동인력’과 비핵심 사업부문, 거래선을 해외로 바꾸면 훨씬 저렴할 하청관계(중소기업) 등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한미 FTA로 논란이 일던 내내 매우 미심쩍었다. 재벌 기업들과 그 대변인이라 할 수 있는 전경련, 보수언론 등이 자신들의 발등을 내려찍을 수 있는 한미 FTA를 뜨겁고 일관되게 지지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그 의문이 풀렸다.

한나라당의 이병석 의원과 열린우리당의 이상경 의원은 이미 지난해부터 각각 ‘외국인투자규제법’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판 엑슨-플로리오법이라고 한다. 지난 4월 20일엔 국회 산자위에서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 위협을 방지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한다는 취지로 공청회가 개최되었다.

<매일경제신문> 등 ‘개방 천국, 보호 지옥’을 외치던 보수언론들은 ‘투자 개방’의 반대자로 돌아섰다. 한미 FTA가 타결된 이후엔 연일 ‘기간산업 방어장치를 만들자’고 기사와 칼럼, 심지어 논설을 통해 호소하고 있다. 이렇게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한미 FTA 발효 이전에 뭔가 재벌 가문의 경영권을 보호할 대책을 만들고 싶은가 보다.

그런데 재벌 가문과 보수언론들, 한 입으로 두 말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개방 천국, 보호 지옥’을 외치던 당신들이 타결안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자유 투자’와 ‘투자 개방’을 어떻게 반대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들이 우상으로 받들어 모시는 시장의 미덕이 무엇이었던가.

다른 기업 보다 열등한 제품을 비싸게 내놓는 비효율적 기업을 퇴출시켜 전 사회적인 효율성 제고와 기술혁신을 이루는 기능이다. 이는 물론 제품시장의 ‘주권자’인 소비자들이 비효율적 기업의 상품을 사주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지금까지 같은 어조로 세계시장에서 한국 농업의 퇴출을 주장해왔고 대통령의 호응까지 얻어 냈다. 아니 대통령 뿐 아니라 대다수 시민들까지 설득시킨 강력한 논리를 당신들은 펼쳐왔던 것이다.

그런데 ‘경영권 시장’(자본시장, M&A시장)이라는 것도 있다. 이 시장의 주권자는 주식가치를 좌우하는 주주들이다. 그리고 경영실패로 주식가치가 떨어진 기업은 다른 기업에 인수합병되어 해당 CEO는 경영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른바 ‘자본시장의 징계 메커니즘’이다. 그렇다면 ‘개방 천국’의 주창자들은 마땅히 외국인들이 한국 대기업의 경영권을 마음껏 노릴 수 있게 권장해야 할 것이다. 세계시장이 소비자 후생도 키워주고, 다 알아서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들이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은 ‘투자의 자유화․개방화’를 가로막는 ‘좌빨(좌익 빨갱이)’ 짓일 뿐이다.

재벌들과 보수언론들은 지금까지 농민 등 서민층의 이해에 상반되는 한미 FTA를 국민경제 발전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적극 지지해왔고 이후에도 같은 방향으로 갈 것이다. 그렇다면 서민들 역시 재벌 가문에 대해 새로운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천지대란의 외부충격을 불러들여 놓고 자신들(재벌 가문)만 쏙 빠지려하는 자들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단 말인가.

필자는 개인적으로 기업지배구조 안정 장치가 국민경제 차원에서 이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미FTA로 삶의 위기를 감수해야 할 서민들은 현재와 같은 재벌들의 처신을 감시하고, 이에 적절히 대처해야 할 것이다. 서민의 피바다 위에 재벌 가문의 사회적 권력을 세워줄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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