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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 광무제 조선 국왕 즉위 수렴동청정(垂簾同聽政)
icon 김민수
icon 2012-11-18 07: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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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 광무제 조선 국왕 즉위 수렴동청정(垂簾同聽政)


http://blog.naver.com/msk7613


1863년 12월 13일 면복(冕服)으로 성복(盛服)한 고조 광무제가 빈전(殯殿)에 나아가 대보(大寶)를 받고 인정문(仁政門)에 이르러 즉위하는 예를 행하였다. 왕비(王妃)를 높여 대비(大妃)로 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를 받들고 희정당(熙政堂)에서 수렴동청정(垂簾同聽政) 예를 행하였다. 고조 광무제가 면복(冕服)을 입고 창덕궁(昌德宮)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한 후 조하(朝賀)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렸으며, 이어서 대왕대비(大王大妃)를 받들고 수렴동청정(垂簾同聽政)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대왕대비가 적의(翟衣)를 갖추고 희정당(熙政堂)을 나와서 동쪽 가까이에서 남쪽을 향하여 앉되 앞 기둥에 발을 드리웠다. 고조 광무제가 백관을 거느리고 의주(儀註)대로 예(禮)를 행한 후 전(殿) 위로 올라가 발 밖에서 서쪽 가까이에서 남쪽을 향해 앉았다. 대왕대비가 대신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궁궐의 정전(正殿) 앞에 있는 정문인 단문(端門)에서 임금의 자리를 잇는 천조(踐阼)하는 예를 거행하고 수렴(垂簾)하여 함께 정사를 처결하는 의식도 거행하였습니다. 운수가 막혔던 나라의 형세가 태평하게 되고 위태롭던 백성의 마음도 안정되었으니, 모두 우리 자성(慈聖:대왕대비(大王大妃))께서 정책(定策)하여 함께 정사를 처결하도록 한 크고 성대한 드높고 큰 공적 공렬(功烈)입니다. 임금이 정사를 하는 것은 반드시 학문에 기본을 두어야 하는 법인데,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의 도는 모두 서경(書經)의 요전(堯典)•순전(舜典)과 대우모(大禹謨)•고요모(皐陶謨)•익직(益稷)의 2전3모(二典三謨)에 모두 실려 있고 주(周) 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정치도 방책(方冊)에 두루 있습니다. 대체로 정사를 잘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문제와 백성들이 잘 사는가 못 사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임금이 공부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비록 총명과 슬기를 타고나신 성인이지만 진실로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덕성을 성취하고 정치의 대체를 분명히 익힐 수 있겠습니까? 지금 성상(聖上)께서는 나이가 어려 배움이 아직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중에도 아직 읽지 못한 책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이 때야말로 바로 배움에 주력해야 할 때입니다. 이끌어서 도와주고 손을 잡아 끌어주는 방도를 전부 자성에게 바라니, 항상 시간을 아끼라는 경계를 진념하여 때에 맞게 공부가 진전되는 성과를 이루도록 독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치하는 수단에 통달하여 정사와 교화가 매우 밝아져 훌륭한 덕이 중국 신농(神农)ㆍ복희(伏羲)ㆍ여와(女娲), 황제(黃帝)ㆍ전욱(颛顼)ㆍ제곡(帝喾)ㆍ요(尧)ㆍ순(舜)의 삼황오제(三皇五帝)의 경지에 오르고 나라의 터전이 억만년토록 공고하게 된다면 태묘(太廟) 사직(社稷)과 백성들을 위한 우리 대왕대비(大王大妃) 전하의 높은 덕과 큰 공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국왕이나 왕후가 승하한 뒤 36일 동안 일반 공무(公務)를 중지하고 조의를 표하는 공제(公除) 이튿날부터 아침마다 국왕의 앞에서 학문을 강의하는 진강(進講)하고 저녁마다 임금이 신하들을 불러 경전에 대해 물어보거나 의견을 듣는 소대(召對)하여 과정(課程)을 정해 성취할 방도를 삼으소서. 이것이 바로 신의 구구한 축원입니다.”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흥근(金興根)은 아뢰기를,“한(漢) 나라 선제(宣帝)나 송(宋) 나라 효종(孝宗)은 모두 입승(入承)한 명주(明主)입니다. 신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의 구구한 기대는 그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 우(禹) 임금과 탕(湯) 임금,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처럼 되시기 바랍니다. 대체로 전하께서는 거룩한 자태가 매우 영특하고 민첩한 영민(英敏)하고 슬기로우며 거룩한 자질이 고상하고 현명하기 때문에 자성 전하께서 아침까지 기다리지 않고 대책(大策)을 결정해서 맞아들여온 것입니다. 전하께서 그 자애로운 덕에 보답하려면 대왕대비 전하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아야 할 것인데, 대왕대비 전하의 마음이 전하에게 바라는 것은 또한 오직 요 임금과 순 임금, 우 임금과 탕 임금, 문왕과 무왕처럼 되는 것뿐입니다. 효성스럽고 어질고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은 바로 성인(聖人)이 되는 기본인데, 그 요점은 또 학문에 힘을 쓰는 데 있습니다. 학문에 힘을 쓰지 않으면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항상 이를 생각하여 힘쓰고 또 힘쓰소서.”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좌근(金左根)은 아뢰기를,“성인이 큰 보배로 여기는 것은 지위(地位)이고, 덕이 있는 사람은 거기에 해당하는 지위를 반드시 얻는 법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대왕대비 전하로부터 그것을 받았는데 은혜롭게 보살피고 돌보아 주어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기약하시는 것은 요(堯),순(舜)과 하(夏)의 우왕(禹王),은(殷)의 탕왕(湯王),주(周)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2제3왕(二帝三王)으로 기준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효성스럽고 공경하고 부지런하고 검박한 것은 바로 성인이 되는 기본인데 성덕(聖德)을 이룩하는 것은 오로지 학문에 꾸준하게 힘쓰는 데 달려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점을 명심하여 혹시라도 소홀하게 하지 말고 정사에 부지런하고 비용을 절약하여 우리 500년이 된 태묘 사직을 이끌어서 억만 년 무궁한 번영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즉위하신 초기의 축원으로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하고, 좌의정(左議政) 조두순(趙斗淳)은 아뢰기를,“하늘을 공경하고 조상들을 본받으며 학문에 힘쓰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은 제왕이 정치를 하는 큰 근본입니다. 우리 자성께서 무궁토록 계승될 왕위를 전하에게 물려준 것은 더없이 큰 은혜이고 더없이 대단한 덕입니다. 전하께서는 대왕대비 전하의 은혜와 덕에 보답하기 위하여 하늘에 닿을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매 순간 항상 상제(上帝)께서 굽어보듯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고, 항상 조종(祖宗)께서 곁에 있는 듯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조종을 본받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밝혀서 학문에 힘쓰고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들을 사랑한다면 하늘에서 지혜를 내리고 복을 내리어 우리나라 억만 년 번영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왕대비 전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고 자전(慈殿) 전하의 덕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천만 번 지극한 마음으로 비는 바입니다.”하였다.

대왕대비(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가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에게 언문(諺文) 교서를 내리기를, “경 등은 들으라. 오늘의 이 거조(擧措)가 어찌 차마 할 노릇이겠는가? 미망인(未亡人)이 갑오년(1834)과 기유년(1849)에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의 어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원성모(純元聖母)가 애통함 속에서 정사를 처결한 때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걷잡지 못하였다. 어찌 오늘 이 자리에서 미망인이 또 천만 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만나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태묘와 사직의 위태로움이 조금의 여유도 없는 것은 오늘이 지난날과 다름이 없지만 미망인이 사리에 어두운 탓으로 모든 사리에 대해 비록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의범(儀範)을 만분의 일이나마 본받으려고 해도 본받을 수 없으니, 이것을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불행 중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주상(主上)의 천품이 영특하고 어린 나이에 숙성한 정도가 과연 평범하지 않은 것이다. 억만년 무궁한 번영이 오늘부터 시작되었으니 천지(天地)와 군주(君主)의 조상(祖上)인 조종(祖宗)께서 말없이 보살펴주고 도와주시는 뜻을 여기서 알 만하다. 경 등의 마음도 모두 이렇게 축원하고 있을 것이다. 안으로 성상의 몸을 보호하고 밖으로 성상의 학문을 도와서 이끄는 것이 오늘날 많은 일에서 어찌 이보다 더 우선해야 할 일이 있겠는가? 보호하는 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책임이지만 도와서 이끄는 한 가지 일은 오직 경들만을 바라고 믿는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태평 시대의 거룩한 임금이 되게 한다면 경들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어찌 이에서 더할 것이 있겠는가? 잊지 못하고 염려하는 이 마음이 오직 이것을 바랄뿐이다.”하였다.

대왕대비가 언문(諺文) 교서를 내려 고조 광무제를 훈계하기를,“오직 천지(天地)와 군주(君主)의 조상(祖上)인 조종(祖宗)들께서 묵묵히 도와주고 은밀하게 말없이 돌봐주신 덕분에 지금 망극한 가운데서도 5백년의 태묘 사직(太廟 社稷)을 다행히 부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 주상은 바로 우리 인조(仁祖)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이고 영조(英祖)의 방계(傍系) 집안이다. 조종의 계통을 이어 조상의 일을 행하려면 응당 조종들을 본받아야 한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조종들이 물려준 심법(心法)이며, 근신하고 절약하는 것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근본이다. 인주(人主:임금)의 행동 하나 말 한 마디가 다 백성들의 고락(苦樂)에 관계되고 백성의 마음이 바로 하늘의 마음이니 어찌 언제나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훌륭한 제왕과 명철한 임금은 대부분 민간에서 나서 성장하여 민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주상(主上)은 영특하고 명민한 천품을 타고 났으니 지난날에 보고 들은 일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옛일을 배워 총명을 넓혀 근신하고 절약하는 요체로 삼으려면 오직 부지런히 강학(講學)해야 할 뿐이다. 아무리 나이 어리고 상사(喪事) 기간이라 하더라도 자주 신하들을 접견하면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講論)하고 치법(治法)과 정모(政謨)를 밝게 익혀서 위로는 태묘 사직의 중함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는 것이 바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걱정하는 바이다. 임금이 아무리 존귀해도 조정의 신하를 무시하는 법은 없다. 더구나 대신은 오랜 경험과 나라를 위하는 정성을 가지고 모두 조종의 법을 받들고 있으며 도와서 이끄는 것도 또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반드시 예로 대하고 그들의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지금 이 훈계는 나의 바람만이 아니라 바로 온 나라가 축원하고 있는 것이니, 공경하고 힘쓰라.”하였다. 고조 광무제가 자리에서 내려와 직접 받았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에게 언문(諺文) 교서를 내리기를,“미망인이 깊은 대궐 속에 있으면서 어찌 조정의 일을 알겠는가마는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자문(諮問)ㆍ주달(奏達)하던 자리 연석(筵席)에 나온 대신들이 제기하는 좋은 말과 훌륭한 계책을 더러 얻어 들었다. 백성들의 생활이 곤란한 것과 나라의 재정이 옹색한 것은 임금이 2품 이상의 신하를 가리키는 경(卿) 등이 항상 말하면서 깊이 우려하는 것이고, 탐욕과 부정이 풍속으로 된 것과 기강이 땅에 떨어진 것은 경 등이 매번 말하면서 탄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워지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신들의 근심과 탄식이 이렇듯 간절한데도 백성들은 그 은택을 입지 못하고 나라는 그 효과를 거두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미망인은 평상시 이 일에 대해 한탄하고 있었다. 어렵고 위태로운 시기를 만나 믿고 의지할 것은 오직 경 등처럼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3, 4명뿐이다. 백성들을 구제하고 나라의 재정을 풍족하게 하는 일과 욕심이 많고 하는 짓이 더러운 탐오(貪汚)를 징계하고 기강을 진작하는 일은 바로 경 등이 해야 할 일이다. 또 다시 근심하고 탄식만 하면서 끝내 뚜렷한 성과가 없다면 경 등에게 큰 희망을 가진 본의가 아닐 것이다. 부디 성실한 마음과 성실한 일로 이 슬프고 괴로운 심정과 구구한 기대를 대양(對揚)하기를 바란다.”하였다.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지금 이 우리 거듭 유시한 교서는 바로 성인들이 전수해 온 심법입니다. 그대로 받들어 행하여 덕을 이루게 된다면 만대의 태평한 세상이 지금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신 등을 임금이 신하의 잘못을 문책하여 내리는 책유(責諭)한 전교는 바로 우순(虞舜)의 조정에서 임금과 신하가 책난(責難)하던 말씀입니다. 신 등이 바라는 바는 자성께서 모든 일을 밝게 살펴 여러 신하들을 독려해 나아가는 것이니, 그렇게 하면 누가 감히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조금이라도 태만하겠습니까? 오늘날 모든 사무가 해이해진 것은 전적으로 기강이 서지 않았기 때문인데 기강을 세우려면 조정의 거조가 타당해야 하니, 그런 뒤에는 기강을 세우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서게 될 것입니다.”하고, 김흥근(金興根)은 아뢰기를,“지금 이 세 본(本)의 자전(慈殿)의 교서(敎書)는 광명정대할 뿐만 아니라 절실하고 긴요한 내용이니, 바로 옛날 서경(書經)의 모훈(謨訓)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이를 마음 깊이 새겨 잊지 않는다면 정치와 교화는 자연히 원만하게 되고 학문도 저절로 고명하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한가할 때마다 항상 받들어 보소서.”하고, 김좌근(金左根)은 아뢰기를,“대왕대비께서 친히 성상에게 준 훈계는 바로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요점입니다. 삼가 받아들여 마음에 깊이 새겨 잊지 않는다면 성덕(聖德)이 날로 성취되고 정치와 교화도 날로 잘 높아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항상 스스로 명심하고 잠시도 잊지 마소서.”하고, 조두순(趙斗淳)은 아뢰기를,“이번에 내린 자전의 훈계는 바로 서경의 전모(典謨)입니다. 한 글자나 반 구절이라도 아침저녁으로 장엄하게 암송하소서.”하였다.

등극 교문(登極 敎文)에, “국왕(고조 광무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이 차마 이런 재앙을 내려 갑자기 큰 변고를 당하였지만 왕위는 잠시라도 비워둘 수 없는 것이다. 자전(慈殿: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의 교지를 받들고 삼가 법도를 따라서 이제 이를 반포하는 바이다. 크게 생각하건대 우리 왕조가 태평함을 이룬 것은 진실로 성신(聖神)께서 계승한 덕분이니, 깊은 명철함은 상서로움을 드러내어 6, 7대의 성인이 이어서 나타난 것은 은(殷) 나라와 비슷하고 심원한 사려로써 터전을 닦아 억만년의 복된 운수를 지닌 것은 주(周) 나라와 다름이 없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대행대왕(大行大王)께서는 슬기로운 자질을 타고나 높은 자리에 오르고 온순하고 선량하며 공손하고 검소하고 소박한 검박(儉朴)하여 세숫대야에까지 경계하는 글을 새겨 넣어서 성인의 수양을 쌓았으며 잠저(潛邸)에 있다가 대궐로 들어온 다음에는 백성들이 노래를 불러 칭송하고 송사(訟事)를 해결해 달라고 몰려들었다. 발을 치고 의로운 하교를 받든 것은 네 조목의 좋은 의견이며 국왕의 글씨와 그림을 보관하는 존각(尊閣)에 높이 쌓아놓은 것은 열조(列祖)의 교훈이었다. 정성을 다하여 뜻을 봉양하여 여러 차례 옥검(玉檢)을 올리고 세 번 만세를 부르는 의식을 거행하였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종신토록 추모하여 서둘러 영원한 터전이 될 곳으로 능을 옮겼다. 젊은 나이에 상중에 있었으나 예절을 법대로 지켰으며 밤중까지 정사에 골몰하니 춥고 더운 데 따라 달라지는 백성들의 숨은 사정도 살피는 데에 이르렀다. 구렁텅이에 굴러 떨어졌던 무리들을 자리 위로 올려 앉히니 빈궁(貧窮)한 층에도 은혜가 미쳤고, 시골로 돌아간 인재들을 불러내니 어진 사람을 찾는 것이 마치 목마를 때 물을 찾듯 하였다. 조상의 공적을 백 년을 계기로 기념하여 더욱 드러나게 하자 온 나라가 기뻐하였고 중국에서 잘못 기록한 선대의 사실을 세 건이나 모두 바로잡았으니 역사책에 광채가 났다. 여러 번 상서로운 현상이 있은 것은 훌륭한 시대라는 것을 알린 것이며 여덟 글자의 아름다운 칭호는 평생의 업적을 표시한 것이었다. 14년 간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누구나 성인이 나타난 것을 우러렀다. 이 때문에 수천 리 우리나라 백성들은 항상 나의 임금이 탈이 없기를 축원하였다.

조심한 보람도 없이 우연한 병에 걸려 마침내 다시 일어나지 못할 줄 누가 생각하였겠는가? 땅이 꺼진 듯 하늘이 무너진 듯 40살도 채 안 된 나이에 슬픔을 그지없이 자아냈다. 폭풍이 몰아치는 듯 우레가 우는 듯 나라 형편이 한 오리의 실처럼 위태로워진 것이 더욱 기막혔다. 우리 집안에 상사가 나자 친부모를 여읜 듯이 백성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태묘 사직을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나라에 어찌 하루라도 임금이 없을 수 있겠는가?나는 영조(英祖)의 방계(傍系)이지만 인조(仁祖)에게는 직계 후손이다. 나누어진 지 5대가 되어 정조(正祖)의 형제간의 지극한 우애를 받았고 한 집안의 정의로 순종(純宗)의 보살핌을 입었다. 목릉(穆陵)의 고사(故事)를 추술(追述)하여 대궐로 들어갔고 대왕대비의 전교를 따라서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으니 옛 절차 그대로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계해년(1863) 12월 13일에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고 중궁전(中宮殿)을 대비전(大妃殿)으로 높였다. 이리하여 종실(宗室)의 계통은 길이 안정되었지만 이로부터 만백성의 기대는 바야흐로 간절해질 것이다. 축하를 위해 관리들이 모여든 대궐문에 나서서는 면류관(冕旒冠)과 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굽어보면서 괴로운 느낌을 금하지 못했으며 조회를 위해 관리들이 모여든 대궐 뜰에 나서서는 옥새를 어루만지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금치 못했다. 선왕들의 혼령이 위로 올라가서 하늘을 섬기고 아래로 내려와 백성들을 보살피면서 분주히 수고하는 것을 생각해서라도 화순하고 근신하며 어진 이를 친근히 해야 하지만 변변치 못한 내 자질로서 어떻게 내 몸을 잊어버리고 백성들만 위하는 간고한 일에 투신할 수 있겠는가? 내가 왕위에 오른 첫날에 널리 반포하는 것이니, 너희 온 나라 사람들은 다 함께 들으라. 살리기 좋아하는 우리 자성의 어짊을 체득하여 마땅히 힘써 넓고 크게 해야 하므로 백성에게 혜택을 넓히는 전례(典禮)를 미루기로 하였다. 이에 널리 포용하는 은전(恩典)을 보여 이달 13일 새벽 이전의 잡범(雜犯)으로 사죄 이하를 모두 사면(赦免)하라. 아! 깊은 못가에 서 있은 것처럼 얇은 얼음을 디디는 것처럼 조심하여 나라의 터전을 태산(泰山) 반석(盤石)과 같이 공고하게 다져야 할 것이다. 하늘에서 지혜를 내리고 복을 내리는 것도 다 처음에 달려 있으니, 오직 하늘이 훈계하는 대로 따라야 할 것이며 백성들도 이런 도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는 것이니, 의당 다 알도록 하라.”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 윤치정(尹致定)이 지었다.

수렴 교문(垂簾 敎文)에, “국왕(고조 광무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진실로 어떤 때인가? 대왕대비(大王大妃)의 밝은 명을 받들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우리 왕실에는 예가 있어 떳떳한 규례를 따라서 수렴(垂簾)하였다. 아아! 오늘날 슬프게도 하늘에서 재앙을 내렸건만 동조(東朝:대왕대비)께서 능히 태묘(太廟)와 사직(社稷)을 튼튼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어린 임금이 첫 정사를 시작하는 데에 모후(母后)와 함께 처결하는 것은 응당 있는 일이다. 송(宋) 나라 선인태후(宣仁太后)의 업적을 상고해 보면 여자로서 요(堯)나 순(舜)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또 우리 조상 때의 옛일을 상고하더라도 예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성종이 즉위한 후에도 7년간 섭정한 세조의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와 순조가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전례를 그대로 따른 것뿐이다. 나라가 위급한 경우에도 부인의 힘으로 능히 진정하게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대궐 안에서 곤룡포(袞龍布)와 면류관(冕旒冠)의 위엄을 높이는 것은 은밀한 도움을 널리 드러내는 것이다. 위태로운 형세를 평온하게 하는 데에는 이미 옛사람이 해 온 방도가 있으니 후대의 임금들도 그것을 본받는 이외에 다른 길을 찾을 까닭이 없다. 뜻밖에도 하늘이 이런 재앙을 내렸지만 어떻게 차마 선대 임금들의 제사조차 받들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만 앉았겠는가? 임금의 상사(喪事)로 지극한 슬픔이 산천을 뒤덮고 있기는 하지만 왕위를 물려주는 문제가 너무도 엄하기 때문에 자전께서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변에 갑자기 대궐로부터 마중을 받고 들어왔으며 조종(祖宗)의 혼령이 하늘을 섬기고 사람들을 보살피느라고 위아래로 다니면서 분주히 수고하는 것을 생각하여 태묘와 사직을 담당해 나섰다. 왕실의 정통을 잇고 대왕대비를 높이 받들어야 하겠지만 과인이 너무나 어려서 모든 이치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높은 데서 떨어지기라도 할 듯이 매사에 조심하여 어려운 고비를 뚫고 나가지 않을 수 없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효유헌성선경정인자혜대왕대비전하(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大王大妃殿下)는 마음가짐이 연못처럼 깊고 덕이 땅처럼 두터울 뿐만 아니라 자랄 때의 높은 교양이 명가(名家) 출신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니, 주(周) 나라의 태임(太任)과 태사(太姒) 같은 성녀(聖女)로서도 미치지 못할 바였다. 영고(寧考:문조익황제)께서 대리로 정사를 처결하던 날에는 안으로부터 도움이 컸고 헌종(憲宗)이 생존해 계실 때에는 어머니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부지런하고 검박하여 온 대궐 안을 이끌어갔으며 명성도 높고 인망도 높아 백성들이 누구나 칭송하였다. 왕비나 왕대비로서 그와 업적을 다툴 사람이 없으니 금보(金寶)와 옥책(玉冊)으로 여러 번 높이는 칭호도 받았다. 오랜 교화 아래 아름다운 풍속이 이루어졌고 그것을 기록하는 붓도 광채가 났으며 근심스럽고 슬픈 일을 두루 지내오는 과정에는 참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건만 한 번 세운 지조는 더욱 굳어져만 갔다. 지난날과 같이 정사가 잘될 때에도 오히려 힘을 빌었거늘 오늘날처럼 나라 형편이 어려운 처지에서 어떻게 도움을 청하지 않겠는가? 온 나라가 똑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에 커다란 공로와 업적이 있는 임금의 조상인 열조(列朝)의 성전(成典)을 상고하여 위아래가 슬픔으로 경황이 없는 때에 감히 작은 정성을 외람되게 진달하였다. 내 몸을 잊어버리고 백성들만 위해야 하는 간절히 권하여 말하는 간고(懇告)한 일에 투신할 결의를 다지고 다행히도 옛날의 절차를 다시 적용하라는 허락을 받았다. 어머니의 도리에 임금의 도리까지 겸하게 되니 대왕대비의 지극한 자애를 겹쳐 받게 되었고, 하늘의 마음은 사람들의 마음이 반영되는 것이니 나라는 태산(泰山) 반석(盤石)같이 튼튼하게 되었다. 이제 백성들이 받들고 나갈 데가 있으니 소자(小子)는 팔짱을 끼고 앉아 따라가기만 하려고 한다. 아! 그 높은 덕에 대해서 백성이 무엇이라고 형용하기 어려울 것이지만 오직 하늘에서 응당한 도움을 내려 줄 것이다. 깊숙이 들여다보이는 발 안에서 태묘 사직을 편안하게 한다면 앞으로 만년토록 뻗어나갈 것이며, 영특하고 슬기로운 선대의 업적을 뒤이어 온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관대한 태도로 임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잘 알리라 생각한다.”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 윤치정(尹致定)이 지었다.
2012-11-18 07: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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