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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 금천교(禁川橋)
icon 김민수
icon 2012-10-28 20: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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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 금천교(禁川橋)




조선국(朝鮮國:1392-1897) 15대 국왕 광조(묘호 추상)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廢黜)시킨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은 1617년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하여 인왕산(仁王山) 아래 현 서울시 종로구 필운동,체부동,인왕동,장동,누각동 지역에 궁궐을 창건하면 태평성대가 온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조선국 15대 국왕 광조는 인왕산(仁王山) 아래의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16대 국왕 인조(仁祖)의 아버지 추존 국왕 원종(元宗)의 사저 북쪽에 인경궁(仁慶宮)을 지었다. 1618년 4월 4일 조선국 15대 국왕 광조(묘호 추상)가 전교하였다.“인경궁의 홍정전(弘政殿)과 광정전(光政殿)을 장차 청와(靑瓦)로 덮고 근정전(勤政殿)의 예에 따라 단청에 쓰는 진한 채색으로 칠하려 하니 특별히 더 자세히 살펴 아뢰도록 하라. 그리고 외방에서 올려 보낸 은자(銀子)를 이번에 부경(赴京)하는 세 차례 사신 행차에 따라가는 화원(畫員)들에게 똑같이 나눠주어 채색(彩色)을 골라 무역해 오도록 하라고 도감에 이르라.”4월 9일 전교하였다.“인경궁(仁慶宮)의 정문(正門)은 돈화문(敦化門)의 예에 따라 층문(層門)으로 조성하고 경덕궁(慶德宮)은 그저 잠시 피해 거처하는 피우처(避寓處)일 뿐이니 단층문(單層門)으로 알아서 조성하도록 하라. 그리고 봉상시를 옮겨 설치하는 일은 곧바로 급히 처치했어야 마땅한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결정하지 않았는가. 속히 의논해 처치하라고 도감에 이르라.”4월 28일 영건도감이 아뢰기를,“황와(黃瓦)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석자황(石雌黃)을 창졸간에 많이 구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시기에 맞춰 구워내야만 장마가 닥치기 전에 홍(弘)·정(政) 등 양전(兩殿)의 지붕을 덮을 수가 있는데 여러 곳에서 무역해 얻는 숫자가 매우 약소한 데다 무역해 올 즈음에 걸핏하면 열흘이나 한 달을 넘기기가 일쑤입니다. 그런데 잡물소(雜物所)와 채색소(彩色所)에서 입수하여 구비해 놓은 숫자가 상당히 많은데 용도가 급하지 않다 하니 10여 근(斤)을 우선 가져다 쓰고서 선득리(宣得李)가 무역해 오면 빌린 만큼 상환(償還)토록 했으면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윤4월 16일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아뢰기를,“전교하시기를 ‘인경궁(仁慶宮)에 금천교(禁川橋)를 들일 경우 철거해야 할 각사(各司)와 인가의 수 및 집 주인의 성명을 서계(書啓)하고, 금천교를 들이지 않을 경우 철거해야 할 각사와 인가의 수 및 집 주인의 성명을 일일이 그림으로 작성해서 임금에게 상주(上奏)하는 녹계(錄啓)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금천교를 궐내에 들일 경우에는 당연히 물려서 쌓아야 하는데 그때 담 내외로 철거해야 할 인가는 모두 76호(戶)입니다. 그리고 궐내로 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별로 물려서 쌓을 일은 없고 단지 어로(御路)만 새로 만들면 되기 때문에 철거해야 할 집은 34호입니다. 상기 두 조목에 대해 모두 녹계드립니다.”하니, 답하기를,“알았다. 인경궁(仁慶宮)에 금천교(禁川橋)를 들여서 짓지 않는다면 보기에 형편없을 듯하니,승려 성지(性智)와 술사(術師) 시문용(施文用)에게 자세히 물어보고서 좋은 쪽으로 선처하도록 하라.”하였다. 6월 19일 인시(寅時) 초에 왕이 인경궁(仁慶宮)에 가서 공사의 진행 과정을 살피고 형세를 두루 훑어보면서 공사 일정을 독촉한 뒤 해가 지자 환궁하였다.1622년 12월 3일 전교하기를,“인경궁(仁慶宮)의 못을 판 곳에 경회루(慶會樓)의 제도에 따라 조성하되 높이와 크기는 경회루처럼 할 필요 없이 간략하게 하나의 누대(樓臺)를 지어 조정 신하들을 접견하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며 무사들을 시험보이는 장소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 담당 제조 박홍도가 내일 그곳에 가서 중사(中使) 및 성지(性智)와 상의하여 아뢰도록 할 것을 도감에 이르라.”하였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증살(蒸殺)하고 경운궁(慶運宮)에서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하고 1618년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廢黜)시킨 광조는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폐위되었다. 선왕들의 후궁(後宮)들이 거처하는 수성궁(壽聖宮),자수궁(慈壽宮) 남쪽에 창건한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은 1616년 인왕산의 왕기(王氣)를 누르기 위해 피우처(避寓處) 경희궁(慶熙宮)과 남북으로 이어서 인왕산(仁王山) 아래에 창건되었으며 정전인 흥정전과 편전 광정전,내전 청와전,흠명전,화정당이 있었고 광조가 인경궁을 창건하는 과정에서 단절되었던 청기와 굽는 기술을 되살렸다. 청와(靑瓦)는 조선시대에 궁궐에서도 정전이나 편전 등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하였고 현존하는 청와(靑瓦) 건물도 창덕궁 선정전이 유일하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경복궁의 침전(寢殿),궁문(宮門),경회루(慶會樓)를 청와(靑瓦)로 이으려 하였고 창경궁의 인양전과 명정전 등을 청와(靑瓦)로 이으라는 하명(下命)도 있었다. 경복궁의 침전은 청와(靑瓦) 조각이 발굴된 바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15대 국왕 광조에 의한 궁궐 영건 당시 서궁 인경궁에 청와(靑瓦)건물이 3동 지어졌는데 인조 대에 훼철되면서 창덕궁 선정전,경훈각,창경궁 통명전으로 이건되었다. 광조 대에는 역관(譯官) 방의남(方義男)이 중국에서 황와(黃瓦), 청와(靑瓦) 제조법을 배워와 황와(黃瓦), 청와(靑瓦)가 제작, 궁궐건축에 사용되어 국왕의 귄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조형물로 여겨졌다. 궁궐 이외에 청와(靑瓦)가 사용된 곳은 조선 전기에는 원각사(圓覺寺),세검정(洗劍亭) 북쪽 사찰 장의사(藏義寺), 탕춘대(蕩春臺)와 같이 왕실 관련 불교사찰이나 국왕이 행차하던 명승지에 조선 후기에는 관왕묘(關王廟),영은문(迎恩門) 등에 청와(靑瓦)가 쓰였다.

청와(靑瓦)는 7대 국왕 세조,10대 국왕 연조,15대 국왕 광조 대에 생산되어 사찰과 궁전 건축에 사용되었으며 선정전(宣政殿)은 조선 국왕이 평소에 정사를 펴던 편전으로 조선시대 궁궐에서 유일하게 청와(靑瓦)가 남아 있는 건물이고 1830년에 그려진 동궐도에 의하면 선정전 지붕이 초록색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조는 1461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방대한 양의 불전(佛典)을 번역, 간행하고 원찰(願刹) 원각사(圓覺寺)를 건설하면서 법당 지붕용으로 8만 장이나 되는 방대한 량의 청와(靑瓦)를 생산케 했다. 청와(靑瓦) 제조 방법은 세종실록에 1438년 8월 15일 승지 허후(許詡)가 아뢰기를, “근일 청와(靑瓦)를 구워 만들려고 선군(船軍)을 징발하였다 하옵는데, 신은 생각하옵기를, 근정전(勤政殿)은 이미 빈객을 접대하는 곳이 되어 있으므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좋을 것이오나, 대내의 침전(寢殿) 등의 여러 궁전이야 기와를 고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 청와는 노력과 비용이 적지 않게 들고 염초(焰硝)로 만드는 것이온데, 염초는 곧 군수(軍需) 물자이며 달이기도 몹시 어려운 것입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옵기를, 이 역시 할 필요가 없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하니, 임금은 묵연(默然)한 채 대답하지 아니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예종실록에도 1468년 9월 11일 예종이 승정원에서 전지를 받들어 강원도 관찰사 김관(金瓘)에게 치서(馳書)하기를,“청와(靑瓦)에 쓰이는 금성현(金成縣)의 연철(鉛鐵)은 단지 채취한 것만 올리고 다시 캐지 못하게 하라.”하였다.라고 적었으며 연조실록에는 1506년 8월 3일 함경도 단천에서 바친 납 6,900근에서 은을 제련해 낸 연슬러그로 청와(靑瓦)를 만들게 했다’고 적었다.

청와(靑瓦)의 기본원료인 찰흙의 크기는 0.01밀리미터 이하의 점토질로 재료가 미세할수록 팽창성과 수축성이 적어지면서 균열이 적어진다. 청와(靑瓦)의 원료로 염초(焰硝)를 사용하는 것은 현대의 질산칼륨을 말하고 질산칼륨의 용융점(鎔融點)은 330도로 화합물의 용융점을 낮추는 작용을 할 뿐만 아니라 흡수성이 적어 녹여지는 화합물이 골고루 융합되게 함으로써 기와의 표면을 고르고 매끄럽게 만든다. 납과 아연이 상당량 포함되어 있는 연슬러그(납 찌꺼기 덩어리)는 청와(靑瓦)의 푸른 색깔을 내는 원료이다. 납은 푸른색이 흰색과 조화된 유연한 금속으로 용융점(鎔融點)이 327〜400도에 불과하지만 알칼리와 철산화물 등이 들어있는 고령토(高嶺土)와 연슬러그(납 찌꺼기 덩어리)를 섞어 만든 유약으로 기와 표면에 발라 1,000-1,150도에서 소성(燒成)하면 청와(靑瓦)의 푸른색이 나타난다.조선국 16대 국왕 인조(仁祖)는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의 전각을 철거하여 창경궁에 이건하였고 인경궁은 영조 대에 완전 철폐되었으며 1623년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여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한 인조는 인조 8년(1630) 인경궁(仁慶宮)에서 폐출(廢黜)된 영창대군의 어머니이며 조선국 14대 국왕 선조(宣祖)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풍정(豊呈)의례를 거행하였고 조선국 15대 국왕 광조(묘호 추상)에 의해 경운궁(慶運宮)애서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으로 폐출(廢黜)된 인목대비(仁穆大妃)는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昇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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