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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태조 고황제 개경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
icon 김민수
icon 2012-10-16 09: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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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태조 고황제 개경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






1392년 7월 17일 고려국 34대 국왕 공양왕(恭讓王:재위 1389 ~ 1392)이 선위(禪位)하여 대한국 태조 고황제(추존)가 개경(開京) 수창궁(壽昌宮)에서 고려국 왕위에 올라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가 되었다. 이보다 먼저 이 달 12일에 공양왕(恭讓王)이 장차 태조의 개인 소유의 집 사제(私第)로 거둥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태조와 더불어 동맹(同盟)하려고 하여 의장(儀仗)이 이미 늘어섰는데 종1품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王大妃)에게 아뢰었다.“지금 왕이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社稷)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으니 이를 폐하기를 청합니다.”마침내 왕대비의 신하에게 관직(官職)·관작(官爵)·자격(資格)·시호(諡號)·토지·노비 등을 내려주는 명령 교지(敎旨)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남은(南誾)이 드디어 종2품 문하 평리(門下 評理) 정희계(鄭熙啓)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북천동(北泉洞)의 시좌궁(時坐宮)에 이르러 교지를 선포하니 공양왕이 부복(俯伏)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하면서 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리었다. 마침내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原州)로 가니 백관(百官)이 임금을 상징하는 전국(傳國)의 옥새(玉璽)를 받들어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두고 모든 정무(政務)를 나아가 품명(稟命)하여 재결(裁決)하였다.



13일에 대비(大妃)가 교지를 선포하여 태조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 16일에 배극렴과 조준이 정도전·김사형(金士衡)·이제(李濟)·이화(李和)·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남은(南誾)·장사길(張思吉)·정총(鄭摠)·김인찬(金仁贊)·조인옥(趙仁沃)·남재(南在)·조박(趙璞)·오몽을(吳蒙乙)·정탁(鄭擢)·윤호(尹虎)·이민도(李敏道)·조견(趙狷)·박포(朴苞)·조영규(趙英珪)·조반(趙胖)·조온(趙溫)·조기(趙琦)·홍길민(洪吉旼)·유경(劉敬)·정용수(鄭龍壽)·장담(張湛)·안경공(安景恭)·김균(金稛)·유원정(柳爰廷)·이직(李稷)·이근(李懃)·오사충(吳思忠)·이서(李舒)·조영무(趙英茂)·이백유(李伯由)·이부(李敷)·김로(金輅)·손흥종(孫興宗)·심효생(沈孝生)·고여(高呂)·장지화(張至和)·함부림(咸傅霖)·한상경(韓尙敬)·황거정(黃居正)·임언충(任彦忠)·장사정(張思靖)·민여익(閔汝翼) 등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국새(國璽)를 받들고 태조의 저택(邸宅)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마을의 골목에 꽉 메어 있었다.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가 홀로 기뻐하지 않으면서 얼굴빛에 나타내고 머리를 기울이고 말하지 않으므로 남은이 이를 쳐서 죽이고자 하니 전하가 말하기를“의리상 죽일 수 없다.”하면서 힘써 이를 말리었다. 이날 마침 족친(族親)의 여러 부인들이 태조와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를 알현하고 물에 만 밥을 먹는데 여러 부인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하여 북문으로 흩어져 가버렸다.



태조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해 질 무렵에 이르러 극렴(克廉)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내정(內庭)으로 들어와서 국새(國璽)를 청사(廳事) 위에 놓으니 태조가 두려워하여 거조(擧措)를 잃었다. 이천우(李天祐)를 붙잡고 겨우 침문(寢門) 밖으로 나오니 백관(百官)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萬歲)를 불렀다. 태조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니 극렴 등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였다.“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은 위로는 사직(社稷)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 뿐입니다. 고려국은 시조(始祖)가 건국(建國)함으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5백 년이 되었는데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때에 권력을 잡아 힘이 있는 신하 권신(權臣)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자기의 총행(寵幸)을 견고히 하고자 하여 거짓으로 요망스런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를 공민왕의 후사(後嗣)라 일컬어 왕위를 도둑질해 있은 지가 15년이 되었으니 왕씨(王氏)의 제사(祭祀)는 이미 폐(廢)해졌던 것입니다. 우(禑)가 곧 포학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고 죄 없는 사람을 살육하며 군대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공(公)이 맨 먼저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천자(天子)의 국경을 범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사를 돌이키니 우(禑)는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두려워하여 왕위를 사양하고 물러났습니다. 이에 이색(李穡)·조민수(曹敏修) 등이 신우(辛禑)의 처부(妻父)인 이임(李琳)에게 가담하여 그 아들 창(昌)을 도와 왕으로 세웠으니 왕씨(王氏)의 후사(後嗣)가 두 번이나 폐(廢)해졌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왕위(王位)로써 공(公)에게 명한 시기이었는데도 공은 겸손하고 사양하여 왕위에 오르지 아니하고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했으니 거의 사직(社稷)을 받들어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전일에 신우(辛禑)의 악(惡)은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인데 그 무리 이색·우현보(禹玄寶) 등은 미혹됨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하고 신우(辛禑)를 맞아 그 왕위를 회복할 것을 모의하다가 간사한 죄상이 드러나매 그 죄를 모면하려고 하여 그 무리 윤이(尹彝)·이초(李初) 등을 몰래 보내어 중국에 도망해 들어가서 고려국이 이미 배반했다고 거짓으로 호소하고는 황제의 아들이나 형제 친왕(親王)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장차 고려국을 소탕하고자 하였으니 그 계책이 과연 행해졌다면 사직(社稷)은 장차 폐허(廢墟)에 이르고 백성도 또한 멸망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것을 차마 하는데 무슨 일을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간관(諫官)과 헌사(憲司)가 소(疏)를 번갈아 올려 계청(啓請)하기를 ‘이색·우현보 등이 사직(社稷)에 죄를 얻고 백성에게 화(禍)를 끼쳤으므로써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되겠습니다.’ 하여 글이 수십 번 올라갔는데 정창군(定昌君:공양왕)은 혼인(婚姻)으로 생기는 친척 인아(姻婭)의 관계라는 이유로써 법을 굽혀 두호(斗護)하여 언관(言官)을 곤장을 쳐서 쫓으니 이로 말미암아 간사한 무리들이 중앙과 지방에 흩어져 있으면서 더욱 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김종연(金宗衍)은 도피 중에 있으면서 당(黨)을 결성하여 난리를 꾀하고 김조부(金兆府) 등은 안에 있으면서 그 변(變)에 응하기를 도모하여 화란(禍亂)의 일어남이 날마다 발생하여 그치지 않았는데 정창군(定昌君)은 사직(社稷)과 백성을 위하는 큰 계책을 돌보지 아니하고 사사의 은혜를 베풀어 인망(人望)을 수습하고자 하여 다만 법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모두 용서해 주고 곡진히 더 탁용(擢用)하였으니 서경(書經)의 이른바 ‘달아난 죄수를 수용하는 괴수가 되어 물고기가 연못에 모이듯 짐승이 숲에 모이듯 한다.’는 것입니다. 도와서 왕을 세울 계책을 결정한 것으로써 말한다면 공로가 사직(社稷)에 있으며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군사를 돌이킨 것으로써 말한다면 덕택이 백성에게 가졌는데도 이에 좌우에 있는 부인(婦人)과 내시부의 관원 환자(宦者)의 남을 해치려고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에게 일러바치는 참소(讒訴)를 지나치게 듣고서 반드시 죽을 곳에 두려고 하고 사람들이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또한 모두 죄를 주니 참소하고 아첨한 무리들이 뜻대로 되고 충성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기(氣)가 꺾여져서 정치와 형벌이 문란하여 백성들이 그 수족(手足)을 둘 데가 없었습니다. 하늘이 견책(譴責)하는 뜻을 알려서 성상(星象)이 여러 번 변하고 재앙의 징조인 요얼(妖孽)이 번갈아 일어나니 정창군(定昌君)도 스스로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백성의 마음이 이미 떠나가서 사직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음을 물어 알고 물러나와 사제(私第)로 갔습니다. 다만 군정(軍政)과 국정(國政)의 사무는 지극히 번거롭고 지극히 중대하므로 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마땅히 왕위에 올라서 신(神)과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태조는 굳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예로부터 제왕(帝王)의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德)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하면서 마침내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부축하여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함이 더욱 간절하니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마지못하여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둥하게 되었다. 백관(百官)들이 궁문(宮門)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는데 어좌(御座)를 피하고 기둥 안에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이상의 관원에게 명하여 전상(殿上)에 오르게 하고는 이르기를“내가 수상(首相)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이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내가 만약 몸만 건강하다면 필마(匹馬)로도 피할 수 있지마는 마침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卿)들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덕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하였다. 이에 명하여 고려국의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에게 예전대로 정무(政務)를 보게 하고 드디어 저택(邸宅)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주면서 말하기를“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은 청렴하기는 하나 이미 늙었으며 고려 후기 각 도의 군대를 통솔하던 무관직 도통(都統) 최영(崔瑩)은 강직하기는 하나 조금 고지식하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룰 사람은 공(公)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하였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문밖에 이르러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말하기를“이것을 지리산(智異山) 바위 속에서 얻었습니다.”하는데 그 글에“목자(木子:이씨)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다시 삼한(三韓:고구려,백제,신라)의 강토를 바로잡을 것이다.”하고 또“비의(非衣:배씨) ·주초(走肖:조씨) ·삼전 삼읍(三奠三邑:정씨) ”등의 말이 있었다. 사람을 시켜 맞이해 들어오게 하니 이미 가버렸으므로 이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고려의 서운관(書雲觀)에 간직한 미래를 예언하여 은밀하게 적어놓은 기록 비기(秘記)에 ‘건목득자(建木得子)’의 설(說)이 있고 또 ‘왕씨(王氏)가 멸망하고 이씨(李氏)가 일어난다.’는 말이 있는데 고려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숨겨지고 발포(發布)되지 않았더니 이때에 이르러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또 조명(早明)이란 말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 뜻을 깨닫지 못했더니 뒤에 국호(國號)를 조선이라 한 뒤에야 조명(早明)이 곧 조선(朝鮮)을 이른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 의주(宜州:함경도 원산)에 큰 나무가 있는데 말라 썩은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개국(開國)하기 전 1년에 다시 가지가 나고 무성하니 그때 사람들이 개국의 징조라고 말하였다.



또 태조가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는 집 잠저(潛邸)에 있을 때 일찍이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의 개인 소유의 집 사제(私第)에 갔더니 복흥(復興)이 영접해 들이고 그 아내로 하여금 나와 보게 하면서 존경하는 뜻이 매우 지극했으며 또 그 자손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나의 어리석은 자손을 공(公)께서 장차 편들어 감싸고 보호하는 비호(庇護)해야 될 것이오니 공은 행여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하며 매양 태조를 대접하면서 반드시 특별히 높이었다. 태조가 혹시 무력을 써서 적이나 죄 있는 무리를 치는 정토(征討)로 인하여 밖에 나가면 복흥(復興)은 매양 고하기를“동한(東韓)의 사직(社稷)이 장차 손안에 돌아갈 것이니 전쟁의 괴로움을 꺼리지 말고 능히 나라를 지키는 공을 이루게 하시오.”하였다. 일찍이 운명(運命)을 점치는 상명사(相命師) 혜징(惠澄)이 사사로이 그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내가 사람들의 운명(運命)을 관찰한 것이 많았으나 이성계(李成桂)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하였다. 친한 사람이 묻기를“타고난 운명이 비록 좋더라도 벼슬이 이조의 으뜸 벼슬 총재(冢宰)에 그칠 뿐이다.”하니 혜징이 말하기를“총재(冢宰)라면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내가 관찰한 것은 군장(君長)의 운명이니 그가 왕씨(王氏)를 대신하여 반드시 일어나겠지!”하였다. 또 삼군(三軍)이 신경(新京:한양) 땅에서 사냥하는데 전하(殿下)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또한 갔었다. 노루 한 마리가 나오므로 전하가 달려가서 쏘아 화살 한 개에 죽이니 여러 왕씨(王氏) 10여 인이 높은 언덕에 모여 서서 이를 보고는 몹시 놀라서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기를“사람들이 이씨(李氏)가 장차 일어날 것이라고 많이 말하고 있는데 이 사람이 아닌가?”하고 또 왕위를 물려주고 생존해 있는 전대의 임금 상왕(上王)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을 그 사제(私第)에 가서 보았는데 이미 나가고 난 뒤에 인임(仁任)이 다른 사람에게 일렀다.“국가가 장차 반드시 이씨(李氏)에게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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