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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7주년인데 … 아직도 증조부 독립운동 명예 못찾아,
icon 파발마
icon 2012-08-02 11:5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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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7주년인데 … 아직도 증조부 독립운동 명예 못찾아,

독립운동가 후손 정병기씨 36년째 고투 ,통곡의 눈물 흘려야,
증조부 독립운동으로 일제 탄압감시,집안 풍비박산, 후손들 뿔뿔히 흩어져야


2012년 08월 1일(목) 12:25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정병기독립운동가후손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선조의 애국과 독립운동의 어려움 누구에게 말해야 하나? 일제의 모진 감시와 고문탄압으로 저승길 루비콘 강도 건너지 못하시고 구천을 맴돌아야 하는 신세 후손들만 알아야 하는 현실이다.

일제강점기 증조부님은 나라의 독립을 해야한다고 나선 독립운동으로 집안은 풍비박산나고 일제의 모진 감시와 박해 그리고 탄압으로 처와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갈라져 머습살이나 처가살이 등 힘든 인생살이에 시달려야 했다.배움에 길에서 멀어지고 가난과 헐벗음은 벗삼아 살아야 했다.이렇게 혹독하게 당하고 힘든 인생을 살아온 것은 누가 알겠는가?

지금의 광복절은 살아 남은 자들의 잔칫상이 되고 축제가 되고 말았지만 아직도 명예를 찾지못한 후손들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흐려야만 하는 광복절이 되고 말았으며, 그 후손들은 자손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죄책감에 살고 있다.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36년째 지루하고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정병기(55)씨.

그는 ‘광복 67주년’인 올해도 어김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다.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단서만 있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어느 곳이든 달려간다. 부양할 가족도 있고 몸도 성치 않지만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증조부와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을 조상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만 둘 수 없다.

정 씨는 “아버지와 친척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증조부인 정용선(1883년생) 선생은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정씨에 따르면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그의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 날아왔다.

정씨는 “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또 증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일가친척들이 증조부 이름을 족보에서 파버렸고 증조부가 실종된 후 일제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가족들이 나서서 증조모를 개가시켰다는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음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정황증거’라고 강조했다. 실제 호적등본을 보면 증조모는 독립투사의 아내였던 것을 감추기 위해 본명인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개명까지 했다. 그당시 설움과 어려움을 어찌 말이나 글로 말하겠는가?

그러나 일제가 만든 호적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병으로 사망했다는 제정호적기록 외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서류는 남아있지 않다. 유일한 것이 있다면 마포 경성형무소 표지석이 당시 수치스러운 민족의 역사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증조부(정용선 선생)께서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으신 곳이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는 물론 국가권익위원회 청와대에까지 서류를 안 내밀어 본 곳이 없지만 ‘객관적인 입증자료가 없어 독립유공자로 선정할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그는 국내에서 안되면 외국에서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에 1993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띄워 수형인 명부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주고 사오기도 했다. 일본 외무성에 수차례 서신을 띄우기도 했지만 안타깝게 결정적인 사료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지난해엔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까지 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정씨는 “일제시대 형무소 수형인 기록을 지난 80년 12월 실수로 모두 불살라버렸던 정부가 이제 와서 독립운동으로 수감됐다는 걸 증명할 문서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준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더욱이 일본 외무성은 1995년까지 조선인 수형인 명부를 보관했지만 우리 정부는 단 한번도 그 서류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정씨 할아버지는 인근 다덕금광에서 일하다 폐병으로 숨졌다. 정씨 자신은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지난 1980년 강도살인범을 붙잡다 부상을 당했다. 당시 후유증에 간경화로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다. 증조부 부친 그리고 본인 그리고 아들까지 4대가 나라를 위해 희생한 가족이다.

정씨는 “독립운동가를 찾는 일을 후손들에게만 떠넘기는 정부가 야속하지만 어디엔가 분명히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있을 거라 믿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역사적 진실은 세월이가고 시간이 가도 변치않을 것이다. 다만 밝혀지지않을 뿐이다. 발굴노력이 없기 때문에 잊혀지고 잃어린 애국이 될지 모르지만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살아 있다고 확신한다. 정부는 이번 광복절을 계기로 미발굴독립유공자와 경성형무소 옥자자 발굴에 역사적 진실을 바로 찾는변화가 되고 전기가 마련되기를 아울러 바란다.
2012-08-02 11:5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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