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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으로 옥사했다면 독립유공자 아닌가요?
icon 파발마
icon 2012-07-21 17:5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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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으로 옥사했다면 독립유공자 아닌가요?

증손자 증조부(경성형무소 옥사)독립운동 자료 찾아 36년 고군분투
일제강점기 당시 옥사기록 제출해도 더 많은 자료 요구하는 국가보훈처의 현실

저는 일제강점기 증조부의 독립운동으로 옥사하신 사연과 아픔이 있어 오늘날 까지 그 노력을 끈을 놓치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놓을수가 없습니다. 우리집안의 사정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이번 광복절을 즈음하여 방송으로 취재하여 미발굴독립유공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고 일제강점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치신 분들에 대한 자료발굴 노력을 통하여 그분들이 명예가 찾아지게 되기를 아울러 바랍니다. 이번 제67주년 광복절에 반드시 사연이 방영될수 있게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36년간을 증조부님 독립운동관련 자료를 찾고 노력하고 있는 정용선선생의 증손자 정병기입니다. 지난 증조부님의 명에를 찾기 위해 36년간 고군분투했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일제강점기 당시 악명높던 마포 공덕리 105번지 경성형무소에 대하여 태반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곳이 진정한 독립의 성지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곳 마포 경성형소는 장기수들을 분류 수형하며 모진고문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수형자들에게 강제노역으로 붉은 벽돌을 생산하던 곳입니다. 이번 광복절을 맞아 경성형무소에 대한 집중 취재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합니다. 저의 모든 자료를 공개하고 협조하겠습니다. 지난 2011년 2월28일 KBS1 시청자칼럼에 걍성형무소 역사관 건리을 해달라고 출연한바 있습니다. 다시보기로 보시면 참조가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2008년 8월14일 시청자칼럼에 증조부 독립운동 자료찾아 30년 고군분투로 출연한바 있습니다.

청와대 이명박 대통령에게 올린 편지사연을 여러번 올린바 있고 역대 정권에게도 동일한 사연을 호소한바 있습니다.증손자 증조부 독립운동 자료 찾아 36년 고군분투, 옥사기록 담긴 일제 당시 제정호적 인정하지 않는다니 말되나?






존경하는 이명박 대통령님 이것만은 꼭 현정부에서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애원도 해 보았습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통치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무시무시하고 악명 높았던 마포 공덕리105번지 경성형무소를 아십니까?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오기 힘들다던 곳입니다. 수형생활 중 모진 고문과 탄압 그리고 중형을 받은 죄수들을 붉은 벽돌을 생산하는 강제노역에 굶주림에 시달리다 거의 옥사하신 역사의 현장입니다.이곳에서 저의 증조부(정용선 선생)옥사하신 곳입니다. 아직까지 거증자료 부족이라나 하며 미해결 상태입니다. 후손의 입장에서 한번 깊이 생각하는 국민의 정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는 일제강점기 나라를 찾겠다고 군자금 항일운동으로 일제에 체포 악명높던 마포 공덕리 105번지 경성형무소에서 1928.5,20. 옥사하신 증조부(정용선선생)의 독립운동을 증명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찾아 36년을 고군분투하고 있는 증손자입니다. 관련사연이 청와대 게시판에도 수 십번 게재되고 애원한바 있습니다. 나라위한 고귀하고 숭고한 희생이 이렇게 잊어지거나 잃어버린 애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집안은 증조부 부친 저 그리고 아들까지 국가에 모두 희생을 한바 있으나 저만 국가유공자입니다. 현재 증조부사연은 국가보훈처에 서훈심사를 내고 있으나 거증자료 부족이라고 합니다. 당시 경성형무소가 불에 탔다고 합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서류나 수형관련 자료는 1980년 형의실효의관한 법률(관보) 소각하고나 폐기해 버렸기에 찾을 수도 없는 현실입니다.






제정호적에 옥사기록이 옥사하신 분까지 세심하게 되어 있는데 안된다고 하니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1980년 지방에 산재해있던 수형기록들이 관보에 의하여 소각시키거나 없애버렸답니다. 이런 책임도 후손이 져야 한다고 하니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께서 꼭 이러한 사연에 관심을 가져 주시고 해결하여 주신다면 자손된 도리를 다할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연을 보냅니다. 나라위해 받친 희생은 끝까지 정부가 책임을 지는 풍토가 정착 되어 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의 증조부님은 일제가 옥사 후 시신도 돌려주지 않아 산소도 없답니다. 저는 증조부사연이 언론과 kbs1 시청자칼럼에도 2회나 출연한바 있습니다. 꼭 좀 자손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기고>정부당국 미발굴독립유공자 발굴 특별위원회 설치해야






나라위해 받친 희생은 정부가 끝까지 책임지고 예우하는 풍토가 정착돼야



일제강점기 나라와 민족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받치고 옥사했지만 아직도 인정받지 못한 채 잃어버린 애국이나 잊어진 애국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묻히고 있어 안타깝고 슬프다. '미발굴독립유공자', 특별위원회 설치 반드시 필요하다! '미발굴독립유공자', 특별위원회 설치 필요하다! "나라 위한 희생은 정부가 끝까지 책임지는 풍토와 정신 정착되어야" 한다. 이제 늦은 감 있지만 정부가 직접 나서 미발굴독립유공자 문제 해결해야 할 것이다.








해가 바뀌고 정권이 바꾸어도 미발굴독립유공자 발굴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미발굴독입유공자의 후손으로서 지난 수 십 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착잡하기만 하다. 지난 36년간을 증조부 독립운동 자료 찾기에 동분서주했다. 일제강점기 일제에 항거하며 조국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건만 조국이 해방이 된지 67년째인 현재까지도 그들을 왜 아직도 버리고 있는가. 그 수많은 세월 속에서 미발굴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여전히 가슴을 치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국가보훈처 쇄신돼야 한다. 일제 땐 독립운동가 가족이란 이유로 모진 박해에 시달렸던 자손들은 해방 이후 상당수가 배움의 길에서 멀어졌고, 오늘날 가난 때문에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야 하는 형편이다. 이렇다 보니 대개는 선조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여유가 없다. 일부 자손이 관련 자료 발굴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많은 자료가 소실 또는 소각처리 되어 찾기가 매우 어렵다. 독립운동 관련 문서는 역사적 문서로 반영구적인 보존서류임에도 그 중요성이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고 개탄스럽다.






진정한 광복의 의미 찾기 위해서는 미발굴독립유공자 문제해결과 친일청산 우선돼야 한다. 자손이 자력으로 찾을 수 있는 자료는 그저 전해 오는 말이거나 호적에 형무소 수형 기록이 있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해당 부처인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수형인 명부나 당시의 재판 서류 등 무리한 상세자료를 요구하고 있다. 이제는 정부가 독립유공자 가족이 아니라는 자료를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반문하고 싶은 심정이다.






8.15광복의 기쁨과 3·1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진정한 민족의 광복절이 되려면 친일역사 청산과 독립유공자 발굴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정부가 앞장서 국내외에 흩어진 관련 자료 발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 대통령 직속의 특별위원회 설치를 고려해 보는게 어떤가 한다. 참여정부하의 과거사진상규명특별위원회 등과 같이 대통령 직속의 기관을 설치해 좌우익을 떠나서 일제에 항거했던 유공자들에 대한 발굴을 적극 지원하기 위해서다.






이는 과거 일제하 독립운동 자료는 국내에서는 거의 대부분 발굴이 된데 반해 미국 국립문서 보관소나 일본국 동경도서관, 또 중국 등에 보관된 자료들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제는 후손들 차원의 자료 발굴이 아닌 정부가 나서야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한번 강조하건데 올해만큼은 정부가 독립유공자 발굴에 나서 이 문제를 해결 해야만 할 것이다. 미발굴독립유공자 문제가 더 이상 방치하거나 지연해서는 안 되고 나라위한 희생은 정부가 끝까지 책임지는 풍토와 정신이 반드시 정착 되어야만 한다고 본다.






마포구 공덕동 105번지가 진정한 민족의 독립성지이다. 일제의 모진 탄압과 고문도 그리고 굶주림도 독립의지를 꺽지는 못했다. 수많은 무명의 애국지사 독립투사 숨결이 살아있고 호령하시던 목소리 담겨있는 곳 죽어서도 어찌 공덕리 경성감옥소를 잊겠는가? 이곳에 경성형무소 역사관 건립해서 후세들에게 역사의 현장 알려야한다. 일제 강점기 민족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수많은 애국지사 독립투사들이 일제의 모진 고문과 탄압 그리고 굶주림 잔악한 만행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한 역사의 현장이 역사의식 부재로 현재 서울서부지방법원 검찰청이 들어서 있다.






나라를 찾기 위한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이 역사 속에 묻혀가고 잊어버린 애국이 되고 있어 안타깝다. 정부 일부관료들의 역사의식부재로 친일청산을 가로막는 엄청난 오류를 범했다. 먼 훗날 후손들의 냉엄한 평가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정용선 증조부님은 이곳에서 41세의 젊은 나이로 경성형무소 1928년 5월 20일 오후 3시15분 옥사(제정호적 기록) 증손자 지난 36년 자료 발굴 노력 기울이고 있으나 쉽지 않아 가슴치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필자는 서울시 중랑구 중화동에 살고 있다. 필자는 증조부 정용선 선생께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시다 경성형무소에 투옥돼 옥사해 그동안 36년간 노력했으나 그동안 역사의식의 부재와 자료 관리의 허술함으로 인해 아직까지 거증자료 부족으로 공로를 인정받지 못해 국립묘지에 가묘도 안장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말이나 구호보다 실질적인 독립운동 자료발굴에 앞장서야 하며 올바른 식민지의 역사를 사실대로 가르쳐 과거를 교훈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금이라고 반드시 민족의 성지인 공덕동에 마포 경성형무소 역사관을 건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라사랑이나 애국은 빈말이나 구호가 아니라 실천이 우선돼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글쓴이/정병기<미발굴독립유공자 후손>





2012 임진년 새해소원은 독립운동하신 증조부님 명예 찾는 일







*증조부(정용선)鄭容善 인적사항



성 명: 정용선(鄭容善) 다른 이름은 족보에 의하면 정재열. 정차용 가명은 여러개가 있다고 하는데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출생년월일:서기1883년12월17일생(명치16년12월17일생)


본적지 : 경북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 391번지


거주지 : 대정3년 충청북도 청주군 양성면 도원리3통1호


대정4년 경북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7통10호


경북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1062번지


전국을 무대로 독립운동(독립자금 군자금)을 담당 하였다고 함 .


사망기록 : 제정호적에 소화3년5월20일 오후3시20분 경성형무소 감방 옥사


(서기1928년5월20일 오후3시20분 사망)형무소에서 통지하여 호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마포 경성형무소장 산출의 통지식 계출문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민원인 : 정병기 (鄭柄基) 관계: 정용선의 증손자


주 소 : 서울시 중랑구 중화동 300-49


전 화 : 010-5310-2953 이-메일 jbg1219@paran.com



내 용 : 지난 36년간 증조부(鄭容善)의 항일독립운동 자료발굴과 서훈신청을 한바 있으며


제정호적 (경성형무소 옥사기록 ) 담긴 자료발굴, 서훈신청한지 20년이 넘고


있는 현실, 그동안 연합뉴스 보도, 매일경제신문 보도, 서울신문 보도 한겨레


경기신문 ,경남매일신문, 각종 지방언론에 대대적으로 사연이 보도된바 있으며,


2008.8.14.kbs1 tv 시청장칼럼 출연 방송, 2011.2.28. .kbs1 tv 출연 방송,






저는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 하시다 체포되어 경성형무소에소 투옥 중 옥사하신 증조부(정용선 선생 1883~1928.5.) 사망하신 증조부의 독립운동 관련 자료발굴에 36년간을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신덕순 보좌관님께 저의 증조부사연에 대하여 사연과 자료를 보내 드립니다.







새해에는 반드시 나라와 민족의 독립운동을 하신 증조부님 명예를 찾아 가묘라도 국립묘지에 안장시켜 자손 된 도리를 다하는 일입니다. 지난 36년간을 증조부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찾는데 동분서주해 왔으나 아직까지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일제의 만행으로 시신조차 인수하지 못해 구천을 맴도시는 증조부님의 영환을 편하게 해드려야 하는 것이 자손 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새해에는 소만대로 좋은 일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증조부님의 독립운동으로 집안은 풍비박산 자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머슴살이나 처가살이를 전전해며 고생을 달고 살았답니다. 배움에서 멀어지고 살기에 고통스러웠으며 일제의 모진 감시와 탄압 그리고 박해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답니다. 누가 그런 고통을 알 수 있겠는가?






독립운동 하시다 사망하신 증조부의 명예를 찾고 싶습니다. 증조부님의 항일운동으로 집안은 풍비박산, 후손들은 머슴살이 전전하며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만 했답니다. 증조모님은 일제의 모진 고문과 압박 감시에 집안의 주선으로 성을 개명하여 인동장씨 집안으로 개가하셨답니다.(제정호적 인동 장씨 참조)지난 36년을 증조부님 독립운동 자료발굴에 힘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연을 관심 있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미발굴독립운동 하신 가족들 눈물겹게 자료를 찾고 있습니다. 사연과 자료를 살펴보시고 서훈을 받게 되어 자손 된 도리를 다할 수 있게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증손자라도 찾지 않는다면 끝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행정심판에 각종 사연이 언론에 공개되고 보도 되었어도 진전이 없는 증조부님의 옥사기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입니다. 정말 죽도록 나라위해 독립운동하신 독립운동가는 자손이 없거나 무지해서 찾지도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제 죽어서 그분들을 다 만나게 될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동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사망기록 호적이 있어도 인정해 주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고 야속한 심정입니다. 저는 조선일보의 집중 취재와 더블어 증조부의 고향이자 부친의 고향인과 국민 여러분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증조부님이 경북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에 살고 계시다가 독립운동으로 투옥되어 서울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하셨습니다. 증조부님의 명예회복을 통하여 자손도리를 다해야 되겠다는 신념과 의지로 여러분께 글을 올려 드립니다. 이제 증손자인 제가 찾지 않는다면 영원히 찾을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냥 사장되고 말 것입니다.






사망기록: 제정호적에 소화3년5월20일 오후3시20분 경성형무소 감방(서기1928년5월20일 오후 3시20분 사망)형무소에서 통지하여 호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국가유공자의 한사람으로 있는 고 정 용선 옹의 증손자입니다. 자나 깨나 증조부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지난 35여년 세월을 자료를 찾아 전국을 다니고 있습니다. 젊음을 국가와 민족의 광복을 위하여 받치신 증조부의 명예를 회복하여 자손 된 도리를 다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이러한 시실을 알고 계시거나 아시는 자료가 있으시다면 도움 좀 주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경성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사망한 기록이 제적등본에 자세하고도 세세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국가보훈처에서는 또 다른 자료를 요구하는 것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경형형무소가 6.25사변에 불이 나서 소실 된 것이 왜 가족들에 책임입니까? 그 자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힘없는 가족에게 자료를 요구하지 말고 국가보훈처에서 자료 발굴 노력을 경주하여 진정한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려는 노력을 기울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 제출된 자료에 대하여 덮어 놓고 방치하지 말고 관심을 가지고 자료에 대하여 다시한번 검증을 하여 주실 것을 아울러 간곡히 당부를 드립니다.






민원을 제기한 가족에 입장에서 한번 생각보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족들은 긴 세월동안 많은 풍지풍파와 고난의 세월을 살아왔음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많은 애국지사와 애국선열들이 흘림 피의 대가와 노력으로 오늘에 대한민국의 발전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국가보훈처장관님께서는 혹시 경성형무소인 현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보셨는지요. 그자리가 악명 높다던 경성형무소입니다. 저의 증조부께서 바로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신 자리이기에 일 년에 몇 번 그곳을 찾습니다. 가슴이 미어터지는 것 같고 분통이 터집니다. 가슴이 답답한 심정입니다.






이번에 저의 증조부 고 정용선 할아버지의 자료를 재검토하여 보시기를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국가보훈처에서 하는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구호만 요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관련 호적(제적등본)내용 살펴 힘없고 줄 없는 가족 발굴해야 되는지 알치신수 없는 일입니다. 없어진 자료를 내 놓으라고 하는 것은 잇을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독립운동 보상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저는 보상과는 아무상관이 없는 증손자입니다. 국가보훈처는 찾는 노력 하지 않고 가족들에게 짐 떠넘기는 형상 언제까지 하려나... 가족들이 제출하는 관련 서류 제대로 보지도 않고 묵살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제 부모 제조상 같으면 이렇게 하려나 싶은 심정이다. 앞으로 세심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것 같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치신 고 정용선 증조부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36여년째 증손자가 노력하고 있답니다. 제발 귀를 기울려 주셨으면 합니다. 남의 일로만 생각지 마시고 관심 가져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증손자도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가유공자랍니다. 저는 저의 증조부(고 정용선)독립운동에 대한 자료발굴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20여년을 노력해 왔습니다만 아직까지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정호적원부에 수형기록과 사망기록이 있슴에도 판결문을 찾지 못하여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정부의 결단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친은 문맹인으로 살고 계시며 평생 어렵게 할아버지도 일찍 일제 피박에 돌아가시고 고아 아닌 고아로 어렵게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신 분이십니다. 이미 저의 증조부자료에 대해서는 국가보훈처에 제출한지 오래이며 민족의 비극인 6.25사변으로 인하여 경성형무소가 소실되고 지방에 본적지 면사무소가 소실되어 더 이상의 자료를 수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번에 행정심판에서 각하의 된바 있습니다.






독립유공자 후손 시혜적 보훈정책 구조적 원인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가난 대물림과 배움기회 박탈, 또 계층 하락은 거꾸로 간 역사의 구조적 잘못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진정한 예우 차원이 아닌 시혜 차원에서 도입된 보훈정책도 가난·무지의 대물림을 고착화시켰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증손자 증조부 독립운동 관련자료 찾아 지난 36년 고군분투
작성자 정병기
작성일 2011-12-10 09: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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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정용선)의 호적 주소는


성명: 정용선 (일명 정 재열 정차용이라고도 불리어졌다고 합니다.)


출생년월일: 서기1883년12월17일생(명치16년12월17일생)


본적지 : 경북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 391번지


거주지 : 대정3년 충청북도 청주군 양성면 도원리3통1호


대정4년 경북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7통10호


경북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1062번지


전국을 무대로 독립운동(독립자금 군자금)을 담당 하였다고 함



사망기록: 제정호적에 소화3년5월20일 오후3시20분 경성형무소 감방(서기1928년5월20일 오후3시20분 사망)형무소에서 통지하여 호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꼭 저의 증조부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게 관심을 가져 주시고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이모든 것을 정부가 마땅히 해야 옳은 것 같은데 가족에게만 자료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일본인이 작성한 제정호적에 수형기록이나 옥사기록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호적을 검토하여 그에 해당하는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전국에 국민 여러분과 공직자 학자여러분의 관심과 참여에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증조부에 대한 관심을 어린 시절부터 가져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조상의 의로운 애국정신을 밝히고 바로세우기 위한 노력을 지난 36년간 노력하여 왔으나 독립운동 자료 찾기가 당시 독립운동 하기보다 어렵다는 현실을 직감하게 되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왔습니다. 그동안 연합뉴스. 매일경제신문 서울신문, 브레이크뉴스 천지일보 경남매일 양평백운신문 등 kbs1 tv 등 기타에 많이 보도되고 한바 있고 행정소송 등 국가보훈처에 심사를 수 십 차례 의뢰한바 있으나 거증자료부족과 자료를 후손들에게 찾아오라고 하는 현실입니다. 일제강점기 중죄인들이 수감되는 경성형무소(현 서울 마포구 공덕동 서부지원자리)에서 옥사하셨다는 제정호적에 계출문이 기록되어 있어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광복 제66주년이 오고해도 나라위한 고귀한 희생이 잊어지고 묻혀 지며, 버림받는 애국이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되며 반드시 후손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바로세우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계에 이르고 있어 눈물만 납니다. 1928년5월20일 오후3시20분에 경성형무소 병사했다는 기록이 제정호적에 기록되어 관리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인정해 주지 않는지 답답한 심정입니다.






전사자 5천원 보상금사건 교훈삼아 일제강점기독립운동 옥사자 정부책임지고 해결해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고귀하고 숭고한 희생은 정부가 책임져야 마땅하다. 일제강점기 독립투사가 중범으로 수용되었던 경성형무소역사박물관 건립해야 정부가 앞장서 역사 속에 묻혀가고 있는 미발굴독립유공자 발굴과 서훈이 내려져야 한다. 증조부(정용선)1928.5.20. 마포 공덕리 경성형무소옥사/항일독립운동 체포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침략으로 한일병탄을 당할 때 오로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독립투쟁을 하며 일평생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위해 노력하거나 희생을 당했으며, 체포돼 끝까지 옥중에서 투쟁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사형 또는 일제의 만행과 손에 의해 처형을 당했다.











나라를 다시 찾은 지 91주년이 지났지만 미발굴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가 제대로 반영되거나 이루어지지 않아 그 후손들이 가슴을 치거나 눈물을 흘리고 있어 안타깝고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후손들은 일제들에 의해 혹독한 탄압과 고문 그리고 감사와 홀대, 냉대로 어려움이 말로 할 수 없었으며, 가난으로 대물림돼 배움의 길이나 사회진출의 길에서도 소외당하며 현재에 이르렀기에 매우 열악한 생활을 하며 지내왔던 것이 사실이다.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후손이 없거나 모두 집안이 소멸되는 등 생활고에 항상 노출돼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는 우리민족을 말살하고 영구적인 식민지로 통합하려 획책하며, 인력과 자원을 수탈해갔다. 독립운동가들은 목숨을 담보로 국권을 되찾은 광복을 일궈냈지만 빛도 그림자도 없이 일제의 총칼 앞에 체포돼 오랜 구금이나 수형생활 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옥중에서 병사를 했던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보니 지금까지도 빛바랜 애국으로 역사속에 잊혀지고 버림받은 채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이들에 대한 예우나 처우는 부실했으며, 지금까지도 자료부족과 6.25전쟁으로 인한 소실 등의 이유로 명예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는 많은 후손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시달려 선조의 훌륭한 업적 찾기를 포기하거나 잊어져 가고 있는 현실이며, 일부 후손들은 선조의 독립운동으로 어려운 현실을 원망하기도 한다고 한다. 정부당국은 이제라도 이들에 대한 명예를 찾는데 앞장서야 하며, 국가가 난세나 위난에 처했을 때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나서 희생된 희생자나 애국자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지고 예우하는 풍토가 정착돼야 한다. 이는 당연지사라고 본다. 나라를 위해 피 흘리고 목숨을 바친 선조의 독립운동에 대한 명예를 찾기 위해 후손들이 수 십 년간 노력했지만 정부나 관련 부처는 관련 자료를 후손들에게만 요구하는 현실은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문제다.






한 세기가 흘러간 시간이 되었는데도 관련 기록이나 자료를 잘 관리하지 못한 책임은 당연에 국가에 있는 것이다. 중요기록이나 구체적인 기록만 있다면 시대적 정황이나 관련 유시기록을 대조해 그 공로를 인정하고 후손들에 대한 처우와 독립운동가에 대한 명예를 마땅히 찾아주어야 한다. 정부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꼭 기억해야 한다. 나라를 위해 어느 누가 목숨을 버리고 전쟁터로 나가 적과 조우하며 싸우겠는가?







정부는 진정한 보훈을 위해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으로 일제와 맞서 싸우거나 투쟁하신 분들이나 그 후손들에 대해 예우는 물론 생활고에 고통을 겪지 않도록 보훈제도를 개선하고 현실에 맞게 해야 한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정부는 독립운동과 관련해 중요기록이나 제정호적 등에 옥사기록이나 관련 문서가 있다면 철저히 검증하고 조사해 그에 걸 맞는 서훈을 내려야 하며 정부가 그 후손들을 찾아 배려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정부가 앞장서 자료 발굴 노력을 기울여 소외되는 자손이나 독립운동가가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며, 정부는 어떠한 경우라도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받친 고귀한 희생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정부나 국가보훈처가 제대로 된 보훈의식이 되었다고 한다면 6.25전사자 보상 5,000원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나라위한 고귀하고 숭고한 희생은 변화가 없으며 그대로인데 현재 주무관서의 공직자들이 생각이 변하고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제대로 된 역사의식과 국가관을 가져야 하며 국가정체성 확립에 앞장서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의 마음속에 역사의식과 책임의식이 정착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아울러 국민들은 나라를 위해 나를 희생한 뒤에는 반드시 정부가 있다는 국민적 확신을 갖는 계기가 되어야 하며 이번 6.25전사자 5천원 보상금 사건을 교훈삼아 지난 날 식민지 나라위한 받친 희생이 반드시 그 빛과 명예를 찾을 수 있게 정부가 앞장서 미발굴독립유공자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고 국가보훈처가 국민과 역사 앞에 환골탈태하고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를 아울러 바라며, 정부는 나라를 위해 희생은 동일한 원칙과 기준으로 예우하고 책임지는 풍토가 정착되었으면 합니다. 이번에 반드시 증조부님의 헌신적인 독립운동과 옥사가 제대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민원인<정용선의 증손자 정병기>




첨부파일/증조모(박열이)가 인동장씨댁에 개가 정열이로 자녀 출생신고 하다 일경에 적발되어 인동장씨 호적에 증조부 관련 인적 사항이 적힌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검토하여 보시길 바랍니다.


첨부파일:
경성형무소옥사제정호적.jpg, 경성형무소표지석.jpg


처리기관정보 외교통상부 주일본국대사관

허상진 (03-3452-7611) 1AA-1008-041040

2010.08.16 21:57:46 2AA-1008-048780

2010.08.24 23:59:59
※ 민원처리기간은 최종 민원 처리 기관의 접수일로부터 보통 7일 또는 14일임
(해당 민원을 처리하는 소관 법령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처리결과(답변내용) 2010.08.19 11:46:25


안녕하세요?
주일대사관 허상진영사입니다.
정병기님이 보내주신 내용을 잘 읽어 보았습니다.
증조부님의 혁혁한 독립운동 활약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정병기님께서는 그간 국내에서 여러모로 자료수집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보훈처 입장에서는
아직도 자료가 부족하다고 하는 모양이군요.

조부모님께서는 당시 경성지역에서 형을 선고받아 경성형무소에
수감되셨군요...

그런데 당시 조선(지금의 한국) 지역에서의 재판 및 수형기록은
현재 일본국내에서 보관하거나 관리하고 있지 않아 정병기님의 기대에 부응해 드리지 못해
무척 안타깝습니다.

이는 일본이 패망한 후 1948부터 1952년에 걸쳐 사법, 검찰, 경찰기관 등이 새로이
조직되거나 정비되는 과정에서 식민지 지역의 구기록물에 대해서는 별도로 관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선지역(지금의 한국)뿐만아니라
당시 일본국내에서 벌어진 사건사고 기록물 역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보관을 위한 별도의 조치가 이뤄져 있지 않은 실정이며
설령 당시 일본 국내에서 판결이 내려진 사건이라 하더라도
재판소명, 사건번호 및 판결선고일시 등 상세정보를 요합니다.

정병기님의 요망에 부응해 드리지 못하는데 대해 거듭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국내 관계기관을 통해 지속적으로 조부님에 대한 기록물을 탐문해 보시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아무쪼록 더위에 건강 유의하시고
좋은 결과가 있으시기를 멀리서나마 기원하겠습니다.

2010. 8. 19
주일 한국대사관
허상진영사 드림






첨부파일 없음



민원 만족도조사 등록일 : 2010.08.19


민원 만족도조사에 응하시면 추첨을 통해 분기별로 문화상품권을 제공합니다.


민원처리과정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아주불만)

민원처리과정에 대해 불만이 있으신 경우, 사유를 선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민원 이해 부족)

만족 또는 불만족하신 사유 등 의견이 있으시면 작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차 민원을 제기하는 것이 모르는바 아니라 일본에는 우리나라보다 자료를 잘 보관하고 식민지 본국이기에 조선에 관한 독립운동 및 수감자 사형자에 대한 세부자료가 일본 어딘가 있을것으로 추정합니다.없다고만 하지말고 최선을 다해 보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광복과 독립의 쟁취는 고귀한 희생의 댓가인데 살아남은 자들이나 명에를 찾은 일부인사나 후손들의 독식하는 잔치가 되지않게 미발굴독립유공자 발굴에 더 관심을 가져 주시길 당부드립니다.지금도 미발굴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가슴을 치고 눈물흘리고 있답니다. 이렇게 못찾거나 방치한다면 개죽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귀하가 신청하신 민원은 해결되었습니까? (미해결)


처리결과(답변내용) 2010.08.19 18:56:47


정병기님께서 보내주신 불만족 사항을 확인하였습니다.
정병기님과의 전화통화를 통해 그간 증조부님의 독립운동 관련자료
발굴 등을 위해 기울여 오신 노력과 훌륭한 말씀 감명깊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경성지역에서 수감중이던 증조부님의 기록을
이곳 일본에서 찾는 것은 제가 설명드린바와 같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제가 이곳에서 영사활동을 하면서 재일교포 중 독립유공자와
접촉할 기회가 있으면 관심을 갖고
증조부님관련된 내용을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힘내시고 건강하세요.

2010. 8. 19
주일대사관 허상진 드림


첨부파일 없음



민원 만족도조사 등록일 : 2010.08.19


민원처리과정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보통)

민원처리과정에 대해 불만이 있으신 경우, 사유를 선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족 또는 불만족하신 사유 등 의견이 있으시면 작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다멀리 일본에서 주일한국대사관 허상진 영사님께 진심으로 갑사드립니다.저의 딱한사정에 공감해 주시고 이해하여 주신것에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정도의 자료나 경성형무소 옥사 정도이면 충분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만하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다시한번 용기를 갖게됩니다. 허영사님의 제한된 근무여건과 오래된 자료를 쉽게 찾을수 없다는 말씀에 아ㅣ해가 되며. 앞으로 재일동포들을 만날 기회가 잇을 때에 증조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려 주시겠다는 말씀에 깊은 감명과 감동을 받았답니다.일제강점기에 암흑의 세월에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받치신 증조부님의 고귀한 희생이 개죽음이니 헛된 죽음이 되지않게 최선을 다해 선조의 명예를 반드시 회복 할수 있게 노력하겠으며 다각적인 방향으로 정진하겠습니다.경성형무소는 반드시 대한민국에 잇었기에 어디엔가 관련 자료가 있을것이라 확신합니다.국가보훈처에서 관련 보도나 뉴스를 접해 보시고 변화가 있게 되기를 바랄뿐입니다.

귀하가 신청하신 민원은 해결되었습니까? (미해결)
<칼럼> 경술국치 101년… 치욕의 역사 잊지 말자






나라위해 나선 고귀하고 숭고한 희생 절대 헛되지 않게 정부가 책임의식 가져야





나라를 되찾겠다고 홀연 단신으로 일제와 투쟁하다 끝내 광복과 독립을 맛보지 못한 채 낯선 타향이나 타국 아니면 옥중에서 일제의 총칼 앞에 맞서다 죽음으로 최후를 맞았지만, 지금은 살아남은 자의 잔칫상이 되고 그들은 잊히고 묻히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과제다. 광복 제66주년을 맞아 나라위한 고귀하고 숭고한 희생이 버림받거나 잃어버린 애국, 잊혀진 애국이 되지 않게 정부당국은 관심과 책임의식을 갖고 철저히 관리해야 할 것이다.






광복 66주년이 지났지만 무슨 때나 날만 돌아오면 나리 법석을 떨고 일일행사나 구호에 요란스럽지만, 며칠만 지나가면 잊혀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투쟁하다 숨진 애국선열이나 미발굴독립유공자의 혼령은 나라 걱정으로 아직도 구천을 맴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절차도 없이 들녘에 묻혀버리거나 아예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채 버려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말이나 구호가 아닌 진정한 실천의식을 가지고 진정성 있게 해야 할 것이다.






8월 29일 나라의 국권을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과 무력 앞에 빼앗긴 101년 전의 치욕을 생각하며 친일파들의 매국행위에 다시 한번 분노한다. 나라 없는 설움과 고통은 당해본 국민만이 안다고 본다. 일제 36년 치욕 같은 날에도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놓지 않고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선열의 영전과 위패 그리고 혼령에 다시한번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이상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게 국력을 신장시키고 튼튼하게 해 유비무환의 정신과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국민 누구든지 나라를 위해 희생한다면 정부가 끝까지 책임을 지는 풍토와 국민정서가 정착되게 해야 하며 이는 나라사랑과 민족정신의 첩경이 되고 자긍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본다.


글쓴이<정병기· 미발굴독립유공자 후손>





"당국, 수형자료 없다고 독립유공자 외면"정부가 앞장서야,


글쓴이 : 정병기 날짜 : 10.03.12 조회 : 3

증조부님 항일운동르로 집안은 풍비박산,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머슴살이 처가살이 전전
고생 달고 살아. 말로 다 표현 못합니다. 증조모님은 집안의 주선으로 일제의 모진 압박과 탄압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개가를 시켰으나 나중에 발각 되었답니다.



[브레이크뉴스] "당국, 수형자료 없다고 독립유공자 외면"정부가 앞장서야,

[밀착취재] 미발굴 독립유공자들의 잊혀진 명예, 이대로 묻혀버리게 할 것인가?

임민희 기자



▲지난 30년간 증조부의 항일운동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정병기씨 &copy; 임민희 기자

올해로 광복 60주년을 맞았지만 과거사 정리 작업은 여전히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 대통령직속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 광복 후 권위주의 통치시까지 항일독립운동과 해외동포사, 민간인 집단 희생 등의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을 진행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역대정권마다 과거사 문제는 가장 껄끄러운 문제로 치부되거나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현 정권에서도 친일인명명단 공개와 관련해 “친일문제는 공과를 균형있게 봐야한다”한다거나 대일관계에서도 실리외교를 표방하며 “일본에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발언하는 등 과거사 정비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이처럼 과거사 정리 작업이 걸음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친일파들은 여전히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반면 일제강점기 시대에 항일운동을 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그 공을 인정받지 못한 채 과거 속에 묻혀 있다. 그러나 정부가 이들을 외면하는 동안에도 미발굴 독립유공자들의 행적을 찾기 위해 지난 30년을 추적해온 이가 있다.
정병기(51)씨는 증조부인 정용선 선생의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이 잡듯 뒤져 경성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에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호적을 비롯한 관련 자료를 찾아냈고 주변인들의 증언을 확보했다. <사건의내막>은 정병기씨를 만나 정용선 선생의 독립운동 발자취와 지난 30년간 동안 고군분투했던 이야기
를 들어봤다.
정씨 “증조부는 일제시대 군자금 모금 벌이다 경성형무소에 투옥돼 숨졌다. 제정호적과 주변인들 증언 등 항일운동 행적 드러났음에도 보훈당국은 외면…수형인 명부 정부에 의해 소각돼” 분개
“증조부는 일제시대에 군자금 모금 운동을 한 혐의로 악명 높은 경성형무소에 투옥돼 숨을 거뒀다. 이는 일본형무소장인 제정호적에 기록돼 있다. 증조부로 인해 우리 집안은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고 이를 견디다 못한 일가족들이 그의 이름을 족보에서 파냈고, 증조모를 개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곧 발각돼 증조모는 굶어 죽었고, 조부는 탄광에서 일하다 폐병으로 사망했다. 아버지는 머슴살이를 전전하다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등 기구한 인생을 사셨다. 제정호적과 주변인들의 증언 등 증조부의 항일운동 사실이 명명백백한데도 보훈당국은 구체적인 죄목이 적힌 수형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난 30년을 하루 같이 증조부의 항일행적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온 정병기씨는 “광복 60주년이 무색할 만큼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발굴작업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독립운동가들의 자료를 보존하고 발굴하는 것은 국가의 몫인데 그 자손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직접 입증하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성토했다.
정씨가 증조부의 명예회복에 이처럼 발 벗고 나서는 것은 다분히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는 경찰관으로 복무하던 중 1980년 강도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칼에 찔려 국가유공자인 상이군경회원으로 연금을 받고 있다. 더욱이 증조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된다 하더라도 증손자인 자신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다.
정씨는 “증조부님의 행적을 찾아다니면서 보상금 때문이라는 둥, 미쳤다는 둥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그간 마음고생을 털어놨다. 그는 “솔직히 경제적으로 힘들게 사신 아버지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증조부의 명예회복”이라며 “한국의 진정한 독립은 이를 위해 희생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발굴이 이뤄질 때 참의미가 있기 때문”이라는 신념을 피력했다.


▲정씨의 민원제기에 대한 국가보훈처의 답변 &copy; 브레이크뉴스



▲봉화군은 증조부의 수형인 명부가 형의실효등에관한법률에 의해 폐기됐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copy; 브레이크뉴스

그가 증조부인 정용선 선생의 발자취를 본격적으로 찾아 나선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조상들의 성묘조차 갈 여건이 안됐지만 정씨의 아버지는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를 데리고 경북 봉화군에 있는 묻혀있는 증조모에게 성묘를 갔다. 그러나 증조부의 산소가 없는 것을 보고 그 연유를 물었고 아버지로부터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 투옥된 후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어린 나이였지만 막연하게나마 증조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면서 증조부를 찾기 위해 친인척들에게 편지를 보내 당시 상황
을 물었고 기구했던 가족사를 알게 됐다. 친인척들 및 주변인들의 증언과 30년간 증조부의 발자취를 찾아다닌 끝에 그가 밝혀낸 정용선 선생(1883년~1928년)의 행적은 이렇다.
정용선 선생은 1983년 12월17일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의성, 풍기, 울진, 영덕
, 영주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만주에 있는 독립군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이렇게 모은 돈은 척곡교회(1909년 설립, 2006년 6월19일 등록문화재 제257호로 지정) 창립자 김종숙 목사와 논의해 독립군에게 보냈다.
그러던 중 당시 거부들이 모여 살았던 충북 청주군(현 청원군) 양석면 도원리에서 만석군의 집을 털다 발각돼 1년 만에 다시 경북으로 도망을 나왔다. 그러다 1916년 갑자기 종적을 감췄고 10여년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이 날아왔다.
정씨는 “친인척분들이나 주변인들 모두 증조부님이 군자군 모금 운동을 했다고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며 “당시 경성형무소는 항일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이 투옥된 던 곳으로서 고향이 경북인 증조부가 경성으로 압송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항일운동을 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군자금 모금 운동의 근거지였던 척곡교회의 김종숙 목사의 손자 김명성(83)씨도 “조부로부터 정용선 선생과 함께 군자금 모금활동을 한 바 있다고 들었다”고 인우사실 증명서를 써줬다고 주장했다.
김명성씨는 인우사실 증명서를 통해 “척곡교회는 독립운동을 하는 동지들의 비밀 결사 장소로 활용되었다. 군 자금 모금은 관내 친일파나 지역거부들의 집이 대상이었는데 야간에 침입해 금품을 강탈, 폭력을 행사하여 수탈하였고 소나 가축 등 금품환전이 가능한 모든 것들이 대상이었다고 조부로부터 들은 바 있다”고 말했다. 또한 김씨는 정용선 선생이 군자금 모금 운동은 물론 일본군과의 항일 전투에 참가해 싸우던 중 체포됐다고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정용선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군 자금 모금 과정에서 일제 헌병과 경찰과 수차 격돌한 바 있고 관공서 습격과 방화 등을 수시로 시도했다고 한다.
또한 의병대장 석태산과 함께 재산전투에 참가해 동지들과 전투를 직접하며 항전했다는 것. 그러나 물자부족과 병력의 열세로 패해 후퇴, 석태산 의병장 가족은 강원도 평창 사거전 교회로 피신시키고 석태산, 정용선, 김명림 등 잔여병력은 소백산으로 이동 침입하여 병력을 재정비했다고 한다. 이후 군자금 모금 운동을 계속하던 중 일본군의 간교(만나 협상 요청)에 의해 협상장에서 체포되어 석태산 의병장은 현장에서 처형당하고 정용선은 소백산에서 체포돼 경성으로 압송된 후로는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김명림은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0년을 복역하고 만기 출소 후 독립운동본거지인 척곡교회로 돌아와 조부와 함께 거주한 사실이 있다고 전했다.
김씨는 정용선 선생의 가족 상황에 대해서도 소상히 증언했다. 그는 “정용선의 가족들은 일제의 모진 박해와 고문으로 어려움을 겪은 바 있고 정용선의 처에 대해 집안 일가친척의 주선으로 개가하였다는 사실을 인근 주민으로부터 듣고 확인했다”고 말했다. 정용선 선생과 달리 김명림씨는 수형인 명부에 기록이 남아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정부가 독립유공자 발굴해야”


▲척곡교회 창립자 김종숙 목사의 손자 김명성씨가 써준 인우사실 증명서(왼쪽) .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일제시대 제정호적(오른쪽) &copy; 브레이크뉴스

정씨는 김명성씨의 증언처럼 증조부의 항일운동 여파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일제는 수시로 찾아와 감시와 고문 등의 탄압을 일삼았고 이를 견디다 못한 집안어른들이 증조부를 족보에서 파내고 증조모의 이름을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고친 후 야밤에 40리 떨어진 인동장씨 집안으로 개가시켰다는 것. 그는 그 근거로 인동장씨의 호적에 기록된 증조모의 이름 ‘정열이’를 제시했다.
정씨는 기구했던 가족사를 설명해 나갔다. 증조부는 슬하에 딸과 아들을 두었으나 딸은 병으로 죽고 아들(조부 정덕수)은 증조모를 따라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인동장씨 집안은 모진 박해를 받았고 증조모는 초가집에 감금되어 굶어죽었다. 조부는 집을 나와 큰아버지집 근처의 광산에서 일을 했는데 그곳에서도 여전히 일본군의 엄한 감시를 받았다. 조부는 결국 광산에서 일을 하다 폐병으로 사망했고 당시 7살이었던 아버지(정건순)는 5살인 남동생을 데리고 남의 집 머슴살이와 공사판을 전전하다 어머니를 만나 데릴사위로 들어가 살게 됐다는 것이다.
정씨는 “아버지는 배움이 없어 글을 모르신다. 증조부를 시작으로 계속된 일제의 탄압은 해방된 오늘날까지도 깊은 생체기가 되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며 “이는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친일파 후손은 부와 권력을 누리고 독립유공자 후손은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는 부조리한 현실 때문”이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이러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자 오랜 세월동안 물불을 가리지 않고 증조부의 행적을 추적해갔는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정씨는 지난 30년간 증조부의 활동근거지로 알려진 경북 봉화군 일대의 모든 면사무소를 비롯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경찰관으로 복무하는 도중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수 십리를 오가며 기록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결과 10년이 흐른 후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호적과 당시 봉화군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벌인 독립군 명단을 입수했다. 또한 증조부 생존 당시 소년이었던 90대 노인의 증언도 확보했다.
보훈처 “독립운동 사실 검증돼야 서훈 추서”
그러나 보훈당국은 “구체적인 죄목이 담긴 수형 자료가 없어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정씨는 포기하지 않고 1989년부터 수형기록을 찾기 위해 법무부와 경찰청, 국사편찬위원회 등에 민원을 제기했다. 하지만 “관련자료가 없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이에 봉화군에 증조부의 수형기록을 요청했고 “수형인 명부는 형의실효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폐기됐다”는 답신을 받았다. 정씨는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이 담긴 중요한 자료를 어떻게 국가에서 소각할 수 있느냐”며 “정부가 자료를 없애놓고 그 후손보고 그것을 찾으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법무성과 미국
국무부 문서보존소에 도움을 요청,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보내 수형인 명부가 들어있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지불하고 구입했다. 그러나 증조부의 항일행적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2005년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증조부의 독립활동을 인정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했으나 이 역시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답변만 할 뿐이었다.
정씨는 “정부는 미발굴 독립유공자에 대해 관심이 없지만 이분들의 땀과 희생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며 “할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개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만큼 다 했다. 국가가 계속 외면한다면 향후 행정소송
등 법정싸움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등 법정싸움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정씨의 ‘정용선 선생 독립운동 관련 자료발굴과 재신 요청에 대해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관계자는 지난 7월28일 공문을 보내 “정용선 선생에 대해 자체적으로 현지조사를 시행하고 자료를 수집해 2009년 3?1절 계기심사에 부의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결과는 내년 2월말 경 통보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30년간 “객관적인 자료가 검증돼야 서훈을 추서할 수 있다”던 기존입장에서 일보 진전된 반응이다. 그는 “당시 이슬처럼 간 혼령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후손들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정부가 미발굴 독립유공자 찾기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취재=임민희 기자 bravo15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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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5 [16:01] ⓒ브레이크뉴스

2011년 신묘년 새해소원은 독립운동하신 증조부님 명예 찾는 일



마포관내에는 일제강점기인 민족의 암흑기에 나라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투쟁하시다 일제에 체포되어 악명&#54278;던 경성형무소(마포 공덕리 105번지/현 서울서부지방법원.서울서부지방 검찰청)에서 옥사하셨답니다. 이곳은 대략 부지가 12,000여평에 10년이상 중형을 받은 중범을 수용하며 붉은벽돌을 생산하는 벽돌공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모진 고문과 감시 그리고 굶주림에 옥사하셨던 역사의 현장입니다.



진정한 민족독립의 성지인 경성형무소가 역사의 흔적 조차 없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와 정부와 서울시 그리고 마포구청에도 경성형무소 역사과 건립에 대한 호소를 하고 있답니다. 지역언론인 및 조.중.동 그리고 한국일보사에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다루어 주실 것을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사연 보시고 도움 부탁드립니다.증조부의 독립운동 옥사가 잃어버린 애국이 되지 않았으면합니다.
증손자 증조부 독립운동 관련 자료 찾아 36년 고군분투 아직 소원 못이뤄...

새해에는 반드시 나라와 민족의 독립운동을 하신 증조부님 명예를 찾아 가묘라도 국립묘지에 안장시켜 자손된 도리를 다하능 일입니다. 지난 35년간을 증조부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찾는데 동분서주해 왔으나 아직까지 겨아직까지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일제의 만행으로 시신조차 인수하지 못해 구천을 맴도시는 증조부님의 영환을 편하게 해드려야 하는 것이 자손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새해에는 소만대로 좋은 일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증조부님의 독립운도을로 집안은 풍비박산 자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머슴살이나 처가살이를 전전해며 고생을 달고 살았다빈다. 배움에서 멀어지고 살기에 고통스러웠으며 일제의 모진 감시와 탄압 그리고 박해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답니
다. 누가 그런 고통을 알수 있겠는가?

독립운동 하시다 사망하신 증조부의 명예를 찾고 싶습니다.

증조부님의 항일운동으로 집안은 풍비박산, 후손들은 머슴살이 전전하며 뿔뿔이 흩어져...
증조모님은 일제의 모진 고문과 압박 감시에 집안의 주선으로 성을 개명하여 인동장씨 집안으로 개가하셨답니다.(제정호적 인동장씨 참조))

지난 35년을 증조부님 독립운동 자료발굴에 힘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연을 관심있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미발굴 독립운동하신 가족들 눈물겹게 자료를 찾고 있습니다. 아시는 것이 있으시다면 지원해 주시고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증손자라도 찾지 않는다면 끝입니다.여러분도 잘 아실것입니다.
행정심판에 각종 사연이 언론에 공개되고 보도되었으도 진전이 없는 증조부님의 옥사기록은 어떻게해야 하는가 말입니다. 일본놈들에게 공짜로 옥사를 했다는 이야기인가요?

정말 죽도록 나라위해 독립운동하신 독립운동가는 자손이 없거나 무지해서 찾지도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제 죽어서 그분들을 다 만나게 될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동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사망기록 호적이 있어도 인정해 주지않은 현실이 안타깝고 야속한 심정입니다.

국민 여러분 그리고 공직자 여러분!! 관련 학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증조부의 고향이자 부친의 고향인과 국민 여러분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증조부님이 경북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에 살고 계시다가 독립운동으로 투옥되어 서울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하셨습니다. 증조부님의 명에회복을 통하여 자손도리를 다해야되겠다는 신념과 의지로 여러분께 글을 올려 드립니다. 이제 증손자인 제가 찾지 않는다면 영원히 찾을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그냥 사장되고 말것입니다.

사망기록:제정호적에 소화3년5월20일 오후3시20분 경성형무소 감방(서기1928년5월20일오후3시20분사망)형무소에소 통지하여 호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국가유공자의 한사람으로 있는 고 정 용선 옹의 증손자입니다. 자나깨나 증좁부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지난 35여년 세월을 자료를 찾아 전국을 헤메며 다니고 있습니다. 젊음을 국가와 민족의 광복을 위하여 받치신 증조부의 명예를 회복하여 자손된 도리를 다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이러한 시실을 알고 계시거나 아시는 자료가 있으시다면 도움 좀 주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경성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사망한 기록이 제적등본에 자세하고도 세세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국가보훈처에서는 또다른 자료를 요구하는 것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경형형무소가 6.25사변에 불이 나서 소실된것이 왜 가족들에 책임입니까? 그자료를 제대로 관라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힘없는 가족에게 자료를 요구하지 말고 국가보훈처에서 자료발굴 노력을 경주하여 진정한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려는 노력을 기울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 제출된 자료에 대하여 덮어 놓고 방치하지 말고 관심을 가지고 자료에 대하여 다시한번 검증을 하여 주실 것을 아울러 간곡히 당부를 드립니다.

민원을 제기한 가족에 입장에서 한번 생각보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족들은 긴세월동안 많은 풍지평파와 고난의 세월을 살아왔음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많은 애국지사와 애국선열들이 흘림 피의 댓가와 노력으로 오늘에 대한민국의 발전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국가보훈처장관님께서는 혹시 경성형무소인 현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보셨는지요. 그자리가 악명 높다던 경성형무소입니다. 저의 증조부께서 바로 그자리에서 생을 마감하신 자리이기에 일년에 몇번 그곳을 찾습니다. 가슴이 미어 터지는것 같고 분통이 터집니다. 가슴이 답답한 심정입니다.

왜 이렇게 이런 편지를 국가보훈처에 써야 하며 외쳐야 합니까?
국가보훈처에서는 세심한 관심과 배려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번에 저의 증조부 고 정요선 할아버지의 자료를 재검토하여 보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국가보훈처에서 하는 "독립유공자 후손찾기" 구호만 요란스럽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관련 호적 (제적등본) 내용 살펴 힘없고 빽없고 줄없는 가족 발굴해야 되는지 알수 없는 일입니다. 없어진 자료를 내 놓으라고 하는 것은 잇을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독립운동 보상 받을려고 했겠습니까?

국가보훈처는 찾는 노력 하지 않고 가족들에게 짐 떠넘기는 형상 언제까지 하려나... 가족들이 제출하는 관련 서류 제대로 보지도 않고 묵살 하는것 같아 안타깝다. 제부모 제조상 같으면 이렇게 하려나 싶은 심정이다. 앞으로 세심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것 같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친 고 정용선 증조부 명예를 회복시켜 주세요.

지금까지 35 여년째 증손자가 노력하고 있답니다. 제발 귀를 기울려 주셨으면 합니다.남의 일로만 생각지 마시고 관심가져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증손자도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가유공자랍니다. 저는 저의 증조부(고 정용선)독립운동에 대한 자료발굴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20여년을 노력해 왔습니다만 아직까지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정호적원부에 수형기록과 사망기록이 있슴에도 판결문을 &#52287;지 못하여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정부의 결단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친은 문맹인으로 살고 계시며 평생 어렵게 할아버지도 일찍 일제피박에 돌아 가시고 고아 아닌 고아로 어
2012-07-21 17:5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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