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사할린리포트
icon 사할린사랑
icon 2008-02-15 17:5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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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우리는 사할린을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사할린이라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강제징용이다.
조국이 헐벗고 못살아 있을 때 입에 풀칠을 하고자 가족을 대동하며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연해주로 더러는 체홉의 슬픔의 틈새가 자리한 사할린으로 돈을 벌기 위해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로부터 제2차대전의 발발로 조선의 선량한 국민들은 나라 잃은 서러움과 일본정부의 전쟁 희생양이 되어 동남아로 사할린으로 심지어 태평양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우리 형제들이 일본정부의 하수인인이 되어 무자비하게 끌려갔다.
그런데도 일본은 천인공노할 만행을 조선인들에게 저질고도 대일강화조약對日講和條約으로 보상문제를 다 해결하였다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이는 지난 한국정부의 시대적 사명으로 피할 수도 없겠으나 원칙적 조사없이 국정으로만 계산한 착오도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기에 일본은 더욱 기세 등등할 수 밖에 없던 것이고 오늘까지 형식적인 것만 제외하고 국제적 여론을 감추기에 바쁘기만 하다.
그래서 오늘까지 사할린동포들은 '영주귀국특별법' 또는 '사할린동포지원법'을 한국정부에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으며 그 후손들에게까지 보상차원을 해결해 주길 바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실정이다.
실지 강제징용 이후 해방이 되고 고국귀환이 단절되기까지 50년 가량 소련정책으로 자의가 아닌 타의로 속수무책 조국길이 막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이 땅에 살아야 했기 때문이며 사할린동포 한인들의 피나는 노력이 뒷받침되어 영주귀국이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사할린동포들의 조국귀국의 열망은 컸던 것이다.
그 열망이 너무도 커서 1세대들은 숨죽이며 라디오 전파에 남몰래 한국소식을 듣기 원하였고 독한 보드카에 고통을 하소연하며 일곱 바람이라는 사할린 특유의 매서운 추위와 눈보라 속에 견디며 목숨을 부지하며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왔다.
그러다 조국을 부르며 눈물로 지새기를 수년 속에 목을 매여 스스로 자살하거나 정신질환으로 떠돌아다 눈 속에 파묻혀 죽어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숱한 풍파를 견디며 꼿꼿이 한민족만이 가지는 저력으로 소련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가족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다 돌아가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사할린은 오랜 전(1987년)부터 한인들이 이주해 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만주에서 연해주까지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과 이주를 하였고 그 가운데 먹고 살기 위해 1925년부터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사할린에 흘러 들어온 경우도 있었다. 강제징용 이후에도 한인들은 일본을 경유해 또는 일본에 체류 중인 유학생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돈벌이가 좋다는 사할린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유배지라고 하지만 당시 사할린에는 자원보고가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었고 이를 계기로 북한정부 수립 이전부터 북한파견근로자들이 시베리아 벌목에서 사할린 자원보고에 뛰어 들기 시작해 급기야 1947년에는 북한파견근로자시대를 맞이하게 되고 석탄 매장에서부터 삼판까지 어획고 물량에 총동원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청진항에서 출발한 북한 운반선은 홈스크 밑에 위치한 네벨스크 내항에다 짐짝처럼 인력들을 실어 나르며 사할린에 투입시켰다. 그리곤 소대별 중대별로 편을 갈라서 사할린 각 지역에 배치시켰고 외화획득에 총력을 기울었다.
1959년 김일성은 사할린에 파견된 근로자들을 조국으로 입성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많은 파견근로자들이 이래저래 더 못살 고향에 간다 한들 피죽도 못 먹을 밖에야 그냥 눌러 안고 살자고 했던 북한파견근로자들이 좀 많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정부와 소련정부는 북한파견근로자들을 10% 내지로 보는 경우가 있었으나 당시 사할린잔류한인들의 인구조사에서 3만 2천이라는 데이터가 1946년 12월 19일 미국 주블라디영사관 한인거주 관련문서에 미.소 협정에 의한 사실을 명백히 밝히고 있는 점을 볼 때 북한파견근로자들은 실지보다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해방이후 소련으로서는 인력이 모자라서 북한파견근로자들이 남은 것을 법적으로 내보낼 이유가 없었고 강제징용 이후의 1세대들의 국적이 일본국적이었음에도 일본공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조선인으로 못 박아 사할린자원보고에 동원, 합류 시키려는 계략이었음을 엿 볼 수가 있었다.
그렇게 사할린한인이라면 이주.강제징용.취업.북한파견근로자로 구분하는 것이 정확하며 전체 강제징용의 수는 60% 선으로 내다보고 있는데 북한이든 남한이든 고향 그리워 슬픔 속에 살았던 것은 다 똑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며 그 중 유독 고국열망의 길을 끊지 않았던 한인들은 강제징용에 의해 끌려 왔던 1세대들이었다.
그 1세대들 중 일본인 여자와 결혼한 한인들이 주축이 되어 오늘의 '영주귀국'이라는 결실을 보게 된 장본인들이다. 이들은 일본으로 귀환 후 일본인 지인의 도움을 바탕으로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조국 대한민국으로의 정착을 희망했고 나아가 전후보상책임을 물게 하는 운동도 펼쳐 나아가기도 했다.
그래서 길이 막혔던 영주귀국은 가까스로 실현되기 시작하였고 전후보상책임의 법적 소송도 이들만이 할 수 있었던 것에서 1세대들 만큼 인식과 세계시장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2세들은 지금에야 그 등불을 다시 피우려 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1세대들이 이룬 성과가 50년 프로젝트로 이어져 현재까지 보류상태로 남아있게 된 원인이었고 2세들은 최근 관련법을 깨우쳐 국제법에 의거 영주귀국지원법과 전후책임보장문제를 거론하며 내심 한줄기 희망이 전해져 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뻔히 안 된다는 단정도 지니는 사람도 있으나 부모의 한 맺힌 삶과 고통을 고스란히 물려 받은 2세들은 살고자 죽도록 일만하며 슬프게만 돌아가신 부모님들만 생각하면 순전히 자신들도 물적,정신적 피해자라는 것이 분명한데 왜 일본정부는 배상을 회피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또 1945년 출생자들인 영주귀국자들은 그나마 늦게나마 고국 품으로 가 편히 살 수 있는데, 향수병에 걸려 죽어간 이들의 사할린에 남은 독신자와 자식 때문에 차마 갈 수 없는 잔류한인들은 또는 이중징용에 희생당한 가족들의 아픔과 부모의 강제징용으로 깔끔하게 처리되지 못한 책임은 한국정부도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을 확실하게 해주기를 애써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저 현재의 영주귀국이 실현되고 있는 점이 한국정부의 지대한 공로와 편의로 인정돼 혹 이마저 잘못된다면 하는 조바심을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사할린은 예전의 춥고 배고픈 상황은 외지의 70대 이상의 노인들을 제외하곤 많이 달라진 현상을 볼 수 있다. 사할린프로젝트로 석유와 가스가 퍼 올려져 경제적 부가가치가 인정되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고 사할린경제와 문화 등 크다란 업적으로 평가 받고 있는 것도 소수민족 중 최대인 한인들이 상권을 쥐고 있을 뿐 아니라 나름대로의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사는 이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부모가 물려준 자산의 기본교육과 암울했던 현실 속에서 잘 살아 보겠다는 노력이 뒤따랐음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소련 개방이후 조국의 선진문화가 사할린한인들에게 미쳤던 영향도 컸음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이다.
허나 이들의 가슴 속에 맺힌 한은 타 어느 나라의 재외동포완 달라서 우리는 사할린한인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의 편에서 서서 그들이 울부짖는 미해결된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데 협력하고 포옹하는 자세로 사할린한인들의 역사적 피해의식을 함께 나누며 안아 주어야 할 것이다.

※사할린한인들의 아픔을 호소하며 잔류한인들의 보상을 연구하는 한 사회단체의 험난한 여정을 지켜보면서 짤막하게 느낀 소감을 피력했던 글입니다.
그들의 현실이 이루어져 웃는 얼굴이 보고 싶습니다.
2008-02-15 17:5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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