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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인상기
icon 김동진
icon 2006-05-06 16: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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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수기
속초인상기
김동진

지난해 여름 나와 한정춘선생은 훈춘시작가협회대표단의 이름으로 한국민예총 속초지부에서 주최하는 제9회통일문화제에 참석하였다. 반파쑈전쟁승리와 항일전쟁 승리 60돐을 기념하는 뜻깊은 나날에 고국의 <<8.15>>통일문화제에 참가함으로 하여 나는 다시 한번 고국의 뜨거운 숨결을 피부가 아닌 페부로 실감할수 있었다. 비록 왕복 13일의 짧디 짧은 고국방문길이였지만 그 사이에 만났던 속초의 자연과 사람은 나의 가슴속에 두고두고 잊을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었다

1. 소녀가 안겨준 꽃다발
8월10일 오후4시30분에 러시아 자르비노항에서 승선한 <<동춘호>>가 한국 동해안의 관광도시 속초시에 도착한것은 그 다음날 점심무렵이였다. 하선하여 검문을 마치고 국제려객선터미널밖으로 나오려는데 전혀 생각지 못했던 정경에 맞띄웠다. 두명의 귀여운 소녀가 달려오더니 꽃다발을 안겨주고 인사를 하는게 아닌가. 어정쩡 하게 꽃다발을 받아안고보니 민예총속초지부의 전태극지부장과 김영호문학위원장이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터미널안으로 들어오고있었다. 그러니 이건 전지부장이 우리 를 열정적으로 영접하느라고 사전에 미리 짜놓은 환영절목이였다. 이국의 자그마한 문학단체에서 간 이름없는 문인들인데 이처럼 요란스럽게 형식을 갗추어 상빈마중을 하듯하니 어쩐지 너무나 과분한것 같아 저으기 송구스러웠다.
나의 인생 60년을 돌이켜 보면 꽃다발을 받은적이 이번까지 딱 세번이다. 한번은 연변작가협회문학상시상식에서였고 한번은 회갑때 그리고 이번이 세번째이다. 그중에 서도 이번에 받은 꽃다발이 주는 느낌은 전자에 비해 완연히 다른것이였다. 인생 황혼의 나들이길에 고국의 소녀로부터 받은 꽃다발, 그것은 단순한 생화묶음이 아니였다. 그것은 속초땅을 딛는 순간부터 내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고국의 싱싱한 모습과 향긋한 미소였다. 그것은 속초하늘을 보는 순간부터 내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동족의 뜨거운 숨결과 끈끈한 정이였다.

2. <<서울 칼국수집>>
속초국제려객선터미널에서 기념사진을 찍고나서 전지부장은 우리를 <<서울 칼국수>>라고 간판을 건 자그마한 식당으로 안내하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민예총 속초지부 사진분과의 박경심위원장을 만났다. 그녀는 전지부장과 함께 훈춘로인들 에게 무료인상사진을 찍어드리느라고 훈춘에 여러번 다녀갔었기에 나와는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나는 박경심씨가 우리의 점심안배를 하느라고 여기로 먼저 와서 기다리고있는 줄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이 집이 바로 그녀가 경영하는 음식점이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녀를 전업촬영가로 짐작한것은 완전히 틀린 판단이였다. 그녀는 음식업을 하는 사장이면서 또 카메라를 들고 사회활동에 종사하는 사진위원장이였다.
그녀는 주방에서 일하는 어머니와 시간을 짜내여 가끔 도와주는 동생과 함께 이 음식점을 꾸리고있었다. 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손수 복무원이 되여 바삐도는 그녀가 어떻게 사진위원장이라는 사회직무를 감당하는지 알수 없었다. 더구나 리해할수 없는 것이라면 그녀의 식당은 오전 반나절만 영업하는데 그나마 일요일에는 아예 문을 열지 않는다는것이였다. 남들은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새벽부터 문을 열고 밤 늦게 까지 손님을 기다리는데 이렇게 해서야 어찌 돈을 벌수 있으랴싶어 의아한 표정을 감출수 없었다. 나중에 소개를 듣고서야 조금 리해가 되였다.
알고 보니 이것은 그녀가 돈을 벌기 싫어서가 아니라 생활과 사업을 유기적으로 배합, 조절하기 위하여 고안해낸 남다른 경영방식이였다. 그녀는 바로 오후시간과 일요일을 리용하여 가무를 처리하고 정력을 집중하여 자신의 애호와 특장에 따른 사진분과의 사업에 몰두하는것이였다.
나는 더위를 가시게 김치물을 육수로 한 칼국수를 요구하였다. 나는 그녀가 만들어 준, 얼음이 서걱거리는 시원한 칼국수를 먹으면서 참하게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 그녀는 중국에서 흔히 볼수 있는 수수한 차림의 가정주부 이면서 그녀는 또 중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과외문화봉사일군이였다. 그녀는 자기 방식대로 삶의 내용을 다양하고 다채롭게 장식할줄 아는 그리고 그것을 위해 밤낮 으로 열심히 뛰는, 가슴이 뜨거운 사업형의 녀인이였다.

3. 아바이마을
칼국수집에서 땀을 들인후 우리는 청호동으로 향하였다. 항간에서 통칭 <<아바이 마을>>로 불리는 청호동의 모습은 속초시내와는 달리 조금은 궁색하고 어수선하였다. 소개에 따르면 전에 비해 많이 개선되였다고 하지만 올망졸망 모여앉은 단층집들, 확 트이지 못한 좁은 길, 한국치고는 가난한 동네로 안겨왔다.
바로 이 마을이 조선전쟁때 북쪽에 있는 고향을 떠나 배를 타고 피난길에 올랐던 실향민의 집단마을로서 그 대부분이 함경남도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아바이마을>> 라고 하여 바깥로인들만 사는 마을인것이 아니였다. <<아바이>>란 북쪽말씨를 따온 것으로써 이북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이란 뜻으로 쓰이는것이였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면 인차 귀향길에 오를 생각으로 남으로 더 내려가지 않고 이곳에 잠간 거처를 잡았던것이다. 그런데 정전후 군사분계선이라는 인위적인 장벽 으로 하여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로 되고말았다. 이렇게 형성된 <<아바이마을>>에는 반세기가 넘도록 리산과 실향의 아픔을 가시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있었는데 그들중 일부는 가게나 음식점을 꾸리고 대부분 가정에서는 수산업에 종사하고있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조상의 뼈와 자신 의 태가 묻힌 고향을 망각할수는 없는것이다. 멀지도 않는 북녘하늘을 우러러 <<망향 가>>와 <<사향가>>를 불러야 하는 <<아바이마을>>사람들. 나는 이런 <<아바이 마을>>에서 말로만 들어오고 책에서나 보아오던 동족의 비극, 분단의 비극을 내 눈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지금도 나의 귀전에는 박윤혜학생 (속초녀고2---2) 이 읊어준 한수의 시가 아픈 메아리로 남아있다.
<<아바이/ 아바이/ 내 당신 만날 날을 기다리다 목이 쉬어 죽겄소/ 하루 이틀일줄 알았던/ 이 땅의 체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으이//
당신들께로 가는/ 기러기도 늙고/ 내 그림자도 늙어버려/ 땅에 박힌채 움직일수가 없소/ 차라리 깊이 박힌 뿌리를 뽑아 그리로 가리다//
수십년간 불러온/ 휘파람도 이제/ 붉은 피멍이 앉았다오//
아바이/ 내 당신 만날 날을 기다리다/ 목이 터져 죽겄소// >>

( <<아바이마을에서---내 아바이에게>> )
4. 청호동갯배
청호동에서 나와 국도를 건너서자 경사가 급한 아래쪽으로 출렁이는 물결이 안겨 왔다. 폭이 92메터에 달하는 이 물줄기는 강물이 아니라 청초호와 바다가 서로 통하여 이루어진 한갈래 수로, 다시 말하면 바다가 청호동을 속초시내와 갈라놓은 자연적인 물길이였다.
전지부장은 이 물길을 건너다니는데 쓰이는 배를 갯배라고 하면서 기어코 한번 타보라는것이였다. 갯배라니? 역시 처음 듣는 소리였다.
갯배는 돛대도 삿대도 없이 쇠바줄에 의해 오가는 줄배였다. 갯배는 청호동 아바이 마을과 시내의 중앙동을 이어주는 유일한 도선으로서 전쟁때에 운영이 정지되였다가 1955년에 회복되였고 지금의 배는 1998년에 35인승 FRP선을 개조한것이였다. 얼핏 보기에는 철판을 땜질하고 란간을 세워 트럭의 적재함처럼 만든 너무나 간소한 이 배가 타고보니 이 고장의 명물이였다. 이 배가 있어 속초시내로 다니는 청호동사람 들의 10~15리나 되는 륙로길을 100메터로 줄인것이다. 정부에서는 청호동사람들만은 면비로 타게 함으로써 그들의 시내출입에 최선의 편리를 제공하고있었다.
갯배는 승선한 사람들이 자각적으로 갈고리를 잡고 바줄을 걸어당겨야 오갈수 있는 배이므로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거기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임을 실감할수 있어 또한 좋았다.
하지만 즐거움만이 아니였다. 갯배에서 내려 갯배에 관한 팜프렛을 펼치니 <<갯배>> (리상국) 라는 시가 있기에 그것부터 읽어보았다. 나는 그 시를 통하여 갯배의 또 다른 심각한 이미지를 알게되였다.
<<우리는/ 우리들 떠도는 삶을 끌고/ 아침저녁 삐걱거리며/ 청호동과 중앙동사이를 오간게 아니고/ 마흔 몇해동안 정말은/ 이북과 이남사이를 드나든것이다/ 갈매기들은 슬픔없이도 끼룩거리며 울고/ 아이들은 바다를 향해 오줌을 깔기며 크는 동안/ 세계의 시궁창같은 청초호에 아랫도리를 적시며/ 우리는 우리들 피난의 나라를 끌고/ 마흔 몇해동안 정말은/ 우리의 살속을 헤매인것이다>>
보다싶이 갯배는 청호동사람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쇠로 만든 그릇이였다. 갯배는 또한 오늘을 살고있는 속초시민들과 함께 울고웃는 삶의 현장이였다. 갯배를 타고 갈고리로 쇠바줄도 당겨보았고 눈물겨운 시도 보았으니 그날 나는 바다로 통한 속초의 물길우에서 슬프게 아름다운 갯배의 추억을 만들수 있었다.

5. 미시령 바람고개
8월12일, 학사평 <<할머니순두부집>>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우리는 곧바로 미시령에 올랐다. 떠날 때 전지부장은<<미시령에는 한여름의 불더위가 없어요.>>라고 하였다. 뜻인즉 차거운 골바람이 사람을 덜덜 떨게 한다는것이다.
아니나 다를가 미시령에 거의 오르자 벌써 윙윙거리는 바람소리가 들려왔고 차에서 내리니 사람이 날려갈지경으로 드센 바람이 불어치고있었다.뿌리를 알수 없는 황소바람이 해발826메터의 령을 넘어 훤히 트인 바다쪽으로 달려가는것이였다.가까이 바위에 의지하여 지은 2층 커피점을 보니 베란다처럼 나온 허리에 온통 떡호박같은 둥근 돌덩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분명 바람에 집이 날려가지 않도록 대처한 조치였다. 허리를 금은보화로 장식하듯 크기가 비슷하고 모양이 둥근 돌을 쇠그물에 넣고 그것을 일정한 간격으로 보기좋게 달아맨 집은 말그대로 비바람에 퇴색하지 않는 한폭의 멋진 예술작품이였다.
미시령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과 인제군북쪽 경계에 있는 고개로서 한계령과 대관령처럼 태백산맥을 통과하는 교통요새이다. 이 고개너머로 두갈래의 길이 있는데 북으로는 금강산으로 가는 길이요, 남으로는 설악산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미시령 은 금강과 설악사이에 솟은 바람고개였다.
미시령에 더욱 의미를 부여하는것은 리승만대통령의 휘호가 있는것이다. 령마루를 감도는 길가에 돌로 단을 쌓고 그우에 세운 석각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리승만 초대 대통령이 쓴 <<미시령>>이라는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한자 (汉字) 내리글로 <<弥矢岭>>, 오목음각으로 된것이였다.
그런데 국보에 속하지 못하는지 아니면 보호가치를 상실한것인지 관리가 제대로 되지못하여 스산한 느낌을 주었다. 나무쪼각 몇개로 대충 만든 울타리안에는 잡초가 무성하였고 비바람에 씻기고 퇴색한 글씨는 가까이 다가서서 눈박아 보아야 겨우 알아볼수 있었다. 나는 리승만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을 어느만치 잘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한국력사의 한페지를 장식한 통령인만큼 그의 휘호가 담긴 이 석각을 좀더 잘 관리했으면 좋겠는데 하고 싱거운 소리를 하였다. 누가 무어라 하든 그것은 미시령 고개의 지경돌이요 도표이며 패말로 남아있지 않는가!
미시령 바람고개에 올라 <<미시령>>을 바라보노라니 모택동의 사 <<보살만 – 황학루>> 가 떠올라 그중의 한구절 <<황학은 어데 갔느냐?/ 놀이터만 남았구나.>>를 모방하여 혼자서 중얼거려보았다.
<<통령은 어데 갔느냐? 휘호만 남았구나.>>

6. 락산사의 소나무
신라고승 의상 (义湘) 대사가 기원671년에 창건한 천년고찰 락산사가 지난봄의 산불에 재더미로 되였다는것은 이미 알고있는바였다. 기재에 의하면 락산사는 지금 까지 산불, 내란, 전쟁으로 하여 8차나 불의 세례를 받았는데 그중에도 이번에 받은 피해가 가장 엄중하다고 하니 어쩌면 락산사의 풀과 꽃과 나무까지도 열반에 들어가 새로운 탄생을 꿈꾼것이 아닌가싶다.
오봉산을 배경으로 양양군북쪽해안에 위치한 천년사찰의 입구에 들어서니 의상대 사를 기리여 세운 의상대가 반겨주었다. 거대한 바위끝에 솟은 의상대에서 쪽빛으로 일렁이는 일망무제한 동해를 바라보면 절로 탄성이 흘러나온다. 의상대에서 내려와 관음굴(홍련암)로부터 홍예문에 이르기까지 내내 놀라움을 금치 못한것은 거의 전소 되였다는 락산사가 불과 몇달사이에 이렇게 많이 복원되였으리라고 미처 생각지 못한 때문이였다. 원통보전과 홍예문루각 등을 제외한 대부분 시설이 원모양으로 복구되여 밀물처럼 찾아 오는 관광객들에게 재난과 복구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고있었다.
그래도 강한것은 자연의 생명이였다. 중요한 건물이 22채나 타버리고 보물 제479호 구리종마저 녹아버린 그 사나운 불길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풀씨와 꽃씨 그리고 나무들이 있어 한여름의 록음을 펼치였고 그속에서 들려오는 매미들의 노래소리 또한 요란스러웠다.
보기에 안쓰럽고 처참한것은 불길에 푸르름을 잃어버린 해묵은 소나무들이였다. 까맣게 탄대로 세워둔 소나무들은 마치 타버린 자신의 육체를 들고나와 죄를 짓고 사는 인간을 성토하는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것은 원림부문에서 소나무살리기 기술조치를 대고있는것이였다. 그들은 소나무의 화상정도를 측정하고 주사를 놓고 약을 바르고 비닐붕대를 감아주는것으로 이미 적지않은 로송을 살려내고있었다. 끝초리 가지들에서 방금 돋아나온 연록의 잎새에서 나는 소나무의 강인함과 그 정신이 추켜든 부활하는 생명의 푸른 기발을 보았다.
화상입은 사람을 치료하듯이 불에 덴 나무를 살려낸다는 사실앞에서, 그리고 한포기의 풀과 한송이의 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모습에서 나는 발달한 나라와 발전도상의 나라지간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좀더 깊이 알게되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과학기술과 문명척도 그리고 생태관념의 차이였다.

7. 분계선의 <<평화>>
<<3.8선>>이라 부르는 군사분계선에서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비무장지대와 철조 망에 가로막힌 그너머의 산과 물을 바라본다는것은 상기도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이 땅의 눈물젖은 력사를 생각하며 한가슴 치미는 아픔을 달래야 하는 일이였다. 이것은 한발자국을 더 내밀어도 안되는 분계선이 나에게 준 정감의 선물이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14일, 우리는 김영호문학위원장의 안내를 받아 통일 전망대로 갔었다. 속초에서 북으로 달리는 백여리 길에 화진포를 지나 출입신고를 하고 고성군 명파리에서는 전신무장한 헌병이 지키는 검문소를 통과하여야 했다. 없지 못해 발생할수 있는 의외의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엄격한 단속이였다. 하지만 광복60주년을 맞이하는 마음들이 모두 통일전망대로 쏠렸는지 전망대로 가는 길에는 차량의 물결이 강물처럼 흐르고있었다.
분계선을 코앞에 두고 바다쪽으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에 지은 통일전망대, 여기는 한반도의 허리에 빗장을 지른 휴전선 155마일의 최북단 전선이다. 바로 이곳에서 사람들은 이북의 하늘과 땅, 산과 물을 바라보며 망향과 분단의 설음을 순간적으로 나마 달래보는것이였다. 팔을 내밀면 금시라도 닿일것같은 금강산을 바라보며 그리고 가까운 이북의 바다에 떠있는 어선을 바라보며 <<통일이여, 어서 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였다. 나는 비록 중국공민이지만 나의 혈관속에 흐르는 아리랑족속의 피를 속일수 없었다.
사람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는, 그래서 인적이 끊어진 비무장지대는 어찌보면 고요 로운 <<평화의 락원>>같았다. 화초와 수목, 새와 짐승, 꿀벌과 나비 지어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유독 사람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가 자유를 만끽하는 <<락원>>! 이 땅에 이러한 <<락원>>이 있다는것은 그 무슨 자랑거리가 아니였다. 이 땅에 이러한 <<락원>이 있다는것은 반세기를 넘도록 흘려온 이 나라 백성의 피눈물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표명할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남과 북의 서로 노려보는 서리찬 총검사이에 놓여 죽은듯이 누워있는 <<평화>>, 그것을 감히 평화라고 할수 있을가? 그것은 끊어진 레루장에 내려앉은 녹이 쓴 <<평화>>였고 땅속에 묻어놓은 지뢰때문에 신경을 조여야 하는 무시무시한 <<평화>> 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는것같이 <<평화로운 휴전선>> !
평화란 때로는 이처럼 황량하도록 슬픈것이였다.
평화란 때로는 이처럼 억울하도록 아픈것이였다.

8. 대포항의 파도소리
우리가 든 려관은 전태일사장이 경영하는 대포항(大浦港) 원룸민박 3층이였다. 바다를 향해 전부 유리창으로 된 이 방에서는 앉아서도 먼바다를 한눈에 바라볼수 있었다.
대포항은 속초에서 두번째로 큰 부두로서 고기배가 드나드는 어항이다. 저녁에 나간 고기배들이 다음날 새벽이면 돌아오는데 연어, 북어, 문어, 오징어, 광어, 털게, 꽃게, 멍게 등등 나로서는 이름조차 알수없는 수십종의 바다고기들이 살아서 펄떡 거리고있다. 그리하여 고기배가 정박하는 부두가에는 어물전이 즐비하고 회집단지가 들어앉아 오가는 길손의 발목을 끌어당긴다.
속초에 도착한 이튿날 새벽 우리는 일부러 고기배가 들어오는것을 구경하러 나갔 었다. 푸름한 새벽빛을 헤가르며 고기배들이 하나둘씩 귀항하자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우리 고장에서처럼 서로 앞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밀고닥치는법이 없었다. 만선의 고기배가 부두에 정박한 후 선주가 그날의 가격을 내놓고 수요하는 사람에게 전표를 끊어주면 매매는 끝나는것이였다. 남은 일이란 표를 가진 사람들이 선창의 박스에서 고기를 건져가는것뿐, 거기에는 아무런 시비쟁론도 없었다. 대부분의 고기는 사전의 예약에 의해 서울행 물고기운송차에 실려가고 일부분은 시내외의 회집들에 운반되고 이렇게 일은 잠간사이에 깨끗이 처리되는것이였다.
대포항에서 바라보는 동해일출 또한 하나의 장관이다. 빨간 등대와 조도(鸟岛)라는 섬을 배경으로 수평선에서 두둥실 솟아오르는 진붉은 태양은 그대로 사람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희망과 정열의 불덩어리였다. 그 빛을 안고 꿈틀거리는 대포항에서 나는 열심히 살아가는 한국인의 삶을 보았다.
대포항은 고향을 가슴에 묻어놓고 억척스레 살고있는 실향민의 삶의 현장이다. 점포마다 밤중까지 문을 여는데 새날이 밝기전에 또 영업을 시작하니 잠은 어느 시간에 자는지 통 모를 일이다. 일하는 사람이나 쇼핑하는 사람이나 똑같이 잠이 없으니 실로 대포항은 낮과 밤이 따로 없는 세상이였다.
그 세상에 휩쓸려 우리도 야간회집으로 갔었다. 멀리 어로등이 반짝거리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해풍이 불어오는 부두가에서 대포항아줌마가 만들어준 오징어 순대, 새우튀김, 구운 조개를 놓고 맥주잔을 마주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가수 주현미가 부른 노래처럼 <<시간은 자정너머 새벽으로 가는데>> 허연 갈기를 추켜든 밤파도는 대포항정차장기슭의 방파제를 쉬임없이 철썩이고있었다. 그 파도소리는 대포항의 지칠줄 모르는 푸른 숨결이였다. 그것은 또한 비릿한 바다내음 과 대포항사람들의 땀내음으로 반죽된 잠들줄 모르는 대포항의 노래였다.

9. 동문성시장님
속초에 도착한 다음날, 전지부장이 오후5시에 동문성시장님이 우리를 접견하신다 는 소식을 전해주었을 때 나는 몹시 망서리였다. 하지만 내가 그런다고 취소될 일이 아니여서 따르기로 하였다. 5시가 되자 시장님은 사무를 중지하고 우리와 대면 하시였다. 첫 인상에 너그러움과 겸손함과 지성이 돋보이는 년장자로 안겨왔다.
사실 나로 말하면 한번도 뵈온적 없는 시장님이지만 그 존함만은 너무나 익숙하 였다, 훈춘과 속초간의 우호합작도시의 설립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진행되고있는 경제, 문화 교류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나 동문성시장님의 심혈이 스며있다는 사실외에도 한번은 내가 동문성시장일행을 환영하는 훈춘시장의 발언고를 대필한적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솔직하게 마음속의 말을 할수 있었다
내가 고향이 함경북도라고 하니 자신도 이북사람이라고 하시면서 기뻐하시였고 내가 문학을 조금 한다고 하니 자신도 한때는 언론인이였다고 자기소개를 하는것이 였다. 동문성시장님은 중앙대 법대행정학과 졸업생으로서 일찍 조선일보 사회부에서 기자로 근무했었다. 그러다가 군사독재의 피해를 입어 좌절당했고 그후부터 민중을 이끌어 지역사회를 발전시키는 사업에 투신하였다고 하시였다.
동문성시장님은 중국조선족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관심도 일관적이였다.
<<얼마전에 저는 이곳에 와있는 조선족로무일군들과 류학생들을 청해놓고 이런 말을 했어요. 한국이란 나라에 와서 고생을 하시는데 돈도 많이 벌고 공부도 많이 하라고 말이예요. 그렇지만 돈을 벌고 지식을 배운 후 여기서 그냥 살 궁리를 하지 말고 그 돈과 지식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가서 지금 몹시 흔들리고있는 중국조선족 사회를 부축하는 사업에 보탬하라고 했습니다. 중국공민인만큼 떳떳한 중국조선족 으로 살기를 부탁했어요.>>
언론인이며 인격자이며 또 결책자인 동시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 한마디를 한국에 체류하고있는 모든 중국조선족동포들에게 전하고싶었다. 10만 속초시민의 높은 신망을 지니고 벌써10년이나 시장직무를 련임하고있는 동문성 시장님은 그만큼 지식과 덕목과 능력을 겸비한 분이였다. 접견이 끝날 때 우리는 동문성시장님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며칠후 우리는 또한번 시장님의 부름을 받았다. 동문성시장님께서 외출직전에 동부인하여 식사초대를 한것이다. 그 자리에서 동문성시장님은 <<중국 훈춘에서 오신 선생님들이 속초에 머무는동안 날마다 즐겁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시였다.
우리에게 자신의 인장을 박은 초청장은 보내주시고 그처럼 분망한 사업중에도 접견과 초대까지 해주신 속초시 시장님께 나는 같은 말 한마디를 중복할수밖에 없었다.
<<동시장님, 정말 너무 고맙습니다.. 그리고 너무 많은 페를 끼쳐 죄송합니다.>>

10. <<8.15통일문화제>>
속초민예총에서 주최하는 제9회 통일문화제는 8월15일 오후5시30분에 속초시 상징탑이 높이 솟은 청초호유원지 엑스포광장에서 개막되였다. 풍물패의 길놀이가 징을 울리고 상모를 돌리는 흥겨운 마당에서 개막식을 알리는 테프끊기가 있었고 뒤를 이어 상징탑지하전시청에서 조선만수대창작사의 미술작품전람이 시작되고 광장의 로천무대에서는 국태민안을 소망하는 굿거리 한마당, 시랑송, 한국평양예술단 공연 등 다채로운 문예프로가 진행되였다.
장장 4시간에 걸쳐 막을 내린 이번 통일문화제를 평한다면 민예총 강원지회장 성희직시인의 말 그대로 <<통일은 우리에게 무엇인지? 북쪽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있는지? 통일을 앞당기려면 남과 북은 어떤 마음으로 지금부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그런것들을 생각하는 시간>>이였다.
나와 한선생은 바로 이런 행사에 초청받은것이다. 나는 이 문화제에 참가함으로 하여 두가지 배역을 놀아야 했다. 하나는 꽃을 달고 새하얀 수갑을 끼고 가위를 들고 도청과 시청의 지명인사들과 함께 개막식테프끊기에 나선것이다. 워낙은 한선생의 몫인데 내가 나이를 더 먹었다고 막무가내로 떠미는바람에 난생처음 이런 정중한 자리에 나서보았다. 다른 하나는 초대시인으로 무대에 올라 시랑송을 한것이다. 작품은 사전에 련계가 있어 준비했지만 랑송을 해본지가 아득한 일이여서 저으기 근심스러웠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랑송이 잘되였는지 박수소리가 크게 울리고 유관 인사들이 기뻐하기에 망신을 면하였다.
살아보면 생각밖의 일들이 참으로 많다. 내가 이 나이에 고국의 문화행사에 참가하여 꽃다발을 받고 테프를 끊고 시랑송까지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적이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순수문화예술교류를 목적으로 분단의 아픔과 실향의 한을 달래보는 시간은 너무나 감동적이였다. 그리고 속초시민과 함께 평화통일의념을 키우는 마당에서 한민족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단합통일의 디딤돌은 만드는 작업에 중국 훈춘의 조선족인 내가 동참했다는것이 은근히 자랑스럽기도 했다.

11. 트리토네*잠수함
8월16일, 우리는 통일문화제에 초청된 한국평양연극예술단 일행과 함께 해저관광 을 하게 되였다. 이것은 속초민예총에서 우리를 위해 특별히 짜놓은 스케줄이였다.
대포항에서 남쪽으로 1.2키로메터 떨어진 해맞이공원의 선착장에서 우리는 유람선 을 타고 20분가량 해상관광을 한뒤 새들의 섬이라고 부르는 조도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트레토네잠수함에 올랐다.
우리는 비경을 간직한 동해---신비함이 출렁이는 동해의 가슴속으로 들어갔다. 잠수 함은 현대화한 설비로 쾌적감을 주었다. 밀페된 함내에 에어콘, 공기정화장치, 탄산가스제거장치, 그리고 산소공급장치까지 아주 구전하였고 전후좌우로 전망창 (2개)과 관망창(22개)이 설치되여 물속의 풍광을 마음껏 볼수 있었다. 바다밑의 모래 밭을 볼수 있었고 암초와 해초를 볼수 있었고 자유로이 꼬리치는 바다고기떼를 볼수 있었다. 들쑹날쑹한 암벽을 마주하고 해어와 해초가 살아가는 생생한 모습을 바라 보는것은 륙지에서 산과 물을 바라보는것과는 완전히 다른 멋이였다.
신비는 그것만이 아니였다. 어느틈에 어떻게 나갔는지 잠수복을 입은 젊은이가 잠수함밖에서 먹이를 뿌리자 크고 작은 고기들이 모여들어 잠수원을 따라다니는것 이였다. 잠수원이 아무리 쫓아도 그냥 따라오는 고기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해저관광을 마치고 잠수함에서 나와 다시 유람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도 기이한 장면이 있었다. 유람선확성기에서 흘러간 옛노래가 울려퍼지자 삽시에 수백마리의 갈매기가 나타나 배전을 선회하며 너울너울 춤을 추는것이였다. 관광객들은 모두 배전으로 달려나가 이 신기한 장면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망망수해에서 비운에 젖은 우리 민족의 노래를 들으며 살아온 새, 그리하여 우리 민족과 함께 울고 웃을줄 아는 새, 동해갈매기는 이처럼 하얗게 살아가는 정감의 새였다.
바다밑에서 물고기가 잠수함을 따라다니고 바다우에서 갈매기가 유람선을 따라다 니는 속초의 바다! 나는 이렇게 젊음과 랑만이 설레이고 신비와 환락이 출렁이는 동해의 품속에 안겨보았다.

*트리토네---필란드에서 제조한 관광용잠수함의 이름

12. 꽃누르미위원장
하루는 전지부장을 따라 중앙동 신상가에 갔다가 2층4호에서 민예총 속초지부의 변인미공예위원장을 만났다. 20평방 남짓한 작업실 네면에는 회화도 아니고 사진도 아닌 크고 작은 액자가 가득 진렬되여 있었다. 다가서서 보니 전부가 꽃잎, 풀잎으로 만든 <<꽃누르미>>라는 예술작품이였다.
한국의 한 녀사가 연길에 와서 <<꽃꽂이>>를 선보일 때처럼 그리고 광고물에서 <<도우미>>라는 낯선 단어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선뜻 입에 오르지 않는 이름이여서
그 뜻을 물으니 식물을 눌러만든 공예작품을 한국식으로 이름지은 우리 말이라고 하였다.
<<보기에는 간단하지만 품이 많이 들어요. 철을 맞추어 각가지 야생화를 채집하고 그것을 상하지 않게 눌러 건조시킨 다음 자외선과 습기를 받지 않게 보관해야 하니깐요.>>
인미씨의 말이였다. 한어로 압화, 영어로 프레스플라워라고 하는 꽃누르미는 회화적느낌이 다분한 평면조형예술로서 우리의 생활주변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풀꽃 예술이다. 16세기초에 이딸리아에서 시작된것이 2001년에는 영국에서 <<세계꽃누르미 예술절>>을 펼치기에 이르렀고 2002년에는 서울과 요코하마에서 <<월드컵기념 한일친선꽃누르미전>>이, 2005년에는 SBS방송국에서 주최한<<세계꽃누르미전>>이 있었다고 한다.그런즉 꽃누르미는 할일 없는 아녀자들의 꽃장난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자리매김한 하나의 예술업종이라는 말이다.
나는 <<보시다싶이 꽃누르미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지요>>라고 하는 인미씨의 가슴속에 작은 풀, 작은 꽃을 사랑하는 한쌍의 예쁜 눈이 있음을 느끼였다.
그후 그녀를 한번더 만난것은 문화제를 준비하는 엑스포상징탑아래에서였다. 그때 그녀는 핸드백에서 곱게 포장한 작은 함을 내놓으면서 선물이라고 하였다. 포장을 헤쳐보니 밑면을 불수강으로 감싸고 뚜껑에 작은 풀꽃을 박아넣은, 아주 정교하고 사치한 꽃누르미 명함갑이였다. 나는 그만 얼굴이 뜨거워났다. 이번 속포행에서 나는 명함장을 휴대하지 않아 받기만 하고 드리지 못하는 큰 실례를 했던것이다.
나는 귀국하자 명함장부터 갖추었다. 사회교제가 크게 없는 나에게 용도가 많지 못한 명함장이지만 나는 지금 변인미씨가 준 명함갑에 나의 명함을 넣어가지고 다닌다.가끔 그것을 꺼내보면 눈앞에는 해맑은 웃음이 가실줄 모르는 그녀의 청순한 모습이 떠오르고 귀전에는 <<이후엔 명함장을 꼭 지니고 다니세요.>>라고 하는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오는상싶다.

13. 민예총속초문학위원회
한국의 민예총은 민족예술인총련합회의 략칭으로 중국의 문련과 대등한 기구이다. 그 산하에 문학 , 사진, 공예 등 여러 협회(분과)를 두었는데 우리와는 달리 모모 <<위원회>>라고 한다. 례컨대 문학위원회라고 부르는것이다.
우리와 민예총속초문인들과의 만남은 전태극지부장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였다. 전지부장은 두 자매도시의 문화교류를 추진하면서 선후로 두차례의 재중국동포 시화전을 펼치였고 자금을 모아 재중국동포초대시집 <<백두산에 가서는>>, <<백두 대간의 겨울바람>> 등을 출판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작품이 먼저 만나는 계기를 가지였고 지금은 문인들이 만나는 뜻깊은 자리에 나서게 되였다.
우리는 김영호문학위원장을 비롯한 민예총속초문인들의 열정적인 환대를 받았다. 비록 국적이 다르고 자라난 문화환경이 다르지만 이어온 피줄이 같다는것과 같은 문학인이라는것으로 하여 우리는 초면에도 구면같이 스스럼없는 웃음꽃을 피울수 있었다.
우리가 만난 속초의 문인들은 모두가 30대의 젊은이들로서 또 모두가 분단의 아픔에 목메이는 시인들이였다. 훈춘에 한번 다녀간적 있는 김영호시인은 도문다리를 회고하면서 줄달음쳐 건널수 있는 곳이지만 <<너와 내가 건널수 없는 다리>>라고 읊었고 리주동시인은 <<가슴 밑바닥을 치지 않고 부르는 노래>>가 어찌 노래로 될수 있느냐고 정감의 깊이를 호소하였다. 김병우시인은 영금정등대를 가리키며 <<안개비 내리는 날이면 영금정등대가 왜 저리 울고있는지 속초사람들이면 다 안다>>고 하였고 김창균시인은 속초역에서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늦게 도착하는것이 어찌 기차뿐이랴>>라고 통탄하였다. 그리고 강석현시인은 통일이라는 님을 찾아 <<밤마다 돌아눕는 합장의 념주는 도무지 편안할수 없다>.고 토로하였고 리강현 시인은 <<가만히 스며드는 슬픔에 온 누리가 강물이 되여 출렁인다>>고 고백하였다.
우리는 맥주잔을 기울이며 밤이 깊도록 앞으로 어떻게 하면 자주 만날수 있을가 하는 실제문제를 담론하였다. 우리는 또 이미 시작된 시화전과 중학생백일장을 이어 문학세미나, 시랑송모임도 펼쳐보자고 약속하였다. 목적은 단 하나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위하여!>> 이것뿐이였다.
그 밤은 지나가고 나는 귀국하였다. 민예총속초문인들이 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 우리를 접대해준 그 밤을 생각하면 그들의 뜨거운 혈육의 정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14. 비내리는 설악산
<<속초에 갔다가 설악산에 오르지 못하면 평생 유감이 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설악산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부인하지 않을것이다.
설악산은 한국에서 한라산, 지리산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의 허리에 해발1.708메터의 높이로 우뚝 솟은 설악산은 봉이마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량한 감개에 젖어들게 한다. 그러니 속초사람들이 <<설악산은 백두대간이 이 땅에 빚어놓은 화려하고 장중한 예술품>> 이라고 자랑하는것이 무리가 아니였다.
그런데 이래저래 설악으로 가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처음 며칠은 바람이 너무 강해 케이불카가 운행을 정지해서였고 후에는 우리가 서울쪽에 갔다오느라 안배할수 없는데다 비까지 억수로 쏟아져서였다.
드디여 귀국날자를 하루 앞둔 8월20이 되였는데 날씨는 그냥 흐린대로 비를 뿌리며 우리를 초조하게 하였다. 우리의 그런 마음을 알아차린 전지부장이 용단을 내리였다. <<비가 내리여 불편하겠지만 오늘은 어쨌든 설악산으로 가야지요.>>하면서 우리를 자가용차에 앉으라고 하였다
우리를 태운 차는 비바람을 헤치면서 벚나무가 줄지어선 포장도로를 따라 설악쪽 으로 달리였다. 산기슭에 당도하니 이렇게 비오는 날에도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그리고 회사단체로 모두가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로서 신통하 게도 우리처럼 <<속초에 왔다가 설악산을 못보고 가면 안되지>> 하는 사람들이였다.
우리는 순서에 따라 케이불카를 타고 760메터의 높이에서 내린 다음 도보로 옛날에 몽골병과 싸울 때 권씨와 김씨 두 장사가 하루밤사이에 쌓았다는 전설의 성---권금성으로 올라갔다. 벼랑을 타고 오르는 300여메터의 등산길에는 벽간수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대력사의 전설로 굳어진 권금성은 풀도 몇대 없는 웅장한 대머리바위로 솟아있었다. 깊이를 알수없는 골짜기, 깎아 세운듯한 절벽, 산허리를 감도는 망망운해. 자연의 걸작이란 인간의 상상으로는 어림도 없는것임을 깨우치는 설악산! 설악산은 청초호반의 엑스포타워와 함께 속초라는 땅에 거연하면서 멋스러운 형상이미지를 부여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설악을 보았기에 간절했던 소망 하나를 풀었다. 고마운것은 그날 우리가 산을 오를 때부터 내려올 때까지 비가 끊어준것과 려관에 갈 사이가 없어 아침에 신은 구두발 그대로 등산했는데 비에 젖은 바위가 하나도 미끌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하늘이 나더러 설악산을 잘보고 가라고 모름지기 은총을 베푼것 같기도 하다. 딱히 그런게 아니라 해도 나는 그렇게 믿고싶다. 일월성신을 비롯해 삼라만상 모두가 하늘의 품속에서 살고있음에랴.

15. 신흥사 통일대불 (新兴寺统一大佛)
신선이 되여 하늘을 날아다니듯이 케이불카를 타고 설악산을 내려 신흥사로 가는 길목에서 설악을 마주하고 련화방석에 정좌한 불상을 만났다. 몸집이 어찌나 큰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청동불상이였다. 모르긴 해도 현대의 교통수단과 운수능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움직일수 없는 그런 불상이였다.
사찰을 많이 다녀보지 못한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엄엄하게 큰 부처님은 본적이 없다. 소개를 들어보니 높이가 17.8메터, 무게가 108톤이나 되는 이 청동좌불상은 과연 한국 최대의 불상으로 그 정명은 <<신흥사 통일대불>>, 별칭은 <<통일불상>> 이라고 하였다.
얼마나 손꼽아 기다리는 통일이면 불상까지 통일이라는 이름을 지어 만들었을가? 그것은 분단의 력사에 어서 종지부를 찍고 통일의 새날이 밝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속초시민의 피타는 마음으로 주조된것이였다. 그리하여 명산대찰의 입구에서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벌레소리를 가려들으며 이 나라의 세기적소원인 통일을 위한 념불에 전념하고있는것이였다. 여기에서 나는 통일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 깊이 아로 새기고 살아가는 속초의 사유와 행위 방식이 왜 이럴수밖에 없는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였다. 총인구 10만으로 통계되는 속초시는 거주민의 80%이상이 이북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실향민이 가장 많이 집중된 실향민의 도시라는 말이다. 한반도에 살고있는 사람치고 누가 통일을 원하지 않으리오만 그속에서도 속초사람 들의 통일념원이 누구보다 강렬한 원인이 바로 이때문이였다.
통일불상을 만들어 통일을 기원하고 통일문화제를 펼치여 통일의지를 키우고 통일전망대에 올라 통일을 바라보는 속초의 마음은 그만큼 경건하고 뜨겁고 깨끗하고 아름다운것이였다.
설악산과 신흥사를 찾아가는 수천수만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통일불상 앞에서 나도 중국조선족의 일원인 나의 이름으로 잠간 머리를 숙이고 마음의 두손을 모았다. 그리고 그날밤 나는 <<통일불상>>이라는 시조 한수를 만들어 내 마음의 갈피에 끼워놓았다.

나들이 속초길에 만나본 청동부처님
설악산기슭에서 비를 맞고있었어
불상도 통일때문에 가슴앓이 하더군
신흥사 가는 길목 정좌로 앉으신 몸
누구를 기다리시나 여쭈어 보았더니
어여쁜 통일아가씨라고 비에 젖어 답하더군

16. 속초여, 안녕 !
속초사람들의 말을 빈다면 속초는 <<하늘이 내린 살아 숨쉬는 땅>>이요 <<자연과 인간이 함께하는 미래의 도시>>이다. 설악의 절경과 청정 동해바다, 영랑호와 청초호, 그리고 워더피아온천 등 특이한 자연자원을 한품에 안고사는 속초는 한마디로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의 극치를 자랑하는 천혜의 도시였다.
오죽하면 금강산으로 갔던 울산바위가 설악산에서 걸음을 멈춘채 굳어지고 금강산에서 수련을 마치고 돌아가던 신라의 화랑 영랑이 호수의 물빛에 취하여 행장을 풀었을가. 높이 73.4메터의 국제관광엑스포상징타워는 속초의 오늘과 래일을 바라보는 전망대로 솟아있고 쌍벽을 이룬 영랑호와 청초호는 자연과 인간의 마음을 비추는 보석거울로 걸려있다. 이렇듯 장려한 산과 물을 지키여 체통이 우람진 범바위는 오늘도 영랑호 기슭에 엎드린채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있다.
속초가 펼친 꿈의 날개는 백두산으로 가는 배길과 금강산으로 가는 배길을 열었다. 년간 1.300만의 국내외관광객이 찾아오고 년관광수입 3천억원(한화)을 넘기는 속초의 전망은 동해일출처럼 눈부신것이다. 한반도를 철썩이는 동해안에서 국제관광도시로 부상하고있는 속초의 노래는 동해의 푸른 물과 함께 끝없이 출렁이는 가슴 벅찬 희망의 노래, 희열의 노래였다.
나는 이러한 속초를 보았다. 한번 보면 떠나기 아쉬워 다시 돌아본다는 항구도시--- 강원도 속초를 보았다. 하지만 비자에 약속된 날자가 다 되였으니 아쉬운대로 귀로에 오를수밖에…
8월21일, 우리는 민예총속초지부의 전태극지부장, 김영호문학위원장, 김창균시인의 전송을 받으며 <<동춘호>>에 몸을 실었다. 그동안 우리를 보살피느라 신고가 많았던 경기,인천건어물해송상회의 전태일사장님, 지역사랑 나눔실천운동 본부장 김진기님 그리고 민예총속초지부 박정옥사무국장님의 뜨거운 동포사랑도 차곡차곡 내 마음의 그릇에 담아가지고 속초항을 떠났다.
나는 갑판에 올라 취항의 고동소리와 함께 나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속초시 의 외경을 바라보며 해풍에 날리는 작별의 인사를 남기였다.
잘 있으라, 속초여!
속초여, 안녕!


2006년 05월 03일
2006-05-06 16:06:22
211.203.2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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