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낡은 사진 한장
icon 김사비나
icon 2006-05-06 01:24:15
첨부파일 : -
낡은 사진 한 장

집을 치우다 낡은 사진 한 장을 들여 다 보았다. 얼굴을 찡그리며 모자를 거꾸로 돌리고 안간힘을 다해 뛰어 가는 모습이다.
둘째 아들 일학년 때 학교 운동 경기장에서 찍은 사진이다. 여덟 명이 엎드리고 있다가 선생이 호루라기를 불면 뛰어 가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물론 가장 잔약한 둘째 놈이다. 그날 경기에서 맨 꼴찌이지만 완주는 했다. 어려서부터 아우를 연년생으로 보아, 젖도 사랑도 많이 받지 못한 녀석이 제동생보다 더 작았다. 걸음도 제일 늦게 걷기 시작을 한 녀석이다.
제 여동생은 통 통하고 튼튼하여 오빠보다 더 크고 튼실하였다. 그래서 인지 제동 생을 잘 자리 주니, 그냥 놓아두고 둘째 놈을 챙기게 되었다. 유독 투정도 많고 병치레도 많았다. 그날 경기에 뛰어 가다가 쓰러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 하였지만 끝까지 경주하여 완주 하였다.
살다 보면 힘들고 어려워서 포기 하고 싶은 것이 많다. 기껏 정상 까지 올라와서도 포기 하고 다른 길을 가는 사람도 많다. 더러는 자기가 전공한 것 아닌 선택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우리의 삶이 내가 설정한 대로 곧장 가준다면 무슨 문제가 있으며 다들 행복 하게 살아 갈 것이다. 핑크빛 인생이 될 것이다. 인생을 한번 시험 하여 보고 다시 정식으로 살아 가나다면 누구든 아름다운 설계를 가지고 잘 살 것이다.
한국에서 위로 남자 두 아이를 이렇게 키워 보리라 작심을 하였다, 큰놈은 튼튼하니 사관학교를 보내어 별을 달은 장성을 만들어 보리라하였다. 큰 아이는 덩치와 달리 어수룩하고 세상 말로 두를 성이 없다. 임기웅변 같은 것 기대 못하고, 미련하고 고지식하다. 장점이 되는지 ,단점이 되는지 모르지만 남편은 자기를 닮은 큰 아들을 별로 예뻐하지 안했다. 그래서 웅변을 가르쳐서 별을 달게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둘째는 잔약하니 무얼 할까 하다가 의사를 만들어 보리라 하는 꿈이 있었다.
이민을 와서는 우리 아이를 이렇게 키우리라 작심한 것을 생각 할 겨를이 없이 새로운 곳에 뿌리를 내리는데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아이들에 대한 꿈이 있었나 하며 살았다.
여러 민족 속에 섞이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아이들, 그들도 얼마나 힘들게 타민족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를 하였을까 싶다.
미국에 교육은 한국처럼 전인적은 교육을 시키지는 안는다. 한국 교육은 일주일에 도덕, 서예, 미술, 음악, 체육, 골고루 가르치지만 미국 교육은 그런 것은 자기가 택하여야 지만 할 수 있는 과목이다.
이런 교육으로 나는 한동안 우리 아이들 정서가 부족 하지 않나 생각한 적도 있었다.
우리는 초등학교 육년 중고등 6년 동안 음악을 배우고, 그림을 배우고, 체육시간도 있고, 우리학교는 서예도 있었다. 일주일에 한 시간 있어서 정서를 배워 나갔다. 우리 아이들 정서하고 먼 생활 경쟁에 뛰어 들어 살아남기 연습 먼저 하여 저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인정이 메마른 어른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고민을 많이 하였다.
큰아이를 한국에서 성격을 바꾸어 보리라 하는 마음으로 세계 명작 소년 소녀 책을 질로 사다 놓아 주었더니, 그 책을 읽고, 꿈을 꾸더니 미국에 와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고 보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다행이다 하는 마음이었다. 또 큰애가 다른 아이에게 항상 얻어맞고 울고 다녀서 태권도를 가르쳤다. 그러니까 얻어맞고 다니는 것이 없어 졌다. 그렇다고 남을 먼저 때리는 성격도 아니니 누구를 때렸다고 사고 친척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더니 생뚱맞게 큰 놈이 목사가 되어 강대상에서 그 어눌한 목소리로 설교를 하고 있다. 아이러니 한 것이 가장 말솜씨가 없는 사람이 어찌하여 설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안했다. 처음 신학을 간다 할 적에도 무척 말렸다. 저게 무슨 목사가 되는가 하고, 그래도 굽히지 않고 간다 하여 말리지 못했다.
둘째 놈은 한국에서는 책가방 들기를 힘들어 하던 아이다 . 한국에서 아이들 공부 할 적에는 책가방이 아이들 보다 더 크게 하고 다니는 것을 정상으로 보았는데 미국에서 아이들 덜렁 덜렁 빈손으로 학교를 가는 것을 보며 저애들이 공부 하는 아이인가 하였다.
특별히 둘째 놈은 잔약하여, 중고등 학교를 미국에서 다니면서 학급에서 더러 얻어맞았던 같았다. 어느 날 합기도를 한다고 하여 돈을 주었다 . 아주 열심히 합기도 장을 다녔다. 도장에 아주 살다시피 하는가. 같았다. 그러더니 검은 띠를 달고 고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문 배달하고, 피자집에서 일하면서 시장을 누비며, 아이들이고 놀고만 다니더니, 막상 대학을 가려 하니 갈 데가 없는 모양이다.
제 형은 C M U 에 다니고 있는데 아차 싶은지, 피그버그 대학에서 오라는 통지를 받고 , 방학동안 올라가더니 그해 공부를 제일 꼴등을 하고 간신히 학교를 다니는 것이다.
그러더니 이학년 되어서 안 되겠다 싶은지 머리 싸매고 공부 한다고 내게 통보를 하였다. 그해 공부는 올A를 받았다고 흥분하여 전화가 왔다. 그해 여름 방학에 내려 왔을 아이가 버들가지처럼 말라 있었다. 그렇게 십년을 집에 왔다 갔다 하며 공부를 하였다.
힘들면 집에 와서 한 일 년 쉬면서 청소 일 따라 다니다가, 다시올라가 학교를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더니 펜실베이니아 대학을 치과를 들어갔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를 하여 졸업을 하였다.
지금은 자기 병원을 두 개를 가지고 의젓하게 살아가고 있다. 맨 꼴찌에서 모자를 거꾸로 쓰고 달려갔지만 완주한 아들이다. 그 아들의 사진이 오늘 아침에 우연히 보게 되어 감개가 무량하다. 그 아들이 내가 책을 내는데, 책값을 지불하고 있다. 살아 갈만한 세상이다.
2006-05-06 01:24:15
204.210.105.209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피터 2006-05-06 15:57:15
그래도 성공한 이민 가정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