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호로자식은 이렇게 말했다'수기집 발간 협조
icon dbeowl
icon 2007-07-01 10: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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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대한민국6.25전몰군경유자녀 유대지(58세)입니다. 한국전쟁으로 멸문지화의 그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의 저의 인생사를 일본어판,중국어판, 영어판으로 출판하고싶습니다.
'전쟁은 짧지만,그고통은 대를 이어 영원하다' 라고 저는 말하고싶습니다.

6.25 이후 사상 처음으로 유자녀가 수년간 준비하여 재미와 눈물이 어울어진 수필형태로 구성하여 집필중에 있으며,조만간 완료단계에 있습니다.

전후세대에게 전쟁의 참상을,전세계민들에게는 평화의 메시지가될것입니다.

저의 육필수기집 출판에 대하여 상담을 원하시는 분은 연락 주세요.
감사합니다

010-6255-9678
wp53727@yahoo.co.kr

"胡虜자식은 이렇게 말했다 "

저자는 1949년 대한민국 근대화를 상징하는 공업도시 울산에서 건국의 경찰인 유귀용경위와 원옥잠여사 사이에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유귀용경위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한해전인 그해 3월 저자가 임신 일 개월도 채 안된 그때 27세 신혼의 젊은 나이로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장렬히 순국하셨고 어머니마저도 저자 나이 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그후 저자는 오로지 할머니 슬하에서 울산초등학교,울산제일중학교,동래고등학교를 마치고 만학으로 44세 때 명지대학을 수료했다.

저자가 22세 되던 봄. 동향의 학성이씨 가문의 이순필 처녀와 혼인하여 슬하에 네 딸을 둔 가장이자 사회인으로서 울산시지방공무원으로서 15년, 국가보훈처 산하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서 22년을 근무한후 지금은 선친의 위업과 고향사랑하는 사업에 나서고있다.

한편 저자는 1994년 한국전쟁 발발 44주년을 맞아 당시 핵문제로 남과 북이 전쟁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 전쟁반대를 외치며 사상처음으로 부부가 강원도 고성에서 백령도까지 20일간 걸어서 휴전선 155마일을 횡단하였다. 지금까지 80여회 4만5천km 지구한 바퀴 반을 넘는 거리를 달리면서 조국의 평화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전하고있다.

2000년에는 조국의 평화를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뉴욕-워싱턴-덴버-샌프란시스코- LA까지 현지에서 차를 렌트하여 사상 처음으로 북미대륙38선을 횡단하는데 성공, 현지 교민들로부터 성원을 받기도했다. 앞으로 저자는 통일이 된후에도 계속 38선을 달릴 각오를 하고있다.










육필수기집을 내면서

동서고금을 통하여 비참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첫째, 늙은 홀아비, 둘째, 늙은 홀어미, 셋째, 부모없는 아이, 넷째, 자식없는 늙은이, 바로 사궁(四窮)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네 가지 가운데 한 가지도 거치지 않고 태어나 다복하게 살아 가건만, 어찌하여 할머니와 나는 인생 시작부터 이렇게 힘든 멍에를 등에 지고 허우적대며 시작해야만 했을까.

이것은 바로 할머니와 나의 숙명적인, 그리고 비극적인 인생의 시작을 알려주는 적신호였다.

논어 학이편(學而編)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살아계실 동안은 그 뜻을 살펴 볼것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 행한 바를 살펴볼 것이니, 3년 동안은 아버지가 행하신 바 도리를 고치지 않아야 효자라고 말할 수 있다” 고 했다.

그런데 나는 나를 낳아 주신 아버지의 얼굴도 본 적이 없고, 그넓은 가슴에 한 번 안겨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아버지라고 불러 보지도 못했으며, 그 목소리도 들어보지 못했다.

이처럼 아버지라는 존재는 내가 태어 날 때부터 나에게는 전혀 손길이 닿지 않는 저 먼 세계로 인식되어왔으므로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싶어도 그것을 행할 수 없으니 참으로 나의 인생은 기구한 운명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머니 뱃속에서 내가 채 일 개월도 되지않았던 그때, 어머니 자신도 임신한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그때, 나의 아버지는 전쟁으로 인하여 우리곁을 떠나 순국하셨던 것이다.

바로 나는 유복자,삼대독자, 대한민국 6.25전몰군경 유자녀,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얕잡아 보던 저 비극의 호로자식이다.




어릴 때의 그날 일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그해 한여름 깊어 가는 밤이었던가. 마당 한가운데 모닥불에서는 모가와 하루살이를 쫓기위해 옥수수 껍질을 태운 흰 연기 꼬리가 이리저리 흔들거리고 파란 모기장 안에서는 어느새 들어왔는지 모기 몇 마리가 앵앵거리면서 잠자리의 어린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깊은 잠에 빠졌으리라고 생각하신 할머니께서는 부채를 흔드시고 과일을 드시면서 평상에 앉아 동네 아낙네 서너명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그런데 그때 내 귀를 강하게 때리는 엄첨난 이야기들이 아주 조용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할머니의 입을 통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에 대한 그 슬프디 슬픈 사연들이...

(그래 내성이 유가니까 유자녀, 유복자라고, 유가족이라고 저러시는구나)

나느 잠결에 단순히 생각하면서 그날 밤 그렇게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그날밤 할머니께서 하신 그이야기들이 한줄기 섬광이 되어 나의 뇌리에 닿았을 때 나는 초겨울 바람을 맞으며 강둑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강둑에 혼자 웅크리고 앉은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얼마나 울었던가.

할머니께서는 아마 어린 손자가 아버지가 안계신것을 몹시 상심할까봐 평소 나에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았으리라.




1949년 그해는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사변 발발을 한 해 앞둔 시기로서 좌익과 우익의 사상싸움이 그 어느해보다도 치열했으며 그만큼 국내친안도 어지러웠다.

그때 선친께서는 대한민국 건국의 경찰로서 경상북도 경찰국 경주경찰서 안강지서장으로 재직하고 계셨다.

그해 3월 23일 미명의 그 시간. 경상북도 경주군 안강면 두류리. 인적이 드문 산골 어느 오두막집에서 발생했던 그 비극의 전투. 대한민국 경찰관 세명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무력부 산하 인민군 소속 빨치산 부대원 이십명과의 전투.

나의 선친께서는 바로 그 전투에서 직원 두 명과 함께 조국의 수호신으로 순국하신 당시 이십칠세의 유귀용 경위이시다.

아! 하늘도 땅도 무심하셔라.

나는 그해 십일월에 이세상에 태어났으니.........

나에 대한 비극의 역사를 모두 알았을 때 나의 가슴속에서는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크나큰 격랑의 파도가 엄습해 왔으며, 나는 한동안 참을 수없는 슬픔에 빠졌던 것이다.

그후 나는 차차 성장하면서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하신 선친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차츰 자긍심과 존경심으로 변해 감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평소 나의 가슴에 선친에 대한 그리움이 남달리 쌓이고 쌓였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자수성가의 길을 걸어 가면서 숱한 역경을 할머니와 가족들이 함께 겪었다. 그런 난관에 봉착할 때면 나는 선친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가지고 색바랜 선친의 사진 앞에 앉아 마음을 정리한다.

(아버지,아버지, 나의 아버지, 보고싶습니다. 저를 힘껏 껴안아주세요)

그러노라면 신앙과도 같은 사고와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강한 위력이 나에게 다가온다.그러한 현상은 아마 선친께서 이 세상에 겨우 남기신 하나뿐인 당신의 혈육에 대한 강한 훈계요, 어두운 망망대해에 뱃길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고 있는 난파선에 마치 환한 등대 불빛과도 같은 구원의 이정표가 아닐까. 이렇게 비춘 그영롱한 불빛은 힘들고 모진 세파를 헤쳐 나가는 나에게 안정과 희망, 바로 그것이었다.

한가정과 가문에 아버지가 안 계신것은 대문이 없는것과 같고, 어머니가 안 계신것은 방문이 없는것과 같으며,그리고 일가친척이 안 계신것은 울타리가 없는것과도 같다.

나는 이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대문과 울타리가 없었고, 다섯 살 때는 방문마저 없어지는 쓰디쓴 비운을 그 누구보다도 일찍 겪으며 성장했다. 그래서 할머니와 어린 나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거칠고 세찬 찬바람을 혼신의 힘으로 막아내야 하는 힘겹고 고달픈 인생의 길을 걸어야만 되었다.

그후 나는 이십대 초반에 가정을 가짐으로서 그동안 방황하던 나와 할머니의 인생항로에 닻을 sflf수 있는 작은 안정과 평화의 맛볼수 있었다. 나는 부모님께서 다하시지 못하신 그대문과 방문의 역할을 처와 함께 이루는것이 부모님에 대한 효도요, 나의 성스러운 소임임을 확신한다.




년 올해는 동족상잔의 육이오 사변이 발발한 지 어느덧 육십년이 되는 해이다. 이전쟁으로 인하여 수많은 남북한 우리민족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참전결의에 따라 이땅에서 숨져간 젊은이들의 그고귀한 영혼.. 우리는 민족끼리 무엇을 위해서 서로 피 흘리고 이땅에 묻쳐야만했는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전쟁후 지금도 이 산하에는 변한게 아직 아무것도 없다. 삼팔선에서 휴전선으로 남북의 경계선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민족이 바라는 민족통일의 그염원은 아직도 요원하게 보인다. 우리부부는 지난 1994년 유월경 남과 북이 핵문제로 전쟁발발 일촉즉발의 초긴장의 상태에서 동부전선 고성에서 서부전선 백령도까지 이십일간 사상 처음으로 걸어서 휴전선 155마일을 횡단했다. 그리고 1997년 1월부터 6.26사변 발발 50주년이 되는 2000년 유월까지 3년 6개월간 매월 동부전선 강원도 양양에서 임진각까지 삼팔선을 승용차로 달렸다 그후 일년에 두 번정도 삼팔선을 승용차로, 마라톤으로, 자전거로 달렸다. 지금까지 80회 4만5천km, 지구 한 바퀴를 넘게 도는 이기나긴 거리를 우리부부는 비가오나 눈이오나 달리고 달렸다. 그리고 2000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현지에서 승용차를 렌트하여 사상처음으로 뉴욕 -워싱턴 -덴버 -샌프란시스코-LA 까지 4,000키로 13개주를 경유하면서 북미대륙을 위험을 무릅쓰고 성공적으로 횡단하여 현지교민들의 성원을 받기도 했다. 이어 인천에서 중국천진 베이징 인민일보사까지 선박으로 기차로 달려서 우리민족의 조국평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왜 우리부부가 이토록 기나긴 세월동안 삼팔선을 달려야만 하는가?

왜 나의 인생역정을 이렇게 기록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전쟁이 얼마나 무섭고 우리인간에게 평화와 가정이 그 얼마나 중요한가를 국민과 전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몸으로, 특히 전후세대에게 이 사실을 똑똑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우리민족은 반만년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너무나 많은 전쟁속에서 고통을 받아왔다. 이제 21세기에는 우리민족의 소원인 민족통일을 반드시 이루어야 할것이다. 민족통일. 그 찬란한 염원을 우리모두 힘을 합쳐 민족이 하나 될 때까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될 것이다. 그래야만 인도시인 타고르가 동방의 등불이라고 우리나라를 이름 지은 그 이치에도 부합될것이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어서, 이념을 넘어서, 시대를 넘어서 이 땅에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숨져간 모든 사람들, 그리고 얼굴 한 번 뵌 적 없이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하신 대한민국 건국의 경찰관이신 나의 아버지 고 유귀용 경위의 영전에 삼가 이 책을 바친다.

2010년 6월 25일

동부전선 양양에서 중부전선 임진각을 달리면서

유대지 拜

호로자식의 유래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전란 (戰亂)이 계속 이어져왔으며, 이러한 비극은 지금 이 시간에도 멈추지 않고 있으니 한마디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전쟁의 와중에 발생하는 죽음의 기나긴 행렬 그 뒤안길에 눈물짓고 있는 불쌍한 모습들...

우리민족 근대 역사상 삼대전란을 꼽는다면, 아마 조선시대 7년간 왜구와의 임진왜란,정유재란, 2년간 청나라와의 병자호란, 그리고 금세기 최대의 동족상잔인 한국전쟁이 아닐까. 이러한 전란을 거치는 동안 우리 민족은 말로서 차마 표현할 수 없는 큰 고통을 당하였다. 더욱이 우리는 지형학적으로 인접한 북방 이민족과는 단군이래로 영일이 없었으며, 항상 대결과 반목,긴장의 세월 바로 그것이었다. 한마디로 선린의 기간은 짧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 호로자식(胡虜子息)이란 이용어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유입되어 회자되고 있는지 그유래를 명확히 밝히는 문헌은 없다. 다만, 역사학적으로, 지리학적으로 끊임없이 북방 이민족과 전란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우리 민족사이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접근해 볼 따름이다.

어원(語原)을 거슬러 올라가보며, 그시대상을 알아 낼수있는 경우가 많다. 그가운데 바로 이 호로라는 글자도 포함될것이다. 우리나라 북방에는 많은 이민족이 시대를 따라 명멸했다.

그가운데 흉노(匈奴)족이 있었는데, 이들은 BC 3세기경부터 몽고 지역에 벙영하였던 유목민족으로서 차차 성장하여 우리 민족과는 수세기에 걸쳐 피의 역사를 아어왔던 이민족 가운데 하나로 역사에 기록 되어 있다. 우리민족은 자신들을 괴롭혀 혼 북방 이민족을 적대시 하는 의미에서 뙤놈,오랑캐의 아들,즉 ‘호로자식’ 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여기에는 상대방에게 심한 모멸감과 그들을 비하시키기 위한 뜻이 담겨있다.

결론적으로. 여러 가지 정황를 감안해 볼 때, 이용어는 우리민족 사이에서 전란 속의 북방 이민족을 통칭하는 말로 구전되어 온 전래의 순수한 토속 용어라는게 옳을것 같다.

근세에 들어서는 이 말의 뜻이 변질되어, 버릇없이 무례하게 행동하는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있는데 잘못 쓰여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을 들면 십대 전후는 아버지가 안 계시는 이들에게, 성인들 사이에는 예의범절이 미흡하거나 타인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에게 적용되고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이민족과의 전란이 끝난 지도 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구태의연한 이 용어가 우리사회에 버젓이 아직도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 모두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한때 이 용어가 사용되던 그 어두운 전란의 시대는 지나간 지 오래전되었고, 이 말을 주고 받는 사람 모두가 이민족이 아닌 바로 한 핏줄을 나눈 배달의 민족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전쟁의 악순환을 떠올리는 이용어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져야 된다는 내나름대로의 생각이다. 따라서 이 수기집 제목을 마지막으로 이 단어를 영원히 이 땅에서 퇴출 시키도록 우리 스스로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발상은 우리 민족 정서에도 부합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이 수기집 제목을 두고 나름대로 많은 우여고절과 고뇌의 시간을 가졌다. 너무 자신을 비하시켰다는 둥, 나의 처지는 이용어와는 사뭇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둥...

그러나 나는 이수집출판의 목적이 전쟁의 참상을 알리면서 삼팔선을 달리면서, 아버지를 추모하면서 이제목을 지켜나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처와 네딸의 지지, 그리고 주위의 많은 분들의 성원에 감사드린다.

끝으로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거야할 대목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이 수기집의 호로자식 용어는 어디까지나 작가 개인에게만 국한되며 어떠한 특정인,어떠한 특정 집단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이다.

이점 일부 독자의 오해가 없으시길 바란다. 감사합니다.




故 劉貴龍 경위 일대기

1922년 울산에서 劉日祚씨와 金章二여사 사이에 이대독자로 출생

1943년 태평양전쟁시 남양열도에서 3년간 강제징병

1946년 대한민국 건국의 경찰관으로 임용

1946년 元玉潛 처녀와 혼인

1947년 5관구 경찰청 특별경비대 근무(경상북도 경찰국)

1947년 21구 경찰서 근무 (경주경찰서)

1949년 경사 (7급 1단계)로승진.경주경찰서 안강지서장으로 근무

1949년 3월23일 경상북도 경주군 안강읍 두류리에서 직원2명과 빨치산 20명과 교 전중 순국

1949년 1월10일 삼대독자,유복자,유자녀 유대지출생

1986년 서울시 동작동 국립현충원 경찰묘역에 안장




옛집별곡

울산광역시 중구 성남동 000 번지, 대지59평, 건평16평정도, 정남향 목조와가 단층,방세칸, 창고 한칸, 쓸어져갈듯한 빈 돼지우리, 잘 닫쳐지않고 밤에도 잘 닫지 않는 형시뿐인 목조대문, 마당 건너 채전 20평, 흙담,목제담,항상엉성하게 축 널어진 철조망담, 스칠때 냄새를 풍겨되는 재래식 화장실,뒷켠 자갈 하수구, 된장과 김치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런저런 장독들, 비가 올 때면 어김없이 물이 고이는 마당....

대충 내가 유년기를 보내며 어릴 때 정들었던 우리집의 대충 정경이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1학기까지 무려 16년간 이집에서 할머니와 생활해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잔뼈가 굵었고 영욕이 서린 그립고 듬뿍 정들었던 집이다.

이집은 신작로에서 다소 들어가 긴 골목길을 끼고 위치해 있었기에 무엇보다도 교통사고의 위험이 없어서 할머니의 걱정을 덜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가까워서 통학하기도 수월했고, 신작로로 조금만 나서면 부산행,경주행, 포항행,당월행, 등 시외버스 정류장이 있었으며,남쪽으로 나서면 소방서와 세무서 등 관공서도 가깝게 있었다.

특히, 우리고장의 황폐한 임야를 체계적으로 계획을 수립해서 산림을 조성하고 푸른산을 가꾸는 업무를 관장하는 경상남도 산림국 산하 울산 사방괸리소 건물의 남쪽 벽을 끼고 있어서 누군가 나의 집 위치를 물어오면, 나는 항상 사방관리소 옆이라고 대답했고 상대방도 그정도만 이야기해도 쉬이 알아주었다.

하여튼 우리집은 시내한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우리집 담벽을 끼고있는 그 골목길에서 동네 친구들이랑 갖가지 놀이를 즐기면서 유년기를 아무 탈 없이 보낼 수 있었다.

그 당시 할머니와 나는 방 한 칸을 사용하였고, 내가 시험기간이라든지 여름철에는 간혹 작은 방을 사용하기도했다. 그리고 나머지 방 한 칸은 할머니께서 임대하셨는데 내 기억으로는 십수년이 지날 때까지 세입자가 세 번밖에 바뀌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그분들과 허물없이 오붓한 분위기에서 잘 지냈다.

그것은 아마도 할머니께서 그분들에게 집주인으로서 정신적인 부담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끈끈한 정으로서 그분들을 대하셨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마당건너 채전에는 할머니께서 손수 동한기를 제외하시고는 일년 내내 배추,상추, 토마토, 옥수수, 깻잎, 가지 등 작물을 번갈아 심어서 부식과 간식을 자급자족하셨다. 늘 부지런하신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수확기가 되면 할머니께서는 평소 가깝게 지내는 이웃짐 아낙네들을 불러모아 많은 대화를 나누시면서 작물 가운데 일부를 나누어 주시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속으로 (할매는 씰때없이 머할라꼬 저래 인심응 쓰는지 모르겠네.상추는 저만이 많이주네 참.) 하며 아까운 생각을 가졌는데,후에 나는 그생각이 내욕심이라고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중앙시장으로 멸치장사를 가신 뒤에는 우리집은 마치 무주공산같이 온동네 친구며, 심지어 흰둥이 검둥이 등 온갖 동네 개들까지도 마당구석에서 먼지를 날리며 마음껏 놀았다. 다시말해 할머니와 어린 나의 관리감독이 미치지 않았던 우리집 마당은 주변에 적당한 놀이터 대신으로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심적부담이 없는 사례들이 할머니와 내가 이웃사람들이랑 더욱 더 친근하게 지낼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되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폭우가 쏟아진다든지 특별한 사연이 있을때는 간혹 시장에 가시지 않거나 조금 일찍 귀가하시는 날이면 으레 인근 아줌마들이 할머니를 에워싸고 마루턱에 앉아서 간식을 즐기면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할머니,요즘 손자 학교 성적이 올랐다면서요?” “할머니께서 입고 계시는 그옷이 참 어울리네요.”“글쎄, 건너편 동네 김씨는 술을 그렇게 고주망태로 마시다가 회사에서 나왔데요, 그 불쌍한 그여편네가 울고 있데요.”“바람난 여편네 때문에 신씨 있잖아요? 안경쓰고 글쎄, 그남편이 꼬리를 잡아서 밤마다 몽둥이로 개패듯이 팬데요, 그 등살에 아이들 두고 그예쁘장한 여자가 그냥 가출했다나요, 그아이들이 불쌍하지요. 안그래요? 할머니”

이런저런 세상사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늘어놓는다. 그러면 잠자코 듣고 계시던 할머니께서는 느긋하게 인생의 선배로서 곧은 인격자로서 좋은 말씀과 충고를 통해서 합당하신 해법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할머니께서는 시장에서 들은 저간의 이야기들을 그분들에게 이야기해줌으로서 항상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셨다.

할머니께서는 요리솜씨도 탁월하셨는데 특히 동한기때 김장과 초봄에 된장 제조법은 그야말로 조리 솜씨 가운데 으뜸이셨다.

계절따라 매년 맞이하는 이 두 가지 대사들을 할머니께서는 재료구입단계부터 마무리까지 정성을 다하셨으며 갖가지 양념들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구슬 담방울을 흘리시면서 손수 만드셨다.

할머니께서 하시는 이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그맛이 좋았기에 이 시기가 도래되면 자연스럽게 이웃 아무머니들이 그비법을 전수받기 위해 우리집으로 모여들곤 하였다.

할머니의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로 하여금 할머니와 나도 덩달아서 이웃에 평판이 좋았다.




옛날 우리집 남쪽 모서리 경계를 끼고 수령이 꽤 오래 되어 굵은 뿌리,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한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별로 거름도 안 준 감나무였지만, 매년가을철이 되면 먹음직한 큰 홍시가 주렁주렁 달렸는데, 감나무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맘 때가 되면 할머니와 나는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몰래 그홍시를 따가지 않나 하는 마음으로 자주 감시의 눈길을 돌리기도 했다. 홍시가 적당히 익으면 택일해서 할머니와 나는 홍시를 조심스럽게 따서 집에큰 장독을 골라 그속에 비축한 뒤 여러 날을 두고 간식으로 여러날을 두고 즐겨먹었는데 홍시 그맛이 침으로 입에 살살 녹을 정도로 좋았으며 수확때는 일부를 이웃에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 해 늦은 가을철 어느날이라고 나는 기억한다.

옆집 N형사가 우리집 감나누 가지일부가 자신이 단니는 골목길 쪽으로 넘어와서 통행에 불편을 준다는 이유로 할머니에게 사전 의논 한 마디없이 감나무 밑둥을 도끼로 마구 찍으려는게 아닌가. 이를 알아 차린 어린 나는 중앙시장으로 뛰어가 할머니에게 급보를 전했고 할머니께서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발걸음으로 부랴부랴 나와 함께 감나무가 있는 사건의 현장으로 달려왔다.그리고 도끼를 손에 쥐고있는 N 형사와 맞대응하면서 심하게 다투게 되었다.

“아니 N형사요! 이게 데체 무신 짓잉교! 이감나무가 우쨋다고 그도끼로 짤를라고 하능교? 어디 한번 찍어보소! 벌건 대낮에 그도끼 가지고 이 감나무 찍를라카면 차라리 내부터 죽이소! 동네사람들아! 이리 좀 와보소! 세상에 이런법이 어디 있능교?”

이렇게 할머니께서 고함을 치니 이웃사람들이 한 명 두 명 웅성거리며 그 감나무 아래로 모여들었으며 서로 큰소리가 오가며 사태가 사뭇 심각하게 전개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자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서 할머니께서는 지금까지의 감나무 내력과 상대방의 이런 무례한 행동에 대하여 집중 성토하시면서 자신과 나에 대해서도 동정어린 말씀을 호소하시기도 했다. 다시말해, 이감나무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심어져 내려져 왔으며 옆집으로 가지가 뻗어가서 피해가 다소 있다면 사전에 의논을 해야 되고 자신과 어린손자를 깔보고 이런 불상사를 유발시킨 N형사의 무례하한 행동에 대하여 분노의 말씀을 하셨다. 오십대 할머니와 삼십대 현역 형사와의 이날 대결은 주위 사람들에게 충분히 흥미를 끌만한 사건이었다. 그날 나는 근시머린 눈길로 사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자신의 부당성을 깨달은 N형사는 스스로 물러서게 되었다.

다행히 감나무의 도끼흔적도 대단치 않았고 주위 분들의 위로를 받으신 할머니께서도 감나무에 대하여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으셨다.

그날 사태에 대하여 N형사가 부당하다는 여론이 형성된 것은 평소 할머니와 나에 대한 호감도 한몫 톡톡히 했다고 생각한다.

할머니의 그날 대응자세는 단순히 훼손위기에 처한 감나무 구출 문제뿐만이 아니라, 바로 풍전등화의 가문을 외세로부터 수호하시겠다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다시말해, 그 누구든 자신과 손자, 그리고 가문에 불법부당한 도전을 해 올 경우에는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도 용서치 않겠다는 성전, 바로 그것이었다.

가장으로서 손자와 나의 골목 친구, 그리고 많은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논리적인 언행으로 N형사를 당당하게 물리친 할머니의 그날 그 모습은 나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었으며, 그날 감나무 대첩사건은 사람들 사이에 오래 회자(膾炙)되었다.

그 시절 장마철이 다가오면 시내 하수구 시설이 부실하여 항상 온 시내가 침수되고 우리집도 빗물이 마루까지 차올라서 온갖 가재도구가 함께 물에 젖어드는 등 피해가 컸다. 그러면 할머니와 나는 겨우 이불 몇 가지와 꼭 필요한 가재도구,그리고 교과서를 챙겨서 지대가 높은 먼 친척집으로 피신해야만했다. 매년 찾아드는 홍수로 인하여 할머니와 어린 나는 항상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옛날 그집을 잊지못하고 있다.

어릴 때 나의 아름다운 추억과 그리고 꿈이 서리고 할머니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그옛날집. 잊지못할 갖가지 사연들...

내가 동래서 하숙을 하던 그해 고등학교 일학년 여름방학 때 집에 오니 할머니께서는 그 집을 처분하시고 변두리 북정동으로 이사하셨다. 아마 할머니께서는 그 당시 나의 하숙비며, 생활비를 당신께서 혼자서 감내하기가 힘드셨으리라.

손자의 부산 유학비, 생활비로 인하여 그 정들었던 집을 팔지 않을 수 없었던 할머니의 그 고뇌를 일찍 알아 차리지 못한 내가 원망스럽다.

그날, 나는 할머니가 옆집에 맡겨주신 새집 약도를 손에 쥔 채 할머니와 생활했던 텅 빈 방안과 집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눈시울을 젖었다.

(그래, 그 언젠가는 이집으로 반드시 돌아 올 것이다!)

이러게 나는 굳게 결심하고 어둠이 깔린 정들었던 골목길을 뒤로한 채, 책가방을 들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호로자식은 이렇게 말했다

오! 천지신명이시여

오늘은 년 정월 초하루,지금은 새벽 네시나이다.

삼라만상이 잠들어 있는 시간이나이다. 이곳은 우리부부가 지난 이십년 동안 승용차를 수많이 타고 삼팔선 국토횡단 행사를 가졌던 동부전선, 강원도 양양군 하정광이나이다. 동해물결이 넘실대는 칠흑같은 어둠속 백사장에서 천지신명께 정성을 다하여 이렇게 삼배를 올리나이다.

천지신명께 먼저 저이 소개를 간단히 올리게 나이다.

저는 강릉(江陵)유씨(劉氏) 병사공파(兵使公派) 십팔대손으로 삼대독자,유복자, 그리고 파란만장한 대한민국 6.25 전몰군경 유자녀 유대지나이다.

1949년 기축년 울산에서 태어났으며, 처는 동갑내기 학성(鶴城)이(李)씨가문의 이순필이나이다.

저희부부는 1971년 신해년에 혼인하여 슬하네 네딸을 두고 경기도 성남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국민이나이다.

천지신명께서 만드신 이 동해물은 단군께서 나라를 세우신 후 반만년동안 우리 겨레에게 많은 사연이 서린곳이며, 더욱이 이곳은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6사변이 발발했던 동족상잔의 아름이 간직된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육십년전.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호로자식의 험하고고 고달픈 인생의 길을 걸어 온 한 인간이 이렇게 천지신명님께 엎드려 말못할 사연을 고백하고자 이곳을 찾아왔나이다.

지금 저는 피눈물이 뒤범벅되어 저의 작은 심장을 타고 내리는 처절한 한국전쟁의 그 호로자식이나이다.

적막과 고독, 그리고 온갖 모멸감에 몸서리치던 이땅에 추락 된 눈물의 그호로자식이나이다.

그 누구 한 사람 관심없었던, 그 누구 한 사람 가꾸어 주지 않았던 척박한 대지위에 잘못 심어진 한 포기 잡초와도 같았던 반도의 호로자식이나이다.

그 시절 다른 친구들은 가족들이랑 정원에서 화초를 가꾸며 마냥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저는 암울한 생각에 빠져 헤매었고, 그들이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밝은 사고와 끝없는 연구의 시간을 가지고 있을 때 저는 어두운 과거와 현실의 처지에 대한 낙심과 걱정으로 가슴앓이에 골몰해야만 하였나이다.

그때 그 시절 저의 인생은 정지 된 시계,꺼꾸로 돌아가는 시계와 같은 좌절과 퇴보의 시간, 바로 그것이었나이다.

한창 풍부하고 현실감에 넘치는 사고의 발전을 가져와야 할 감수성이 예민한 유년기, 그리고 소년기 때 이러한 현상은 제 인생에 치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나락이 될 뻔했으나, 저는 이같은 주변 역경에도 굴복 내지 좌시하지 않고 전진의 욕구를 촉발시켜 저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나이다.

이러한 도전에 대한 용기와 힘의 근원은 과연 어디서 생성되었을까 저는 깊이 생각해보나이다.

제가 이 힘의 원천이 바로 아버지라고 확신하게 된 것은 수많은 세월이 흘러 간 후였나이다. 바로 아버지의 힘, 보이지는 않지만 뒤에서 나에게 힘을 실어 주신 바로 아버지의 힘이라고 저는 지금도 굳게 믿고 있나이다.

오! 천지신명이시어

저의 그동안 꽉 막힌 저의 작은 가슴이 이제야 조금 후련하나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제 가슴 깊숙이 깔려있던 그 어두운 그림자가 이렇게 크게, 그리고 대담하게 팔천만 반도의 우리민족과 해외동포, 그리고 전세계를 향해서 목청을 높혀 말하다니..... 예전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나이다.

저의 지금 심정을 솔직히 말씀드리면 육십년 된 배속의 회충이 저의 체내에서 몽땅 배출되는 그런 홀가분한 기분이나이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괴로우나 기쁠때나 그 긴 세월동안 저의 이비극적인 너누마 비극적인 저의 삶의 길을 알게 모르게 은폐했었나이다. 왜냐하면 저의 이러한 처참한 신분이 백일하에 들통나는 그날부터 저는 지금보다 더 혹독한 낸대와 불이익을 국민들로부터, 친구들로부터 받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앞섰으며, 사실 그것은 당시 시대상을 감안 해볼 때 명약관화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이제는 그 어떠한 편견과 박해, 그리고 멸시의 눈초리가 저에게 닥쳐오더라도 저는 감히 저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그리고 자신감을 가지고 이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나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저는 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정신적으로,논리적으로, 그리고 총체적으로 대응해 승리할 각오가 되어있나이다.

오! 천지신명이시어

한국전쟁 발발 후 육십년이 된 오늘에야 이렇게 제 자신을 솔직하게 천지신명에게 고백하는 분명한 이유 한 가지가 있나이다.

그것은 바로 다시는 이 지구상에서 이 반도에서 저와 같은 핍박받는 전쟁 호로자식이 생겨나서는 안 되겠다는 그 사실 하나가 저의 마음속에서 솟구쳤기 때문이나이다.

다시말해, 이 땅에서 전쟁의 포탄 소리가 결코 들려서는 안 되겠다는 저의 처절한 몸부림의 표출이나이다.

전쟁 호로자식은 진정 우리시대로서 그 종막을 고하고자 하는 저의 심정이나이다.

호로자식의 이 더럽고 메스꺼운 어휘가 세계백과 사전에서 국어사전에서 완전히 사라질때까지 저는 세계와 반도의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앞으로도 계속 외롭고 힘든 투쟁을 매진해나갈 각오로 단단히 무장되어 있나이다.

오! 천지신명이시어

저는 반도의 평화에 대한 새로운 믿음 한 가지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것은 바로 전쟁 호로자식이 이땅에서 사라지는 바로 그날부터 이 반도에는 진정하고 항구적인 평화가 도래할것이며, 전쟁 호로자식이 상존하는 한 완전한 평화는 결코 없으며, 전쟁은 짧지만 그 고통은 대를 이어 영원하다고 저는 천지신명님께 감히 말 할 수 있나이다.

전쟁 호로자식의 아픔은 이 시대 우리 모두의 아픔이요, 우리 민족의 큰 아픔이기 때문이나이다.

제가 어릴때 호로자식으로서 겪어야만 했던 그 말못할 특별난 이야기 몇 가지를 이제야 천지신명님께 이야기하려고 하나이다. 이비사는 아마도 한국전쟁 발발 육십년만에 털어놓는 , 대륙과 열도 , 그리고 반도를 망라하여 전쟁 호로자식으로서 전무후무한 이시대의 고백으로 기록 될것이나이다.

지난 육십일년 저에게는 이 세월이 머나 먼 사막의 길이었고, 눈물로 점철된 질곡(桎梏)의 세월이었나이다.




오! 천지신명이시어.

제가 인생이라는 큰 바다에 당도할 때까지 저는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수많은 강을 건너야만 되었나이다. 그런데 그 어느날 성큼 저에게 다가온 또하나의 색다른 강은 어린 제가 혼자 건너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힘겨운 그런 강이었나이다.

그것은 바로 사춘기라는 강이었나이다.

아! 영원히 내 가슴속 깊이 간직되어 있는 나만의 그 사춘기의 사연들.

다른 친구들이 건너는 그 강은 평화스럽고 잔잔한 물결, 보랏빛이 영롱한 아름다움, 그리고 갖가지 추억이 깃들였으며 적절한 수온과 적당하고 안전한 수심으로 인하여 그들은 즐거운 휘바람을 불며 부모님,그리고 동기들의 손목을 잡고 여유있는 마음으로 그 강을 건넜나이다.

그런데 제가 건너야 할 그 강은 유독 수심이 깊고, 물살이 거칠었으며, 뒤엉킨 수초 등 여러 가지 악조건으로 인하여 제가 도하하기에는 참으로 벅찬 강이었나이다.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고 불안한 마음을 이끌고 제가 강어귀에 당도했을 때였나이다. 밤하늘 가운데 휘영청 보름달은 수면 위를 비추고 있었고, 주변 환경은 금시라도 어디선가 괴물이 불쑥 튀어나올 듯 같았던 두려움과 초조함, 그리고 불안감이 저의 어린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나이다.

더욱이 그 강에 대한 지형, 지물과 안내, 그리고 도움이 되는 그 어떤 정보도 저는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불확실하나 다소 호기심도 깔려 있었던 미지의 강이었나이다. 그러나 저는 가문을 위하여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입술을 깨물면서 그 강을 필사적으로 건넜나이다. 그야말로 제가 사력을 다하여 그 강을 겨우 도하하여 반대편 백사장에 닿았을 때 저의 심신은 극도로 피곤했으며 그로 인하여 저는 한동안 심한 열병을 앓아야만 되었나이다.

저에게는 처음 당하는 모험이었고 힘이 너무나 들었으며, 그러나 숙명적으로 건너야만 했던 사춘기의 그 강을 저는 성공적으로 건넜으며 이것은 바로 아버지의 힘이라고 저는 지금도 믿고 있나이다.

오! 천지신명이시어.

저의 지난 이야기를 경청하시고 저에게 나아 갈 길을 인도해 주소서.

전지전능하신 천지신명님께서는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저는 굳게굳게 믿나이다.

어릴 때 성은 저에게는 만져볼 수없는 강위의 무지개였나이다.

어릴 때 성은 저에게는 아무도 인도해 주지 않은 처녀림이었나이다.

어리 때 성은 저에게는 육체적으로, 신적으로 갈등의 발원지었나이다.

어릴 때 성은 저에게 심신의 족쇄였나이다.

저는 성에 대하여 다른 친구들보다 다소 늦게 깨우쳤나이다.

이 모든 일들이 불우한 가정이 원인인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나이다.

그리고 내 스스로 깨닫기까지 힘들었고, 그리고 그해법도 퍽이나 원시적이었나이다.

그것은 분명 제 잘못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나이다.

주위에서 저에게 그 아무도 성에 대하여 언급도, 행동도, 그리고 그 어떠한 정보도 주지않은 불모지였나이다. 그냥 제 자신이 스스로 하나하나씩 깨우쳐 가는 방법바께에는 없었나이다.

비밀스럽게, 고요하게, 그리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서 그렇게 살며시 접근했나이다.




그때 저의 집 남쪽 벽을 끼고 경상남도 산림국 산하 울산 사방관리소가 있었나이다. 그 관공서는 세멘트와 목재가 혼합 된 이층 건물로서 지는지 꽤 오래된 건뭉이었나이다. 이십평 정도의 아래층은 직원들의 사무실이었고 이층은 소장실과 회의실이었나이다.

관리사업소 내 빈터 이곳저곳에는 사철 늘푸른 측백나무가 건물을 온통 둘러싸고 있었나이다. 그나무의 원산지는 중국으로서 전체 수목 형태가 원추형이고 가지가 울창하며 가을에는 둥근 난형의 구과(毬果)가 열였으며, 그 종자는 강강제로 사용되기도 했나이다. 특히, 여름철에는 그 나무 그늘의 시원함으로 저와 친구들은 놀기 좋은 공간으로 자주 찾아 들곤하였나이다.

그리고 본 건물 옆에는 관리소장 사택이 있었고, 한 여름 우리를 즐겁게 해주던 우물이 있어서 자주 그 우물물을 할머니께서 길러 식수로 사용했으며 가끔은 빨래도 용인해주는 등 그 우물로 인하여 관리소와 주민과의 관계는 좋은 사이를 유지했나이다. 관리소 직원 수는 제 짐작으로 대략 이십명 정도였으며, 주업무는 우리고장 산림녹화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는 일이었나이다.

그래서 이 관리소에서 시행하는 사방공사 업무 입찰을 보기 위해 간혹 업자들이 붐비는 장면을 목격했나이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저의 집대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요란스러웠나이다.

그때 저의 집은 바로 관리소의 남쪽 동 목조 창고 벽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나이다. 다시 말해,일조건이 완전히 무시된 채 위법 건축물이었나이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그일에 대하여 관여치 않았나이다. 오히려 그 위법 건축물 덕분으로 우리가 부담해야 할 울타리 설치 공사비가 절감되었다고 들 주위분들에게 이야기 할 정도였나이다.

그 관리소에는 우리보다 다소 나이가 많은 십대 후반의 남자 급사가 있었나이다. 그는 우리와도 친하게 지냈고, 체구가 컸으며 성격이 호탕했으며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는 저와 동네친구들을 불러서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 주었고,탁구도 함께 치며 즐거운 시간도 가졌나이다. 특히, 저는 그 형과 가깝게 지냈나이다. 그형은 저희들보다 사회경험과 일반적인 상식도 풍부하여 모든 방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앞섰나이다.

그 형이 하는 관리소의 업무는 대충 이런 것이었나이다. 관리소 건물 내외의 청결유지, 직원들이 필요한 서류 등사, 시간틈새로 직원들 구두 딱아 주고 용돈 벌기,소장님으로부터 꾸지람 듣는 일, 관용트럭 물세차하기, 유리창딱기, 직원들 출퇴근 시 깍듯이 인사하기 등 ...

제가 초등학교 일학년 여름방학 때라고 기억이 떠오르나이다.

관리소 측백나무 가지사이로 매미소리가 간간이 들려왔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퍽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였다고 기억하나이다. 관공서 토요일 오후는 예나 지금이나 직원들이 일찍 퇴근하여 적감감마저 감도는 시간대이지요. 그때 저는 혼자 관리소 마당에서 그냥 놀고 있었는데 그 형이 이층에서 측백나무 가지사이로나를 바라보더니 얼굴에 미소를 띄우면서 아주 부드럽게 “ 대길아, 너 거기서 뭐하니? 이층으로 올라와 할 이야기가 있어.” 하면서 손짓으로 나를 불렀나이다. 이층이란 곳은 그 시절 어린 우리에게는 낯설고 가보고 싶은 곳이었고, 더욱이 그 형이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서 선뜻 일층 사무실을 거쳐 삐거덕거리는 목제계단을 통해 그 형이 기다리는 이층으로 올라갔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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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정리중입니다.........
2007-07-01 10:20:56
125.132.3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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