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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하례(正朝賀禮)납향(臘享)제석(除夕)
icon 김민수
icon 2012-12-31 1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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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하례(正朝賀禮)납향(臘享)제석(除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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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정월 초하룻날 설은 세수(歲首)·원단(元旦)·원일(元日)·신원(新元)이라고도 하며 정월 초하룻날 원일(元日)에 백성들에게 황제를 정점으로 한 대한국 황실의 위엄을 알리기 위해 조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새해를 축하하는 정조하례(正朝賀禮)를 해왔으며, 정조하례가 끝나면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1900년 1월 31일 고조 광무제가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정조하례(正朝賀禮)를 받았다. 황태자가 치사문(致詞文)을 올렸다. 이어 칙서(勅書)를 내려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정초 3일 동안은 모든 관청과 시장이 문을 닫았으며, 순조(純祖) 대에 홍석모(洪錫謨)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정대신(議政大臣)은 모든 관원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가 국왕에게 새해 문안을 드리고, 신년을 하례하는 전문(箋文)과 표리(表裏:무명 또는 흰 명주)를 바친 후 정전(正殿) 뜰로 나가 조하(朝賀)를 올린다. 지방관도 국왕에게 새해 문안을 드리고 새해를 축하하는 전문(箋文)과 방물(方物:토산물)을 바친다고 적혀 있다.

납향(臘享)은 납일(臘日)에 한 해 동안 이룬 농사와 그 밖의 일들을 여러 신(神)에게 고하는 제사이며 납일(臘日)은 납향(臘享)을 지내는 날로 조선 태조(太祖) 이후부터 동지 후 셋째 미일(未日)로 정하여 태묘(太廟)와 사직(社稷)에서 대제(大祭)를 지냈다. 태묘에서는 4계절 중 첫 달 상순의 4시(四時)와 납일(臘日)에 5대제(五大祭)라고 하여 대향(大享)을 올렸고, 초하루와 보름의 삭망(朔望) 및 정조(正朝), 한식(寒食), 단오(端午), 추석(秋夕), 동지(冬至) 같은 영절(令節)에 작은 제사를 올렸다. 이이(李珥)는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제례장(祭禮章)에서 영절(令節)을 정월 15일, 3월 3일, 5월 5일, 6월 15일, 7월 7일, 8월 15일, 9월 9일 및 납일(臘日)로 보았다. 세종(世宗) 대에 오례의(五禮儀)를 제정하면서 납향(臘享)을 대사로 정한 이후 사직과 태묘에서 매년 납일(臘日)에 납향을 모시게 하였고, 지방 관아에서는 나례(儺禮)를 열어 한 해를 정리하는 행사로 삼았다. 납향(臘享)을 올리는 납일에는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섣달그믐에 내린 눈을 녹인 물인 납설수(臘雪水)로 열을 내리고 독(毒)을 없애주는 각종 환약(丸藥)을 만들어 국왕에게 올린다. 이것을 납약(臘藥) 또는 납제(臘劑)라고 하는데 청심원(淸心元), 안신원(安神元), 소합원(蘇合元)의 3가지 환약(丸藥)을 가장 요긴하게 여겼으며 정조 대인 경술년(1790)에 제중단(濟衆丹)과 광제환(廣濟丸)이 새로 제조되어 모든 영문(營門)의 군졸들 치료에 사용되었다.

1763년 12월 30일 영조가 오늘이 1년의 마지막 섣달 그믐날 밤인 제석(除夕)이므로 법사(法司)에 구류되어 있는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하고 또 사대부(士大夫) 가운데 나이 70세가 된 사람과 서민(庶民) 가운데 나이 80세가 된 사람들에게 쌀과 비단을 하사하게 하였으며, 여러 가지 영선(營繕)에서 역사(役事)하는 백성들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1865년 7월 25일 탄신(誕辰)으로 입시(入侍)했을 때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천추성절(千秋聖節)은 더없이 큰 경축일이고 정조(正朝)와 제석(除夕) 또한 더없이 성대한 명절인데 문안드리는 것을 단지 2품 이상으로만 반열을 이루는 것이 비록 구규(舊規)이기는 하나 결국 흠결(欠缺)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대전(大殿)의 탄신, 각전(各殿)의 탄신, 정조, 제석에 문안드릴 때는 백관(百官)이 참석하게 하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고조 광무제가 윤허하였다.1890년 12월 12일 고조 광무제가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납향대제(臘享大祭)를 지내고 이어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1898년 1월 20일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납향대제(臘享大祭)를 지냈다. 황태자(皇太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이어 조상식(朝上食)을 올리고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1921년 1월 20일 순종 융희제가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납향대제(臘享大祭)를 행하고, 이어 주다례(晝茶禮) 겸 별다례(別茶禮),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나례(儺禮)는 음력 섣달 그믐날 밤인 제석(除夕)에 궁중에서 마귀(魔鬼)와 사신(邪神)을 쫓아낸다는 뜻으로 베푼 의식이며 대나(大儺)라고도 한다. 궁중에서 12~16세의 소년을 뽑아 이를 진자(侲子:초라니)라 하고 24인을 1대(隊)로, 6인을1줄로 하여 가면을 씌우고 붉은 치마를 입혔다. 집사자(執事者) 12인도 붉은 옷을 입었고, 공인(工人) 24인 가운데 한 사람은 방상시(方相氏)가 되었는데, 가면을 쓰고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방망이를 들고, 황금으로 된 눈이 4개 달린 곰의 가죽을 뒤집어썼다. 호각군은 20인을 1대로 하는데 기(旗)를 잡는 사람 4인, 퉁소를 부는 사람 4인, 북을 가지는 사람 12인으로 구성하였다. 나례가 악귀를 쫓아내는 일 외에도 칙사(勅使)의 영접, 국왕의 행차, 감사의 영접 등에 광대의 노래와 춤을 곁들여 오락으로 전용되었다. 나례 가운데 처용무는 악공(樂工)과 기녀(妓女)가 맡고, 곡예 ·희학지사(戱謔之事) 등은 재인(才人)이 담당했는데 여악(女樂)까지 동원되었다. 이것을 백희(百戱),잡희(雜戱),나희(儺戱)라 하였다. 나례 출연자로는 나례도감(儺禮都監)에 소속된 광대 ·수척(水尺) ·재인 ·현수재인(絃首才人) ·백정(白丁) 등이 있는데 이들은 사회적으로 천대받았다. 나례의 공연 장소는 인정전(仁政殿) ·사정전(思政殿) ·명정전(明政殿) 등에서 행하였고 가식무대(假飾舞臺)인 윤거(輪車)라는 수레를 몇 개씩 이동해서 나례를 하였다.
2012-12-31 1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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