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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슬픈遺産(유산)『보리고개』안녕
icon 초근목피
icon 2012-12-24 17:4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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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슬픈遺産(유산)『보리고개』안녕








日收七錢七厘(일수칠전칠리) 朝鮮小作農現狀(조선소작농현상)

1924.02.28 동아일보1면 경제 기사(뉴스)


... 의敎育費 其他 交際費 弔祭費等(교육비 기타 교제비 조제비 등)이 不少(불소)하야 到底(도저)히 收支(수지)가 相償(상상)되지 못한다 草根木皮(초근목피)도 먹을 수 밧게 업고 山河(산하)에 獵漁(엽어)이라도 하여서 充腹(...






三十餘種(삼십여종)의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十七萬戶七十餘萬名(십칠만호칠십여만명)

1924.10.12 동아일보2면 사회 기사(뉴스)


三十餘種(삼십여종)의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十七萬戶七十餘萬名(십칠만호칠십여만명) ◇영양부족으로 병든사람이 일만오쳔여명 ◇湖南(호남)에서 本社特派記者 鞠(본사특파기자국) 琦(기) 烈(열) 發(발) 信(신...






間島同胞(간도동포) 草根木皮(초근목피)에 子女放賣(자녀방매)

1925.03.12 동아일보2면 사회 기사(뉴스)


間島同胞(간도동포) 草根木皮(초근목피)에子女放賣(자녀방매) 空家千餘戶(공가천여호),米價暴騰(미가폭등) 商店閉鎖續出(상점폐쇄속출),流離窮民激增(유리궁민격증) 餓死(아사)를直面(직면)한在留同胞(재...






草根木皮(초근목피)도 食盡(식진) 白粘土(백점토)로 露命僅保(노명근보)

1927.06.08 동아일보2면 사회 기사(뉴스)



草根木皮(초근목피)도 食盡(식진) 白粘土(백점토)로 露命僅保(노명근보) 풀뿌리와 나무껍질 다 먹어버리고 흙에다 좁쌀 너 먹고 겨우생명부지

... 里(경기도양평군양동면계정리))는빈한한 농촌으로춘궁을 당하야 초...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 死線(사선)에선 三千餘名(삼천여명)

1928.08.23 동아일보2면 사회 기사(뉴스)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 死線(사선)에선 三千餘名(삼천여명) 흉년은 거듭들고 먹을것 업서 敦化延吉 兩縣同胞(돈화연길 양현동포) 중국 돈화현(敦化縣(돈화현))에 거주하는 동포 사백여호 인구 이천여명과 연길...





草根木皮(초근목피)도 업서 男負女戴(남부여대)로 流離(유리)

1929.03.08 동아일보4면 사회 기사(뉴스)



草根木皮(초근목피)도 업서 男負女戴(남부여대)로 流離(유리) 始興郡內(시흥군내)의 旱災餘波(한재여파)

... (초근목피)로 僅僅(근근)이 生計(생계)를하는 中(중)이라는데 그中(중)에도 第一尤甚(제일우심)한 곳은 君...






二萬火田民 生活難(이만화전민 생활난)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


1929.05.04 동아일보4면 사회 기사(뉴스)


二萬火田民 生活難(이만화전민 생활난)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 麥嶺期(맥령기)까지니르기가 大難關(대난관) 當局(당국)의救濟(구제)를 懇望(간망) 江原道 伊川郡(강원도이천군)은 元來 山多野少(원래산...







春窮(춘궁)과 流離民(유이민)

1930.04.16 동아일보1면 사회 기사(사설)



... 方(지방)에는 一家全族(일가전족)이 海外(해외)로 流離(유리)햇다 하는者(자) 잇고어떤地方(지방)엔 極度(극도)의 饑饉(기근)으로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하는 者(자) 잇다 한다 流離(유리)와 饑饉(기근)...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者(연명자) 論山附近 五万餘名(논산부근 오만여명)


1930.03.30 동아일보3면 사회 기사(뉴스)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者(연명자) 論山附近 五万餘名(논산부근오만여명) 한재 끄테춘궁으로 먹을 것 업서 麥嶺(맥령)압두고 死線(사선)에서 彷徨(방황) 【강경】충남론산군(忠南論山郡(충남논산군))일원 급 부근...







草根木皮生活(초근목피생활)로도 子弟敎育(자제교육)에 ??誠(??성)


1930.11.03 동아일보3면 사회 기사(뉴스)




草根木皮生活(초근목피생활)로도 子弟敎育(자제교육)에??誠(??성) 가진곤난을 다 격그면서 共同一致學校設立(공동일치학교설립)

... 금년 봄부터는 또 먹을것이 업서서 동서의 차금과 초근목피(草根木皮(초근...






二萬五千窮民(이만오천궁민)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連命(연명)

1932.04.23 동아일보4면 사회 기사(뉴스)



二萬五千窮民(이만오천궁민)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連命(연명) 작년흉작과 춘궁때문에 乞人(걸인)떼가 밀려 다녀 【령광】령광군에는 작년농사가 례년에업는 흉작인데다가 궁춘을 당하야 군서면(郡西面(군서...





橫說竪說(횡설수설) 1933.04.17 동아일보1면 사회 기사(가십)

... 一種(일종)의 飢餓(기아). 밥 없는飢餓(기아)는 草根木皮(초근목피)와 乞食(걸식)으로 채운다 치더라도,글 모르는 飢餓(기아)는 무엇으로 채우나. ▼私塾(사숙),夜學(야학),其他(기타) 文字普及(문자...




債權(채권)의抛棄(포기) 朴之赫氏(박지혁씨)의美擧(미거) 1933.11.04 동아일보1면 경제 기사(사설)

... 익피폐)하게됨을 따라서 世態(세태)와 人心(인심)이極度(극도)로 疎薄(소박)하게 되어 감으로 農民(농민)의 大多數(대다수)는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써 僅僅(근근)히 延命(연명)하면서 粒粒辛苦(입립...





橫說竪說(횡설수설) 1933.12.23 동아일보1면 경제 기사(가십)

... 乃至(내지) 피,쭉정이 도토리??▼이것도 不足(부족)하면 츩뿌리,솔꼅질,소라지,도라지 等等(등등) 營養價(영양가)가 없지않은 草根木皮(초근목피)가 全土(전토)에 猶存(유존). 오늘이 冬至(동지). ...





草根木皮(초근목피)도不得(부득) 二千生靈饑餓(이천생영기아) 1934.03.14 동아일보5면 사회 기사(뉴스)

草根木皮(초근목피)도不得(부득) 二千生靈饑餓(이천생영기아) 이천군 웅탄면 작년흉작 여파 當局(당국)의時急救濟(시급구제)를痛論(통론... 그들을엄습하야 호구할 량식좇아 벌서떨어젓고 때마침 겨울이라...





닥처오는春窮期(춘궁기)

1935.02.17동아일보1면 경제 기사(사설)


... 그나마라도 할수없는 者(자)는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만을 꾀하는... 春窮期(춘궁기)를 當(당)하야 草根木皮(초근목피)를 씹고 잇는 者(자)는 다시 말할것도 없지마는... 結局(결국)은 그들에게...






農村(농촌)『過剩人口(과잉인구)』問題(문제)

1935.04.04 동아일보1면 사회 기사(사설)


... 것이 아니므로 다시 數字(숫자)를 들어 論證(논증)할 必要(필요)조차 없을 것 같다. 그러나春窮期(춘궁기)를 當(당)하면 草根木皮(초근목피)를 캐지 안흘 수 없는 生活群(생활군)이 때로는 全農家戶數(전...





草根木皮(초근목피)의延命(연명)으로 浮黃症患者續出(부황증환자속출)

1935.08.17 동아일보5면 사회 기사(뉴스)


草根木皮(초근목피)의延命(연명)으로 浮黃症患者續出(부황증환자속출) 國庫補助(국고보조)안되면起債(기채)하야救濟(구제)... 이재민등은 더위에 부댁일뿐외라 오랫동안 밥을 얻어먹지 못하야 초근목피로 연...






農民(농민)위주의 糧政(양정)

1985.03.12매일경제12면 경제 기사(칼럼/논단)


... 1천8백만섬,北韓(북한)이 단6백만섬이 생산되었으며 1939년의 경우는 총 1천4백만섬을 생산해서 南北韓(남북한)이 진실로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살수밖에 없었는데 오늘에 와선 어마어마한 수량의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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餘滴(여적)

1946.10.22 경향신문1면 정치 기사(가십)


... 上(기아선상)에서 彷徨(방황) 하는고?▼다른것은 그만두고 라도 우리의農作(농작)이 自給自足(자급자족)이 못될 형편이어서 草根木皮(초근목피)에 목을 매달어야 할 건가▼日本(일본)은 農夫(농부)의 六(...






農村實情(농촌실정)과 政治(정치)의方向(방향)

1952.07.16 경향신문1면 정치 기사(사설)


... 食糧事情(식량사정)은 形容(형용)키 어려운慘狀(참상)을 呈(정)하고 있는 터로서 客年度(객년도)의 旱災地區(한재지구)에서 草根木皮(초근목피)조차 求得(구득)키 어려워 飢餓線上(기아선상)을 방황하고 있...






記者席(기자석)

1953.04.09 경향신문1면 사회 기사(뉴스)


... 부)의 曲(곡)□師(사)같은 魔術(마술) 任議員(임의원) "믿을 수 없다"고 氣焰(기염) ◇ 때로는 눈물이 앞서는 任永信女史(임영신여사),草根木皮(초근목피)로 겨우 延命(연명)하는 農村(농촌)의 實情(실정)을 들고...





十大(십대)뉴?쓰 癸巳年(계사년)의回顧(회고) ③ 兩長官罷免(양장관파면)

1953.12.19 동아일보1면 정치 기사(기획/연재)


... 어떻던間(간)에 이는 또한 울奮(분)과 不安感(불안감)에 쌓여 있던 政界(정계)와 一般(일반)에게 보내진 하나의 "淸新(청신)제"이기고하였다 草根木皮(초근목피)를 뜯어가면서 五十八種(오십팔종)의 各色雜(각색...






奢侈(사치)를누르는 方向(방향)

1953.08.02 경향신문1면 경제 기사(사설)


... 證明(증명)하는 事實(사실)이다. 農村(농촌)에서는 草根木皮(초근목피)로도 延命(연명)하기 困難(곤란)한데 一部都市人(일부도시인)은... 韓國(한국)의 이現實下(현실하)에서는 農民(농민)들은 草根木...






僻地(벽지)선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

1957.01.31 동아일보3면 사회 기사(뉴스)



僻地(벽지)선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 副作用(부작용)일으켜 人體(인체)에 異狀(이상)도 發生(발생) 【釜山分室發(부산분실발)】경남도내 일부 벽지농민들은 절량으로 벌써부터 초근목피(草根木皮(초근...







?糧農家(절량농가),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 貸與?(대여곡)은 特權層(특권층)에

1957.02.10 동아일보3면 사회 기사(뉴스) ?


糧農家(절량농가),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 貸與?(대여곡)은 特權層(특권층)에 갚을 길없이綻露(탄로)되어 物議沸騰(물의비등) 【釜山分室發(부산분실발)】「초근목피」(草根木皮(초근목피))로 간...






美側(미측),?糧農家(절량농가)에 關心(관심)

1957.02.22 동아일보1면 경제 기사(뉴스)


... 各各算出(각각산출)되고 있을 뿐아니라 農村實情(농촌실정)은 極度(극도)로 疲弊(피폐)되고 있어 現在(현재)부터 草根木皮(초근목피)로 救命(구명)을 하고 있는 形便(형편)에 있어 바야흐로 目不忍見(목불인...






對政府質疑戰熾烈(대정부질의전치열)

1957.03.08 경향신문1면 정치 기사(뉴스)



... 救護食糧(구호식량)에 對(대)한 根(근) 本政策(본정책)을 再檢討是正(재검토시정)할 方針(방침)은없는가? (3)放送局(방송국)은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하고 있다"고 放送(방송)하였는데 都大...







壇上壇下(단상단하)

1957.03.14동아일보1면 정치 기사(뉴스)


... 說明(설명)에 依(의)하면 英陽郡下(영양군하)에는 榮養(영양)이 不足(부족)하여 四割(사할)의 ?糧郡民(절양군민)들은 草根木皮(초근목피)로 榮養(영양)을 補充(보충)해 나가고 짐승까지 榮養(영양)을 잃어...





「國會(국회)는與黨(여당)을기다린다」野黨(야당),出席促求聲明書(출석촉구성명서)를 發表(발표)

1957.05.19경향신문1면 정치 기사(뉴스)


... 길가에 쓰러져있는가 藤(등)나무 껍질이 아니면 어린창자를 채울것 없었던가 數十萬(수십만)의 都市細窮民(도시세궁민)들 草根木皮(초근목피)도 없을 터인데 쓰러기통이나 뒤지는가 閉門(폐문)된 中小企業體...







豫算案政策質疑(예산안정책질의)를 進行(진행)

1959.12.30 동아일보1면 정치 기사(뉴스)


... 負擔(국민부담)은 世界(세계) 어느나라에서도 그類例(유례)를 보기 어렵지 않는가? 財政安定政策(재정안정정책)은 農民(농민)을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하게 하고農民(농민)의 過重(과중)한 犧牲(...






草根木皮(초근목피)로延命(연명)

1960.03.25동아일보3면 사회 기사(뉴스)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 家長(가장) 잃은智異山(지리산)의 千餘災民(천여재민)

... 천여명이 현재 당국의 구호도 못받고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같은 사실은... 한다 그들의 주식물은 감자인데...






宇宙船(우주선)

1960.09.24 동아일보1면 사회 기사(가십)


... 定(정)해가지고 政府(정부)에서 騰落(등락)을 調節(조절)하도록 規定(규정)?. 含哺叩腹(함포고복)은 못할망정 草根木皮(초근목피)는 免(면)토록 해줘야하지 않겠읍니까??. ○ 由?(유서) 깊은 俗離山(...





植木日(식목일)과實質的(실질적)인愛林(애림)의길

1961.04.05 경향신문1면 사회 기사(사설)


... 山林(산림)을 害(해)치는 모든行爲(행위)를 禁止(금지)하고 있지만 問題(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야말로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하는 大多數農民(대다수농민)들이 살기 위하여 나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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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1961,5,16,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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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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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 혁명 위원회 의장

육군중장 장도영






'혁명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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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 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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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漁村高利債申告(농어촌고리채신고)의 成果(성과)는 컸다

1961.09.24 경향신문1면 경제 기사(사설)


... 重要視(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耕作地不足(경작지부족)으로 平年作(평년작)때에도 自家食糧(자가식량)이 모자라서 草根木皮(초근목피)를 求(구)해야 한다면 이는 農民(농민)의 資格(자격)이 없다 할 수 밖...






旅愁(여수) 【158】


1961.11.16 동아일보4면 생활/문화 소설



... 남한에 전기가 없어서 암혹세계라고만 들었는데 각지에 전기가 휘황하게 켜져 있는 것에 우선 놀랄것이며 남한에는 쌀이 없어서 초근목피로 산다했는데 도처에 쌀가게가 열려져 있어서 배급통장 없이 쌓음...






「振興廳(진흥청)」新設(신설)을構想(구상)

1962.02.10 동아일보1면 정치 기사(뉴스)



... 上確保(최소한백만석이상 확보)할 것이며 (昨年(작년)엔 四十五萬石(사십오만석)) 善良(선량)한 農民(농민)이 過去(과거)와 같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해야 하는 일이 다시있을 때는 그責任(책임)...






農村(농촌)을 위한 朴議長(박의장)의 指示(지시)를 보고

1962.02.11 경향신문1면 정치 기사(사설)



... 農家(절량농가)가 무더기로 나곤했던 春窮期(춘궁기)를 日前(일전)에 두고서 "善良(선량)한 農民(농민)들이 過去(과거)와 같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하는 일이 다시 있을 때에는 關係官吏(관계...





農村指導體系(농촌지도체계) 一元化(일원화)에의 길

1962.02.12 동아일보1면 경제 기사(사설)


... 貸與糧?(대여량곡)과 救護糧?(구호양곡)을 最小限度百萬石以上(최소한도백만석이상)을 確保(확보)하여 在來(재래)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하던 悲慘相(비참상)은 없도록 期約(기약)함과 아울...






革命(혁명)1年(연)의 施政總批判(시정총비판) (中(중)) 最高會議(최고회의),分析評價(분석평가)발표

1962.06.09 경향신문2면 경제 기사(기획/연재)


... 時急(시급)한 課題(과제)이다. ▲?糧農家對策(절량농가대책)의 確立每年(확입매년)보리고개를 앞두고 饑餓線上(기아선상)에서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廷命(정명)을 强要當(강요당)했던 230餘萬名(여만명)의...






餘滴(여적)


1964.02.20 경향신문1면 사회 기사(가십)


... 신문보도)에대해서 우리가 얼핏 ?意(찬의)를表(표)하지 못하는 理由(이유)는 무엇일까? "이 판국에「텔리비」를 들여오다니? 草根木皮(초근목피)로 生命(생명)의 줄을 이을 春窮期(춘궁기)인데?그래 배요...




봄은 오는데‥‥本社支局網(본사지국망)에서 본 "64年(연)의 春窮(춘궁)"

1964.02.22 경향신문3면 사회 기사(뉴스)


... 광산촌이었던 이부락 주민들은 지난 62년12월6일 광산이 폐업되자 약3백명이 마을을 떠났고 현재 57가구 약3백명이 아무런 직업도 없이 초근목피로 살아가고 있다. 올해들어 식량난은 더욱 심해서 지난3일 吳秀...






韓國農村(한국농촌)을 울리는 季節病(계절병) ?糧(절량)의 봄고개

1965.02.10 경향신문6면 사회 기사(뉴스)


... 전해지고있으며 보건사회부는 예산확보에 골몰하고 있다. 절량지대의 공통적인 현상은 ①고리채의발호 ②離農(이농)·도시집중 ③草根木皮(초근목피)의 몸부림등으로 집약되고 있다. 8일 현재 본사에 들어온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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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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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64년 1월 공보부가 조사한 바로는, 우리나라의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였다. 63년 말 총 인구가 2,718만 명이니, 라디오의 전국 평균 보급률은 2.42%에 불과했다.

주로 도시에 많이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골에는 한 마을에 한 대 정도 있었을까? 아무튼 시골에서는 신기한 문화용품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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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遺産(유산)『보리고개』안녕


1967.04.06 경향신문5면 사회 기사(뉴스)



... 모두 논밭늘리고 ???改善(영??개선)에 앞장서 한치의 땅도 ?用(효용)있게 해마다 봄이오면 밀어닥쳤던 춘궁기|. 절량농가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해온 역사도 있어 실로 보리고개는 뼈저리게 고달...







食(식) 如前(여전)히 糊口(호구)에 힘들어 食糧不足量(식량부족량)은 約(약)10%線(선)

1967.08.15 매일경제3면 사회 기사(뉴스)



... 하던 농경방식이 점차 多樣化(다양화)되어가고 각종 양곡의 生産(생산)이 늘어나 麥嶺期(맥령기)를 넘기지 못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연명하던 ?相(참상)을 면한 것은 천만 多幸(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지...






意見(의견) 봄의 입김

1971.04.08 매일경제1면 사회 기사(칼럼/논단)



... 농어민들은 오랜 歲月(세월)동안 잔인한 봄철을 수없이 되풀이 맞이하였었다. 이른바 端境期(단경기)를 당하면 산과 들로 나가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연명하던 것이 얼마 멀지않은 시절의 현실이었다. 日帝(일제...







朴(박)대통령 內務部(내무부) 지시내용

1976.01.27 경향신문1면 정치 기사(텍스트)



... 역행하는 부조리가 쌓였기 때문이다. 조총련이 朝總聯系(조총련계) 모국방문동포에게 대한민국에 가면 전기불도 없고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연명하여 산에 나무도 없으며 시골가는 길에 굶어죽은 시체가 여럿이...







朴大統領(박대통령) 年頭(연두)회견

"北韓(북한)에 食糧(식량)원조 用意(용의)"


1977.01.12 경향신문1면 정치 기사(텍스트)



... 으로 성공해왔다. 정치,경제,군사,사회,문화부문에서 괄목할만큼 성장을 했다. 세계속의 한국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보릿고개니 초근목피니 하는 말이 없어진 것이 오랜 일이 아니다. 기적이 결코 아니다....






朴大統領(박대통령)지시 僻地醫療保護制

(벽지의료보호제)확충


1977.02.24 동아일보1면 정치 기사(뉴스)



... 통해 농촌소득을 올릴수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새마을운동도 그런 방향으로 전개해나가라"고 지시했다. 朴(박)대통령은 또"과거의「초근목피」라는말이 지금은 없어졌듯이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극빈자...






보리 混食(혼식)


1985.05.28 매일경제8면 경제 기사(칼럼/논단)


... 총장〉 지금은 보리고개라는 말이 옛말이 되었으나 20~30년전까지만 해도 음력으로 4~5월 이맘때가 되면 굶주린 창자를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채우고 햇보리가 나오기를 하루가 三秋(삼추)같이 기다리...






횡설수설

1987.08.04 동아일보1면 사회 기사(가십)


... 되면 창궐하고 겨울이면 이로 온몸이 근질거렸으며 못먹은데다 기생충에 까지 시달리는 판에「건강」이 어디 있으며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보릿고개에「돈」이 어디 있었는가◆선거를 전후해 상호신용...







成長推進力(성장추진력)의 再?見(재발견) 韓國經濟(한국경제)의 새進路(진로)를 모색하는 對談(대담)

<3> 開發計劃(개발계획)과 經濟運用(경제운용)


1981.05.16 매일경제1면 경제 기사(좌담/대담)



... 성장정책을 추진하지 않을수 없었겠지요. ▲崔(최)고문=그렇지요. 그것은 당연했겠지요. 60년대는 절대적빈곤·춘궁기·초근목피 현상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개발계획과 경제운용이 필요했지요. 어...








마지막"票(표)단속"…숨가쁜 4黨(당)본부

1985.02.11 경향신문5면 정치 기사(뉴스)



... 합동연설회과정에서 각野圈(야권)후보들이 지적한 외채문제에 관해 언급,"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외국돈을 꾸어오지 않으면 초근목피로 생계를 이으란 말이냐"고 역설하고 "국정에책임을 지는 정당과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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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5·16은 서민층이 지지한 혁명이란 얘기야. 서민은 지지했어. 상층에 있던 사람들은 반대했어. 일반 서민들이 은연중에 세상의 변혁을 원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혁명한다는 소문이 좌악 퍼져도 어쩌지 못했던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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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이 우리 편이었어. 아, 저 윤보선 대통령도 5·16 보고를 받고 ‘올 게 왔구나’ 첫마디가 그거였어. 현직 대통령이 올게 왔구나 했으면 알 만하지.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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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사의 1등공신은 누구입니까. 김윤근 해병여단장, 박치옥 공수단장 등 실병력 지휘자들의 공적순서는요.

 “그런 거 없어. 다들 순수한 생각에서 했어. 모두 1등공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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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얘기하는 김 전 총리의 눈에 청년 같은 빛이 났다. 그가 “우리는 순수했어. 이것 저것 구차하게 설명하는 게 없었어”라고 말할 땐 주먹을 쥐기도 했다. “혁명을 하자, 다 때뤄 부수자”라고 말하면 상대방은 군말 없이 대부분 합류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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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장군은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뒤에도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 분은 특히 먹는 데 그러하였습니다.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1962년 그의 친구인 한양대 교수 김병희씨가 박의장 방에 들렀다가 놀란 이야기를 쓴 기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김병희씨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의장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첫 인상은 그 방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치 야전사령관이 있는 천막 속을 방불케 하였다. 특히 그가 앉은 의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나무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이었다.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급품인 '청자'였고 때로는 선물로 받은 양담배였다.



하루는 그 방에 들어갔더니 마침 점심을 먹고 있는데 10원짜리 냄비우동 한 사발과 노랑무 서너 조각이 전부였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원짜리 고급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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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을 가까이서 접해본 이들은 그가 특히 먹거리에 있어서 검소했다고 증언한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한창인 1970년대 중반 청와대는 경제 관련 부처 장관과 재벌총수 그리고 여야 대표 등이 참가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는데, 박 대통령은 회의가 끝난 뒤 점심식사로 우동이나 비빔밥 등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비록 말년에는 요정을 자주 찾았지만, 그의 검소한 식생활은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는 게 추종자들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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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검소하고 청렴했다고 하지요. 대표적으로 어떤 게 기억납니까.


“그때는 쌀을 아끼느라 혼식과 분식을 장려하지 않았습니까. 박 대통령은 아침밥엔 보리를 30% 섞었고 점심엔 칼국수를 드셨습니다. 저와 부속실장 등 본관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칼국수를 먹었습니다. 저는 점심때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집무실 책상에서 점심을 때웠지요. 오후 서너 시쯤 되면 배가 고파 참느라고 혼났어요. 비서들은 누룽지라도 찾으러 식당을 기웃거렸지요.”



-칼국수를 드실 때 공깃밥이라도 한 그릇 같이 드시지 그랬습니까.


“아니 쌀을 아끼려고 국수를 먹는데 어떻게 밥을 먹나요. 그리고 대통령께서 그렇게 하시질 않는데 제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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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빠짐 없었던 보리 잡곡밥



박 대통령은 물욕이 없었고 하물며 재산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는 분으로, 이 사실은 서거 후 모든 국민이 실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나는 그 많은 현장 확인과 현장 지도의 길에 항상 박 대통령을 자동타 또는 헬리콥터 편으로 수행하였다. 아마 나만큼 민간인으로서 헬리콥터를 많이 탄 사람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박 대통령은 헬리콥터 기상에서 여기저기 우뚝 솟을 아파트 단지, 아름다운 농촌 주택, 크고 작은 공장들과 대규모 다목적 댐과 방조제, 그리고 간척지 등을 내려다보며 마치 대통령 자신의 아파트나 집과 공장들이 늘어나고 대통령 소유 농장의 구조물이 이것저것 늘어나는 듯 기뻐했다. 박 대통령은 자기 개인의 재산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나라의 경제와 살림살이가 잘 되는 것만 바라고 또 기뻐했다.



나는 박 대통령 집무실에 있던 파리채를 기억한다.

박 대통령이 살던 본관 2층과 집무하던 1층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전기를 아끼려는 뜻이었다. 선풍기는 있었지만 박 대통령은 그것조차 돌리지 않았다. 한여름에 열기가 닥치면 박 대통령은 창문을 열었고 열린 문으로 파리가 날아들어 오곤 했는데 박 대통령은 파리를 잡기 위해 파리채를 휘두르곤 하였다.

2층 서쪽 구석에 있는 내방은 오후 내내 뜨거운 햇볕으로 달구어졌다. 땀이 많이 흘렀지만 대통령이 틀지 않는데 내가 선풍기를 돌릴 수는 없었다.



박 대통령은 아침, 저녁으로 밥을 먹을 때 꼭 30%는 보리를 섞었다.
지금처럼 건강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쌀을 아끼려고 혼식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특별한 행사가 없으면 점심을 멸치나 고깃국물에 만
기계국수였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나, 의전수석, 비서실장 보좌관 등 본관 식구들은 똑같이 국수를 먹었다. 장관들도 청와대에서 회의를 하는 날이면 점심은 국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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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기다리고 기다리던 쌀 자급에 성공. 수확량 3621만석.

11월 무미일 폐지.


1977. 쌀 생산량 4천만석 돌파, 세계 최고 다수확국가 반열에.

1977.12. 쌀 막걸리 제조 허가






1977년에는 신년사에서 당당히 북한에게 쌀을 무상으로 원조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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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과학기술도 없고, 자원도 없고, 자본도 없는 3무에서 시작하여 99%의 국민을 한데 모아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에 이르기까지 일자리를 무려 1천만 개 이상 창출하여 90%가 적빈층이었던 국민을 70% 이상 중상층으로 끌어올렸다. 새마을운동으로 농가 소득을 도시 가구 소득과 역전시키기까지 했다.


1977년에는 신년사에서 당당히 북한에게 쌀을 무상으로 원조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미군을 이용하여 군비를 줄임으로써 경제건설을 우선시켜 국부를 비약적으로 늘린 결과 1979년에는 불과 GNP의 6%로 자주국방도 거의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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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협상론’ ‘중립론’ 그리고 ‘평화통일론’ 등이 공공연하게 대두됐다. 참의원에서 여운홍 의원은 1961년 1월 남북협상을 공개적으로 제기했으며 고정훈씨를 선봉자로 한 혁신세력은 조총련계 자금으로 설립된 민족일보 등을 이용해 사회주의를 외치는 북을 두들겼다. 5·16 쿠데타가 발생하기 한달 전인 5월13일 서울운동장에서는 ‘민주자유통일’이라는 학생단체가 ‘남북학생회담’을 판문점에서 가질 것을 제안하고 나섰다. 4·19 이후에 무려 1836회의 데모가 발생했고 데모에 동원된 인원은 95만명으로 알려질 정도였다. 데모가 끝나면 으레 난동으로 변했고 사회질서는 거의 파괴된 상태로 방치됐다고 봐야 했다.


4·19 혁명주체가 아니었던 장면정권은 자연 비혁명적 방법으로 국사를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4·19 혁명의 주체를 이룬 학생층, 특히 젊은층과 마찰을 빚게 됐고 그들에게 끌려다니는 허약한 양상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자유만을 부르짖는 1500여 종의 출판물이 쏟아져 나와 장면정권을 무비판적으로 공격하자 무정부상태가 될 정도로 사회 혼란이 심했다. 사회가 불안해지자 경제는 침체됐고, 특히 행정력과 경찰력이 약화됨으로써 신문은 매일같이 밀수를 비롯한 경제악(經濟惡)을 보도했다.


혼란상태를 틈타 1961년 1월2일에는 650대 1이던 환율을 1000대 1로 인상하더니 한달 후인 2월2일에는 1300대 1로 인상하는 최악의 상태를 초래했다. 물가는 졸지에 폭등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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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혁명이 좋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5·16이 나던 무렵은 도저히 나라가 유지될 수 없는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였습니다. 뭔가가 일어나야 한다는 분위기였지요. 4·19는 학생들이 주도했지만, 4·19 이후 들어선 민주당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하는 바람에 학생들도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역할을 더 많이 했습니다. 오히려 혼란을 조장했다고 할까요.



그래서 지식인들 중에는 비록 바람직하진 않지만, 보다 건전한 생각을 가진, 애국심으로 충만한 군인들이라도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이가 적지 않았어요. 그랬기에 저는 5·16이 터지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윤보선씨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5·16이 좌익혁명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졌고, 박정희라는 사람을 직접 만나고 보니 상당한 기대를 걸게 됐어요.




‘민생고 해결’ 다짐과 청렴함에 기대



박 : 박정희씨를 처음 만나신 게 언제입니까.


강 : 쿠데타 직후였죠. 그때 장도영씨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었고, 박정희는 부의장이었습니다. 육군 소장 군복을 입고 퇴계로 보훈처회관 3층에서 저를 만났습니다. 진솔하게 대화를 나눴는데, 그 내용이 ‘동아춘추’라는 잡지에 자세하게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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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제가 그를 호의적으로 본 것은 혁명공약 중에 국민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겠다는 내용(‘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정희씨는 정말 가난한 농촌에서 농민의 설움이 뭔지, 굶주림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래서 “민생고를 해결하고 부정부패를 뿌리뽑으면 자연히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고, 그러면 저절로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독재할 생각일랑 말고 민생부터 챙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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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제가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본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매우 청렴하게 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때 박정희 반대자들이 ‘박정희 집에는 피아노가 스무 대나 있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렸는데, 그건 다 중상모략입니다. 제가 잘 알아요. 박정희는 우리 교회에 나오던 박덕혜 집사의 바로 옆집에 살았는데, 아주 작은 기와집이었습니다. 5·16 후에도 거기서 살았죠.



박 : 신당동 집 말입니까?


강 : 그래요. 5·16이 일어난 뒤에 저도 가봤는데, 낮에는 집이 눈에 잘 띄지도 않았어요. 늦은 밤에 군인 몇 명이 그 앞에서 보초를 서는 걸 보고서야 박정희 집인 줄 알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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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한 쿠데타說


박 : 5·16 쿠데타와 관련해 여쭤보고 싶은 게 또 하나 있습니다. 당시 미국대사관에서 워싱턴에 보낸 문서들을 보면 한국의 상황이 이상하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쿠데타가 일어났는 데도 한국인들이 조용하다는 거예요. 쿠데타가 일어나면 국민들이 합법 정부를 지지하고 쿠데타에 반대하는 소요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당시 쿠데타 정부에 대한 지식인들의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강 : 제가 보기에는 상당수 지식인들이 지지했어요. 올 것이 왔구나 싶어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럴 만도 했죠. 민주당 정부는 도무지 나라를 끌어갈 수 없는 정부였어요. 한마디로 완전히 카오스였습니다. 수습할 수 없는 상태였어요. 오죽하면 ‘독재는 나쁘지만 무질서보다는 낫다’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그러니 뭔가 일이 터져서 ‘정리’를 해야 선거라도 치를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일반 국민 중에도 미국 사람들이 본 것처럼 쿠데타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이들이 좀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때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죠. 때문에 그 무렵엔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 세력이 박정희 외에도 여럿 있었어요. 내가 알기에도 두세 군데는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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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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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으로나 국민적으로, 나 개인이 죽게 된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5.16 산업화’ 이후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 ‘복어 알 주워 먹고 일가족 사망’ ‘어제 밤 걸인(乞人) 동사(凍死)’ ‘연탄가스 중독 사망’ ‘절량(絶糧)농가’ ‘국민소득 80달러’...이런 것들이 선사(先史)시대 신화(神話) 만큼이나 먼 이야기가 되었다는 게 엄청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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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空想도 못하였던 나라가 되었다”


한국은 1965~89년 사이 경제성장률 세계 1위를 기록하였다.


趙甲濟




세계은행이 1965~1989년 사이 세계 40개 주요국 年평균 경제 성장률과 소득분배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에서 세계 1위, 소득분배의 평등성에서도 아주 양호한 국가로 나타났다. 성장 속에서도 균형적인 富의 배분을 이룩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것이다.



25년간(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정권) 한국이 세계에서 경제성장률 1위를 기록하였다는 것은 지도층의 능력이 최우등이었다는 뜻이다. 경제는 國政(국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0점 만점에 60점은 될 것이다. 경제에서 1등을 하고 있을 때 한국은 안보도 튼튼히 하여 北傀(북괴)의 再남침을 저지하였다. 민주주의와 복지의 기반도 갖추었다.

이 기간에 한국은 88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고, 무역흑자국 및 채권국으로 전환하였다. 굶는 사람을 없애고, 돈이 없어 병원에도 가 보지 못하고 죽는 이들도 사라졌다(1977년부터 의료보험 실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 민주화의 한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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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만난 한 60대 인사는 “나는 시골에서 자라면서 굶어죽는 이를 본 적이 있다. 지금의 이렇게 풍요한 생활은 내가 어릴 때 공상속에서도 그리지 못하였던 수준이다”고 했다.



5·16 쿠데타 직후인 1963년 한국의 1인당 GDP는 100달러로서 말레이시아(271달러), 필리핀(169달러), 태국(115달러)보다 못했다. 군인출신 대통령이 國政을 운영하던 30년간 한국은 GNP 규모에서 세계 37위(1960년)로부터 15위, 1인당 GNP에선 83위→30위, 무역부문에선 세계 51→11위로 도약하였다. 한국은 人權(인권)문제가 국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아시아의 두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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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가 외치노라 !!!








10월4일, 난 서울시청 광장에서 외칠것이다.


지금 정권의 대다수들이 과거에 고생? 할때.

난 수출현장의 최일선인 전자회사 라디오 수리공으로 일명
공돌이 였다.


74년도에 부평공단에 위치한 D전자에 입사하여 하루일당
400원에 첫월급 12000원에 잔업수당,특근수당 플러스 알파를
받았다.
한달에 2번쉬는 일요일도 전날 토요일 저녁은 철야근무를
하였으니 제대로 쉬는날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거의 매주 콘테이너로 전자제품을 수출하면서
뿌듯한 마음에 힘든것도 즐겁게 승화시키며 보람있었다.
다들 어려웠던 시기에 박봉 이나마 곗돈도 붓고 적금도 붓고
하면서 내 부모 형제들과 행복하게 살았다.

군생활 끝내고 다시 시작한 전자회사 공돌이 신세가
결국엔 94년도에 해외공장 생산관리 과장을 끝으로 거의 20여년
만에 끝났다.



우리 선배들이 목숨바쳐 피로 지킨 나라를,
우리같은 사람들이 힘들게 일하고 땀흘려서 경제대국 대한민국을
이룩했는데.
지금 정권잡고 이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저 사람들 그때 당시
이나라가 어려울때 무엇하던 사람들인가.
맨날 반정부 데모하고,나라 어지럽히고,선동하던 사람들 아닌가.



나는 100번을 양보해도 저 사람들에게 이나라의 운명을 맡길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서울시청 광장에서 큰소리로 대한민국을 소리높여
외칠것이다.



영광스런 대한민국,자랑스런 대한민국,대한민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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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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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64년 1월 공보부가 조사한 바로는, 우리나라의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였다. 63년 말 총 인구가 2,718만 명이니, 라디오의 전국 평균 보급률은 2.42%에 불과했다.


주로 도시에 많이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골에는 한 마을에 한 대 정도 있었을까? 아무튼 시골에서는 신기한 문화용품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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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업률 40%에 육박. 1인당 국민총생산(GNP) 79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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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와 차관에만 의존한 1960년대 초 한국경제는 한마디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공장을 지으려 해도 돈과 기술이 없어서 지을 수가 없었으며, 실업률은 치솟아 40%에 육박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과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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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2월 21일 에어프랑스 전세기는 서독 루르 탄광지대로 떠나는 광부 123명을 태우고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인구 2400만 명, 실업자 250만 명, 종업원 200명 이상 기업 54개, 1인당 국민총생산(GNP) 87달러.

가난이 이 땅을 휘감아 호구지책(糊口之策)마저 어려웠던 그 시절. 월급 162달러 50센트(650독일 마르크)는 대졸자까지도 이주 노동의 기회를 잡기 위한 경쟁에 나서게 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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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西獨(서독) 광부




[....대학 졸업자...예비역 장교, 국회의원 비서관 등이었다.

...90 대 1의 경쟁률을......]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905100062




[그 시절 우리는] 지하 1000m 막장에서 희망을 캔 派獨 광부 이야기

석탄가루로 뒤범벅된 빵 씹으며 하루 종일 노동




⊙ 500여 명 모집에 4만6000여 명이 몰려 90 대 1의 경쟁률

⊙ 새벽 4시 기상, 탄 가루 마시며 고된 노동

⊙ 코담배로 석탄가루 빼내기도

⊙ 1963년부터 1977년까지 派獨된 한국 광부는 총 7936명, 그 중 65명 사망



權彛種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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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막장에서 석탄을 캐고 있는 필자(사진은 두개의 사진을 합성한 것임). 섭씨 35~40℃의 막장은 가만히 있어도 숨이 콱콱 막힌다. 이런 곳에서 파독 광부들은 하루 종일 노동을 했다.


1960년대 한국은 국민소득 80달러로 유엔에 등록된 120여 국가 가운데 인도 다음으로 못사는 나라였다. 1950년대 미국 원조가 끝난 데다 가뭄과 흉년이 이어져 많은 사람들이 초근목피를 끼니로 연명해야 했다.

1963년부터 1965년 사이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줄줄이 西獨(서독) 광부와 간호사로 떠났다. 이들은 요즘 젊은이들처럼 어학연수나 유학이 아닌, 달러를 벌기 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전북 장수의 두메산골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苦學(고학)으로 마친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내가 派獨(파독) 광부의 길을 택한 것은, 첫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둘째 기회가 된다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꿈꿔 온 교사가 되고 싶어서였다.



그 무렵 나는 군에서 제대해 서울의 여러 공사장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사 일을 같이 하던 한양대 공대생이 난데없이 이런 제안을 했다.

“권형, 나하고 독일 광부로 갈 생각 없소?”

“난 대학도 안 나오고 광부 경력도 없는데, 어떻게 갈 수 있겠소. 그리고 광산 근무 경력서가 있어야 한다던데….”



한국 정부는 1963년 12월부터 1진, 2진, 3진으로 나누어 派獨(파독) 광부를 모집했다. 자격 조건은 ‘35세 미만의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병역을 필한 광부 경력자’였다. 나 같은 경우 광부 경력이 全無(전무)했지만 한양대생의 도움으로 서독 광부 모집에 지원하게 됐다.


당시 지원자들의 직업과 연령은 다양했다. 순수 광부 출신부터 주먹깨나 쓰던 건달, 대학 졸업자(나와 같은 진에도 서울대를 포함한 명문대 출신들이 많았다), 학교 교사, 사업에 실패한 사업가, 예비역 장교, 국회의원 비서관 등이었다.


지원자들의 경쟁률도 대학입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했다. 내가 지원한 2진의 경우 500여 명 모집에 4만6000여 명이 몰려 90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경쟁률이 치열한 만큼 선발과정도 까다로웠다. 우선 신체검사와 더불어 달리기, 역도, 철봉 턱걸이, 모래주머니 나르기 등의 체력검사를 받았다. 지원자들 중에는 커트라인 체중인 60kg에 맞추기 위해 내의 속에 쇳덩어리를 지니고 가는 일이 있었고, 자장면이나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일도 있었다. 체력 테스트 다음으로 적성검사, 상식시험, 간단한 영어 테스트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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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동안 탄광에 근무하는 한편 기술 훈련을 받는다. 월급은 162달러 50센트(650 마르크), 중학 졸업 이상의 학력소지자로서 20세 이상 30세 미만〉



지원자 수는 2800명이었는데 1600명이 신체 조건으로 실격했고 나머지 1200명 가운데 약 500명은 광산에 근무성적이 없으면서 허위 경력 증명서를 붙였다 들통이 났다. 대졸 및 고졸 학력자가 태반이었다. 1차 시험을 거쳐 11월 28일에 최종 합격자 367명의 이름이 발표됐다. 신문들은 사법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듯이 사회면에 합격자 이름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이기양 기자를 선발 두이스부르그에 특파하여 '한국 광부들을 기다리는 서독 광산촌'을 소개했다. 기사 제목들은 외국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던 시절의 독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었다.


"호텔 부럽지 않는 숙소/ 방마다 독서 장에 오락 시설까지 갖추어/ 돈과 맥주와 아가씨와/ 2주 휴가땐 파리에서 데이트도/ 지하 800m에서 콜라가 수도처럼/ 라인 강변 처녀, 동양 총각 좋아해 /민간 외교 역할, 코리아 자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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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농촌공동체의 붕괴, 離農(이농) 현상, 도시로 흘러든 농촌 출신 노동자들이 겪은 低임금 등에 대한 비판적 서술도 보인다. 이에 대해 權赫喆 박사는 이렇게 지적했다.

『농촌 공동체 속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던 젊은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와 低임금 노동자로 전락한 것처럼 기술하는 것은 사실의 왜곡이다. 1960년대 농촌의 생산력은 제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을 찾아서 도시로 온 것이다.

1960, 70년대 女工들이 농촌을 떠나 공장에서 일했기에 가족들을 부양하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농촌에 남아 있었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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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초 중반까지 식모가 엄청나게 많았다.
식모란 농촌에서 입을 줄이려고 부모들이 14~16세 정도되면 도시의 가정에 보내 일을 하게하여 밥을해결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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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이렇게 식모살이하던 소녀들이 공장으로 몰려갔다.
이런 공장에 서로 들어가겠다고 난리였다. 그곳에가면 돈도벌고 야간학교도 갈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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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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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막장이라는 탄광의 막장에서 일해 보자」고 비장한 각오로 갔는데 현실을 전혀 모른 거예요.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했어요. 막장은 보수가 제일 높아서, 나 같은 초보는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이틀쯤 기다리다가 「보다 가시」라고 選炭(선탄)하고 나오는 버럭을 버리는 일을 했어요. 기술이 전혀 필요 없고, 임금이 제일 낮은 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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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 : 물론 1970년대에 평화시장의 노동 조건은 무척 나빴다. 그런데 막상 당시 노동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상당수는 최악의 노동 조건에 대한 별 감각이 없었다. 대부분이 그 전에 너무 어렵게 살았었기 때문에 오히려 돈을 버니까 좋았다는 사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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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테마는 여공의 공장에 대한 동경 문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수 민주노조 여공들의 경험을 통해 볼 때, 하층사회 소녀들이 여공이 되는 것은 농촌탈출이란 소녀들의 적극적 선택과 가족적 요구간의 복합적 산물이었다.


그간 대부분 노동사 서술은 여공의 취직 동기는 가난,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슬픈 ‘哀史’가 담겨 있다는 천편일률적인 담론을 재생산해냈다.

이런 담론들은 농촌 출신 혹은 도시 하층사회 출신 여성들이 자신의 자립과 독자적인 욕망을 이루어 내기 위해 얼마나 공장을 동경했는지에 대한 익명적 지식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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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김지은양은 ' 보릿고개 '란 개념에 대해 아시나요 ? 30대 초반인 저도 보릿고개를 체험해보지는 않은 세대인데. 김지은양 정도 연배면 더 생소한 개념이겠죠. 쉽게 말해 가을에 추수한 쌀은 다 떨어져가고. 보리를 수확하려면 아직 먼 때. 그래서 먹을게 다 떨어진 때가 보릿고개입니다. 보리가 날 때까진 어떻게 해서든 버텨서 살아나야 하는 거죠. 못 버티면 굶어죽는거고요. 우리 부모님,조부모님 세대들. 정말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사신 분들인겁니다.


김일성이 말한 ' 이밥에 고깃국 '에서 고깃국 개념도 제 짐작엔 아마. 우리가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먹는 그런 갈비탕같은 의미의 고깃국은 아닐거란 생각이 드네요. 아마 쇠뼈라도 한조각 집어놓고 몇시간동안 우려낸 그런 국물이라도 먹게 하겠다. 그게 김일성의 공약(公約) 아니었을까요 ?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 절망과 기아선상의 나라를 구하겠다 '는 공약을 어느정도는 지킨 셈이지만. 김일성은 이밥에 고깃국은커녕 옥수수국물도 제대로 못먹는 나라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북한의 나이든 어르신들은 ' 차라리 일제시대때가 더 낳았다 '고 하겠습니까 ?

드라마 ' 야인시대 '를 지켜본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들은. 감옥에 갇힌 김두한이 애인인 나미꼬나 박인애등과 면회하는 모습을 보며. ' 일제시대 감옥이 북한보다 더 났다 ! '고 입을 모으시더군요. ...................

지금 황장엽씨 같은 분들의 아들,딸이 평양시내를 활보하고 다니는게 가능할거라고 생각하시나요 ?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할말 없습니다만.


' 해방후 식민통치로 낙후한 조선땅에서의 과제 '가 ' 빈곤으로부터의 탈출 '과 ' 근대적 민주주의 체제 수립 '이었다고 말씀하셨죠 ? 이 두가지가 과연 그럼 남한과 북한중 어느 사회에서 이루어졌느냐고 한번 다시 되묻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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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활은 봉사하러 가는 게 아니라 배우러 가는거야. 안 가면 네 인생을 망칠 거야.” 그 선배를 무척이나 존경했던 ‘촌놈’인 나도 농활을 갔다.


노동경험이 적던 우리는 힘겨운 노동으로 고단한 밤에 엄격한 평가회를 했다. 소외된 농촌,가난한 농촌, 더 힘든 어머니들 등에 다들 쉽게 동의했지만, 촌놈인 나는 우리 농촌도 많이 발전했다는 내 경험적 확신을 주장했다. 실제 70년대 농촌은 상대적으로 가난하지만 크게 발전했다.거의 몇일을 날밤을 새다시피 논쟁했다. 그 논쟁은 (내가 부촌의,부잣집 아들의,개인적 경험을 지나치게 주장한다)로,내 동의없이,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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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4 17:4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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