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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을 얻기 위해 권문(權門)을 찾는 분경(奔競)
icon 김민수
icon 2012-11-23 19:4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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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을 얻기 위해 권문(權門)을 찾는 분경(奔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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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12월 16일 좌시중(左侍中) 조준이 전문(箋文)을 올렸다. 태조 전하께서 신과 더불어 탐오(貪汚)한 관리가 백성을 해치고 무능한 장수가 구적(寇賊)을 양성하는 것을 분개하여 국가에 건의하여 대신(大臣)을 천거해서 병권을 맡게 하고 여러 도에 순찰해서 출척(黜陟)을 행하니 번진(藩鎭)은 군율을 시행하므로써 패(敗)하여 달아나는 걱정이 근절되고, 주군은 법을 받들므로써 탐욕 많고 잔인한 기풍이 그쳐졌습니다. 영장(令長)은 서리(胥吏)에서 나왔으므로 이에 그 관질(官秩)을 승진시키고 그 선용(選用)을 소중하게 하고 대간과 육조의 보증 천거함을 사용하므로써 전리(田里)에는 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없어지고 유망(流亡)한 사람이 직업에 돌아오는 즐거움이 있게 되었습니다. 죄를 짓고 도망하여 독직(瀆職)한 관리를 신문(訊問)하여 그 향리(鄕吏)로 돌려보내고 시골의 위선자 향원(鄕原)·지방의 교활한 백성 토활(土猾)의 간사한 사람을 공격하여 그 음호(蔭戶)를 부역(賦役)시키고, 현(縣)에는 각기 재(宰)를 두고 역(驛)에는 각기 승(丞)을 둠으로써 빈 터가 변하여 읍리(邑里)가 되고 숲과 풀이 변하여 좋은 곡식이 되었습니다. 쓸데없는 관원이 국록(國祿)을 소모하고 총애받는 사람이 국가의 직무를 더럽히고 공(工)·상(商)·조례(皂隷)가 외람히 관직을 차지하고, 승려들로서 놀고 먹는 사람이 토지를 많이 점거하고, 공이 없는 봉군(封君)과 유약한 자제(子弟)가 직무를 비워 두게 되었는데, 법을 제정하여 도태시키니 요행(僥倖)의 문이 닫혀지고 분경(奔競)의 길이 막혀졌습니다.

1399년 8월 3일 하교(下敎)하여 벼슬을 얻기 위하여 권세있는 집을 분주하게 찾아다니는 분경(奔競)을 금하였다. 정종은 이렇게 말하였다.“옛일을 상고하면 옛날 순(舜)임금이 용(龍)에게 명하기를 ‘짐(朕)은 참소하는 말이 착한 사람의 일을 중상하여 짐(朕)의 백성들을 놀라게 하는 것을 미워한다.’고 하여, 태평의 정치에 이르게 하였고,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고하기를, ‘백성은 음란한 붕당이 없고, 벼슬아치는 서로 비부(比附)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하여, 충후(忠厚)한 풍속을 이루었으니, 수천년이 내려와도 모두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의 말년에 이르러 기강이 해이하여져서 붕당(朋黨)을 서로 만들고, 참소하기를 서로 좋아하여, 군신을 이간시키고 골육을 상잔(傷殘)하여 멸망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공경하여 생각하건대, 우리 태상왕(太上王)께서 천지(天地)·조종(祖宗)의 도움을 힘입어서 조선(朝鮮) 사직의 기업을 창조하시고, 과인에 이르러 어렵고 큰 일을 이어 지키니, 어찌 모두 함께 새로워지는 교화를 도모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남은 풍속이 끊어지지 않아서 사사로이 서로 비부(比附)하여 분경(奔競)을 일삼아, 모여서 남을 참소하고 난(亂)을 선동하는 자가 많도다. 만일 중한 법전을 써서 금령(禁令)을 내리지 않으면, 침윤(浸潤)의 참소와 부수(膚受)의 호소가 마음대로 행하여져, 장차 반드시 우리의 맹호(盟好)를 저해하고, 우리의 종실을 의심하며, 우리의 군신을 이간하는 데 이르고야 말 것이니, 고려 때보다 무엇이 나을 것이 있겠는가!

지금으로부터 종실·공후 대신(宗室公侯大臣)과 개국·정사공신(開國定社功臣)에서 백료 서사(百僚 庶士)에 이르기까지 각기 자기 직책에 이바지하여 서로 총애(寵愛)를 받는 신하나 비빈(妃嬪)이 임금에게 사적으로 청탁(請託)을 행하는 사알(私謁)하지 말고, 만일 원통하고 억울하여 고소할 것이 있거든 각기 그 아문(衙門)이나 공회처(公會處)에서 뵙고 진고(陳告)하고 서로 은밀히 참소하고 헐뜯지 말라. 어기는 자는 헌사(憲司)에서 주객(主客)을 규찰하여 모두 먼 지방에 귀양보내어, 종신토록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게 하리라. 무릇 족친 가운데 삼사촌(三四寸)과 각 절제사(節制使)의 대소 군관(大小 軍官)은 이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말을 만들고 일을 일으키는 것이 있으면, 죄가 같을 것이다. 만일 맡은 바 형조의 결사원(決事員)이면, 비록 삼사촌과 소속(所屬) 절제사의 처소에라도 문병과 조상(弔喪)을 제외하고는 또한 사알(私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기는 자는 벌이 같을 것이다. 공신(功臣)의 경조(慶弔)와 영전(迎餞)은 이에서 제외된다. 아아! 백관을 통솔하고 호령을 반포하는 것은 너희 묘당(廟堂)의 직임이니, 나의 지극한 생각을 몸받아서 금령(禁令)을 엄하게 행하여 고려의 풍속을 일변해 고치고, 우(虞)나라·주(周)나라의 정치를 만회하여 조선 억만년의 기업을 영구토록 하라.”이때에 여러 공후가 각각 군사를 가지고 있어 사알(私謁)하는 것이 풍속을 이루어 서로 참소하고 헐뜯었기 때문에 이러한 교서(敎書)를 내린 것이었다.

1400년 11월 13일 문하부(門下府) 낭사(郞舍) 맹사성(孟思誠) 등이 상언(上言)하니, 유윤(兪允)하였다.인재(人才)는 다스림에 이르는 도구이니, 옛부터 치란(治亂)의 자취가 항상 반드시 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려 말년에 권신이 정치를 마음대로 하여 명기(名器)를 사사 물건으로 보아, 용사(用舍)가 전도(顚倒)되어 선비의 기풍이 무너져서 드디어 망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조정이 천명에 응하여 개국해서 법제를 일신하였으니, 용사(用舍)는 적당하지 않다고 할 수 없고, 선비의 기풍이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기풍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습관이 되어 범상한 것으로 여기니, 염치의 도가 서지 않고, 분경(奔競)의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사대부(士大夫)들은 일을 맡아 공(功)을 이룰 것을 생각지 않고 뜻에 아첨하여 미쁘게 보일 것을 일삼으니, 정사를 잡은 대신도 또한 이것으로 진퇴(進退)를 시킵니다. 이것이 실로 고려 때의 폐정(弊政)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무릇 벼슬을 제수할 즈음에 재상에서 6품에 이르기까지 각기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그 행실을 적어서 공천(公薦)하면, 상서사(尙瑞司)에서 그 천거의 많고 적은 것을 상고하여 중외(中外) 직책에 보직할 것입니다. 권귀(權貴)에게 아부하는 자는 배척하여 쓰지 말고, 또한 헌사(憲司)로 하여금 규찰하여 엄하게 다스리고, 사단자(私單子)를 가지고 난잡하게 간청하는 자는 상서사(尙瑞司)에서 그 단자를 모조리 헌사에 보내어 고핵(考劾)하는 데에 빙거하게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용사(用舍)가 적당하여지고 선비의 기풍이 바로잡힐 것입니다.

1401년 5월 20일 분경(奔競)을 금하였다. 태종이 재이(災異)를 염려하고 삼군부(三軍府)에 명하여 무신(武臣)의 집에 분경하는 자를 금(禁)하고, 사헌부(司憲府)에 명하여 집정(執政)의 집에 분경하는 자를 금하게 하였다. 삼군부와 사헌부에서 아전을 시켜 그 집을 지키게 하여, 사람이 이르면 존비(尊卑)와 그 온 까닭을 물을 것 없이 모조리 잡아 가두니, 사람마다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의논이 분운(紛紜)하였다. 사헌부에서 동성(同姓)은 재종 형제(再從兄弟)·조부(祖父)에 한(限)하고, 이성(異姓)은 같은 3세(三世)의 친속(親屬)에 한하고, 그 이외 사람은 금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말하였다.“친족이나 외족을 모두 같은 5세(五世)의 친(親)에 한하여 금하고 영(令)를 범하는 자는 직사(職事)가 있으면 신문(申聞)할 것 없이 직첩(職牒)을 거두고 파직(罷職)하고 산인(散人)은 그 자원(自願)을 들어서 외방(外方)에 귀양보내라.”

1412년 1월 26일 의정부에서 분경(奔競)을 금하고 거주(擧主:관리를 임명할 때 3망(三望)의 후보자를 천거하는 사람으로 거주(擧主)의 자격은 동반(東班)은 6품 이상이었고 서반(西班)은 4품 이상이었으나 당상관(堂上官)인 경우가 많았으며 추천한 사람이 관원에 임명되어 죄를 범하는 경우에는 거주도 문책을 당하였다.)를 죄주는 두 조목을 올리었다. 처음에 태종이 정부에 명하였었다.“죄가 거주(擧主)에게 미치는 것과 분경(奔競)하고 죄를 사피(辭避)하는 것 따위의 일은 실로 미편하다. 수령(守令)이 죄를 입는 것이 경중(輕重)이 같지 않으니, 만일 탐오하고 불법하다면 거주(擧主)를 아울러 죄주는 것이 마땅하지마는, 혹 공사(公事)에 착오가 있는데 아울러 거주를 죄주면 불가하지 않겠는가? 또 대소 인원(大小人員)이 혹은 공사(公事)로써 혹은 친구의 정의로써 어쩌다가 권문(權門)에 들어간 것을 가지고 시임은 파직을 시키고 전함(前銜)은 부처(付處)를 하는 것도 또한 불가하다. 정부에 상량 의논하여 아뢰어라.”이때에 이르러 정부에서 의논하여 아뢰었다.

첫째는 이러하였다.“영락(永樂) 3년 3월 16일에 사간원(司諫院)에 수교(受敎)한 안에 ‘선비가 염치가 있은 뒤에 임금을 섬기는 의리를 다할 수 있는 것인데, 전조(前朝) 말년에 권세가 신하에게 옮기어져 권문(權門)에 아부하고 세력에 좇는 자는 갑자기 화요(華要)한 벼슬에 옮기고, 청렴하고 조용한 염정(廉靜)하고 자수(自守)하는 자는 도리어 배척을 당하여 비록 대간(臺諫)의 관원이라도 모두 권귀(權貴)가 턱으로 지시하는 바가 되어서 분경이 풍속을 이루고 염치의 도가 없어져서 패망하는 데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국초(國初)에도 남은 풍속이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전하께서 그 폐단을 깊이 생각하시어 엄하게 법금을 세워 헌사(憲司)로 하여금 규리(糾理)하게 하고, 혹은 파출(罷黜)을 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첨하는 무리가 사이를 타고 틈을 이용하여 간청하고 아부하여 말을 조작하고 일을 일으켜, 드디어 염정(廉靜)한 무리로 하여금 똑같이 수치를 당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입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권귀(權貴)의 문(門)에 친척이 아닌데도 분경(奔競)하는 자는 이조(吏曹)로 하여금 정하게 살피어, 시직(時職)·산직(散職)을 물론하고 관리가 과오를 저질렀을 때에 그 과오를 별지(別紙)에 써서 정안(政案)에 붙여 두던 부표과명(付標過名)하여 서용(敍用)을 허락하지 마소서. 또 헌사(憲司)로 하여금 그 법을 거듭 엄하게 하여, 사풍(士風)을 가다듬게 하소서.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이 신판(申判)하여 임금이 신하가 아뢴 것대로 그대로 윤허하는 의신(依申)하였는데, 집정가(執政家)의 문밖의 분경은 금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 등이 생각하건대, 급속한 공사(公事)로 고과(告課)하는 각사 원리(員利)와 사명(使命)을 받들고 출입하는 인원은 아부(阿附)로써 논할 수 없고, 내외 친척(內外 親戚)도 또한 일찍이 내린 교지(敎旨)에 의하여 아울러 금지하지 마소서.”

둘째는 이러하였다.“영락(永樂) 원년(元年)에 사간원(司諫院)에서 수교(受敎)하였는데, ‘근년 이래로 수령(守令)이 적합한 사람이 아니어서 혹 용렬하고 능력이 없어 그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혹은 탐오하고 불법하여 생민(生民)에게 해독을 끼친다.’고 하였습니다. 원컨대 지금 무릇 수령을 제수함에 있어 죄가 거주(擧主)에게 미치는 법을, 한결같이 육전(六典)에 의하여 1품으로부터 현관(顯官) 6품까지로 하여금 각각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는데, 일찍이 현질(顯秩)을 지내서 명망이 있는 자나 중외(中外)의 벼슬을 거치어 성적(成績)이 있는 자 가운데 명망이 많은 자를 취하여 쓰고 청탁으로 하지 마소서. 가신(家臣)이나 간사한 이전(吏典) 출신자가 그 사이에 섞이는데, 성적을 참고할 때에 또한 각도 감사로 하여금 전최(殿最:감사(監司)가 각 고을 수령(守令)의 치적을 심사하여 중앙에 보고할 때 그 우열(優劣)을 나누어 상등을 최(最)라 하고 하등을 전(殿)이라 하던 제도이며 매년 6월과 12월에 실시하였고 5고3상(五考三上)이면 승진되었다.)를 갖추어 헌사(憲司)에 이문(移文)하여 천거한 것이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죄가 거주(擧主)에게 미치게 하소서. 또 영락(永樂) 2년에 본부(本府)에서 수교하였는데, ‘현량(賢良)을 거주(擧主)가 후보자를 보증 천거하는 보거(保擧)하는데, 동반(東班) 6품·서반(西班) 4품 이상 인원으로 하여금 각각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되, 시직(時職)·산직·친구(親舊)를 물론하고 7품 이상 가운데 인재(人材)·연갑(年甲)·적관(籍貫)·출신(出身)·역사(歷仕)·문무 재간(文武材幹)을 갖추 기록하여 보거(保擧)하여서 탁용(擢用)에 대비하게 하라. 천거한 것이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죄가 거주(擧主)에게 미친다.’고 하였는데, 지금 신 등이 생각하건대 집에서 사환(使喚)하던 사람이나 출신(出身), 역사(歷仕)가 분명치 않은 사람을 천거한 자는 마땅히 죄를 받아야 하지마는 만일 일찍이 현질(顯秩)을 지냈거나 중외(中外)에 역사(歷史)하였거나 유일(遺逸)로서 문무 재간(文武材幹)이 있는 자를 천거한다면 아울러 그 죄를 받는 것은 불가합니다. 연좌된 죄가 강상(綱常)을 허물어뜨리거나 탐오(貪汚)하여 장죄(贓罪)에 연좌된 일이 아니면 거주(擧主)에게 미치지 말게 하소서.”아울러 그대로 따랐다.

1440년 5월 15일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이전에 승지(承旨)로서 직책이 이조(吏曹)·병조(兵曹)를 띤 자는 분경(奔競)을 금지하였었는데, 지금은 제수할 때에 임시 특명으로 여섯 승지(承旨)가 서로 서로 들어와 참예하고 분경을 금하지 않으니, 실로 온당치 못합니다. 이제부터는 여섯 승지(承旨)의 집에 아울러 분경을 금하게 하소서.”하므로,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1450년 12월 5일 사헌부에서 아뢰었다.“국가에 작명(爵命)이 있음은 이름과 절개(節槪)를 갈고 닦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수치(羞恥)를 알도록 하여 예(禮)·의(義)·염(廉)·치(恥)의 사유(四維)를 지키게 하려는 소이(所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벼슬을 얻기 위하여 권문세가(權門勢家)를 찾아다니며 엽관운동(獵官運動)을 벌이는 분경(奔競)의 금지를 엄하게 세웠으나, 그러나 오히려 사사로운 일을 청탁하기 위하여 임금을 뵙는 간알(干謁)에 뇌물을 쓰거나 연줄을 타서 출세하려는 인연(夤緣)하여 그 형적(刑迹)을 숨기니, 법으로도 또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근년에 또 스스로 관작을 차지하는 것을 금(禁)하는 법을 세우고, 무릇 어버이를 위하여 군(郡)의 수령을 구하는 자도 또한 자청하는 임소(任所)를 들어주지 아니하는 것은 그 스스로 구하는 것을 배척하는 것이 엄하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중앙과 외방의 관리에게 가자(加資)할 때에만은 반드시 그 달수를 갖추어 본사(本司)에 책임지고 보고하면 이조(吏曹)에 이첩(移牒)한 뒤에 비로소 자급(資級)을 올려서 벼슬을 제배(除拜)하는데, 이것은 또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벼슬을 차지하게 하는 것이니, 어찌하여 그 전후가 이처럼 모순(矛盾)됩니까?

근무한 것을 계산하여 자품(資品)을 올리는 것은 이조와 병조의 선조(選曹)의 직책입니다. 이제 선조(選曹)에서 자품을 올려서 벼슬을 제배(除拜)하는 것을 잘못하였다고 한결같이 탄핵을 하는데, 갑자기 건의하여 이 법을 세우고 사람들로 하여금 선조(選曹)를 대신하여 자기의 근무한 것을 계산하여 시끄럽게 스스로 소개하게 합니다. 선조에서는 죄를 면할 것만을 계책으로 삼는다면 교활한 것이며, 그것이 국가의 대체(大體)에 어찌되겠습니까? 자급(資級)에 따라 벼슬을 임명하는 순자(循者)의 법을 세운 이래로 자격(資格)이 관직(官職)보다 무거울 경우에 가벼운 것도 오히려 스스로 구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그 무거운 것이겠습니까? 대개 분경(奔競)하는 사람이 저녁이나 밤에 애걸(哀乞)하더라도 심히 비루하게 여기고 오히려 수치스러운 마음이 있는데, 어찌 대낮에 공좌(公座)에서 안연(安然)히 스스로 자품(資品)을 올려서 벼슬을 제배(除拜)하기를 구하면서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이것은 중인(中人) 이하 사람들도 감히 하지 못할 짓인데, 온 세상에 풍미(風靡)하여 보통 일로 본다면 법으로도 이를 하도록 할 것이니, 한 조(曹)에서는 책임을 면하는 계책이 되겠지만, 한 나라의 선비를 가볍게 대우하여서 마침내 사람의 심술(心術)을 허물어뜨리기에 이르더라도 아무 생각 없이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어찌 옳겠습니까? 관리를 제배(除拜)하는데도 모두 장부(帳簿)와 문안(文案)이 있어 그 연(年)·월(月)을 기록하였다가 장부를 보고서 연(年)·월(月)을 열람하여 근무 성적을 고과(考課)할 때 그 하등을 전(殿)이라 하고 상등을 최(最)라 하는 전최(殿最)에 빙거(憑據)하고 이를 올리되, 스스로 예(例)을 이루게 되면 서리(書吏) 한 사람이 족히 이를 준비할 수가 있고 크게 어려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모든 관리의 가자(加資)는 이조와 병조로 하여금 한결같이 구례(舊例)에 의거하여 시행하고, 친히 스스로 보증하고 고(告)하여 이첩(移牒)하는 것을 파(罷)하여 선비의 습속을 개혁하소서. ”하니, 문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2012-11-23 19:4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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