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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을 관직(官職)에 임용(任用)하지 않는 상피(相避)
icon 김민수
icon 2012-11-21 20: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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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을 관직(官職)에 임용(任用)하지 않는 상피(相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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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8년 2월 1일 예조에서 계하기를 “경외관(京外官)의 친족에 관직의 제수(除授)를 허락하지 않으며 친족이 같은 관아에 근무할 수 없고 시관(試官)을 피하는 상피법(相避法)은 원전(元典)에는 본종(本宗) 삼촌숙(三寸叔)을 상절(詳節)에는 백숙(伯叔)이라고 일컬었는데 지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하여 백숙부(伯叔父)로 고치고 원전(元典)에는 외친형제(外親兄弟)를 상절(詳節)에는 다만 구자(舅子)라고만 일컬었는데 지금 고자(姑子)·이자(姨子)를 모두 본종(本宗)의 구족(九族)이라 일컬으며, 오복(五服)을 원전(元典)에는 고조부모(高祖父母)는 재최삼월(齊衰三月)인데 상절(詳節)에는 재최오월(齊衰五月)로 잘못 썼으므로 지금 원전(元典)과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하여 삼월(三月)로 고치고 출가녀(出嫁女)는 본종(本宗)을 위하여 복(服)을 낮추었으며 원전(元典)에는 동생생(同生甥)이라 하였는데 상절(詳節)에는 남형제(男兄弟)라고 일컬었으므로 지금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하여 형제(兄弟)로 고치고 원전(元典)에는 동생형제(同生兄弟)라고 하였는데 상절(詳節)에는 형제(兄弟)라고 일컬었으므로, 지금 대명률에 의거하여 자매(姉妹)로 고치고 삼부팔모(三父八母)의 복(服)을 원전에는 종계모가(從繼母嫁)라고 했는데 상절(詳節)에는 종거가인계모(從居嫁人繼母)라 일컬었으므로 지금 원전과 대명률에 의거하여 종계모가(從繼母嫁)로 고치소서.”하니,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1430년 2월 23일 세종이 정사를 보았다. 곁에 있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고려국의 말기(末期)에 조사(朝士)의 친족에 관직(官職)을 제수(除授)하지 않으며 친족이 같은 관아에 근무할 수 없고 시관(試官)을 피하는 상피(相避)하는 법이 심히 번거로워서 이성(異姓)의 칠촌(七寸)·팔촌(八寸)도 역시 피하기 때문에, 옥송(獄訟)이 정체(停滯)되고 지연(遲延)되어 오래 되도록 처결(處決)이 되지 않았는데, 만약 상피법(相避法)이 없었다면 본디 근원이 맑고 깨끗한 사람은 스스로 사정(私情)에 빠지지 않아서 처결(處決)하기가 쉬울 것이며, 중인(中人) 이하는 반드시 공정하지 못한 데 빠지기가 쉬우니, 상피(相避)하는 법을 잘 참작하고 절충(折衷)하여 아뢰라.”하였다. 1432년 3월 25일 “옛 법을 상고하여 보니 인사행정(人事行政)을 맡은 자의 자손은 관직을 제수(除授)받지 못하게 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또한 친족이 같은 관아에 근무할 수 없고 시관(試官)을 피하는 상피(相避)하는 법을 세워서 모든 간섭(干涉)은 다 회피하면서, 벼슬을 제수(除授)하는 데 이르러서는 오로지 회피(回避)하지 아니하니 진실로 타당하지 못하였다. 태종 대에 분경(奔競)을 금지시킨 것이 어찌 의미 없이 한 일이겠는가. 내가 여기에 뜻을 둔 것이 오래이다. 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금 옛 제도를 조사하게 하였더니, ‘시중(侍中)이나 상서의 자제는 관리가 될 수 없다. ’고 한 것이 있었다. 내가 이 법을 세우고자 하니 어떤가. 만약 법을 세운다면 마땅히 분경을 금하는 예에 따라 한계를 정할 것인가, 혹은 상피의 예에 따라 한계를 정할 것인가. 경 등은 당시의 집정자라고 하여 꺼려하지 말고 공정하게 논의하여 아뢰라.”하니, 맹사성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이것은 신 등이 평일에 논의한 일입니다. 만약 분경을 금지하는 범위를 한계로 한다면 인재를 얻기가 어렵게 될 것이니, 마땅히 상피(相避)의 예에 좇아 사촌(四寸)까지를 한계로 하여 제수를 허락하지 않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26일 법규를 제정하거나 정책을 연구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인 상정소(詳定所)에서 아뢰기를, “삼가 고증(考證)하여 보오니, 동한(東漢)에서는 조서(詔書)를 내려 시중(侍中)·상서(尙書)·중신(中臣)의 자제는 관리가 되어서 효행과 청렴을 안찰(按察)하는 직무를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송나라의 제도에는 재상의 자제는 물리쳐서 재상이 관직에 사람을 등용하는 당제(堂除)하지 않았습니다. 원나라의 사천택(史天澤)은 자제(子弟) 가운데 관직에 있는 자를 파면시킬 것을 빌면서, ‘청하건대 신의 집에서부터 시작하게 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씨의 자제는 즉일로 다 인끈을 풀어 놓고 사제로 돌아갔으며, 장유(張柔)·엄충제(嚴忠濟)의 자제도 모두 관직을 버리었습니다. 이것은 인사 행정을 장악한 자의 아들·사위·아우·조카들이 관직의 제수를 받지 못하는 옛날의 제도입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상피의 규정을 만들어 모든 일을 회피하면서도, 벼슬을 제수하는 중대한 일에 이르러서는 그것만은 회피하지 아니하니, 염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비옵건대 지금부터는 이조·병조의 당상관이나 낭청인 관원과 모든 상피관계(相避關係)에 있는 사람에게는 관직을 제수하거나 겸직(兼職)·별좌(別坐)·차임(差任)을 허락하지 말 것이며, 이미 일찍이 임용(任用)된 자로서 임기(任期)가 만료(滿了)하여 예대로 당연히 해임(解任)되어야 할 자는 사임의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고 왕명을 기다려 시행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4월 19일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군사를 취재(取才)하는 것은 관원을 제수하는 유례(類例)는 아니며, 또 기사(騎射)·보사(步射)는 여러 사람이 모두 보는 것이므로, 다른 취재에서 뽑고 떨어뜨리고 하는 것에 비할 것은 아니니, 처음부터 혐의스러운 구석은 없습니다. 그러나 말을 다루는 솜씨가 둔하고 쾌한 것과, 활을 당기는 것이 충분한가 않은가를 분간하는 것은 그 차이가 그다지 서로 먼 것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조(曹)와 조선국 초기에 군무를 총괄하는 진무소(鎭撫所)·훈련관(訓鍊觀)의 관리 등 시험을 맡은 자가 그와 상피관계(相避關係)에 있는 자에 대하여는 혐섭(嫌涉)함이 없지 않사오니, 청컨대, 위에서 말한 상피관계에 있는 사람은 따로 시험보이게 하소서.”하니, 상정소(詳定所)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4월 20일 장령 조수량(趙遂良)이 사직(辭職)하여 말하기를, “이제 이조·병조의 관리와 상피의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관직의 제수(除授)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법이 있고 신의 아버지는 이조 판서가 되었으니 도리상 당연히 사양하여 피하는 사피(辭避)하여야 할 것이며 더군다나 신은 죄상(罪狀)을 조사(調査)하여 꾸짖는 탄핵(彈劾)을 하고 규찰(糾察)하는 직임에 있으므로 마음에 편하지 않습니다. 바라옵건대, 신의 관직을 해임하소서.”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그대의 직임을 제수한 것은 입법(立法)하기 전에 있은 일이니, 꺼려함이 없이 직무를 집행하라.”고 하였다.
2012-11-21 20: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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