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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차(御馬車) 어차(御車) 원형복원해야
icon 김민수
icon 2012-11-08 13: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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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차(御馬車) 어차(御車) 원형복원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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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9(세종 21)년 10월 6일 산림(山林)·늪과 못의 소택(沼澤)·공장(工匠)·건축·도요공(陶窯工)·금속을 광석에서 추출, 정련하는 야금(冶金)을 관장하던 공조(工曹)에서 궁성(宮城), 도성(都城), 도로(道路), 교량(橋梁)의 수축(修築)을 관장하는 수성도감(修城都監)의 하급 관청에서 상급 관청에 보고하는 공문서 첩정(牒呈)에 의하여 의정부에 보고하기를, “성(城)을 둘러 길을 내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는데 도성 옆에 사는 자들이 혹은 길을 막아서 통행하지 못하게 하여서 이내 초목이 무성하고 우로(雨露)에 젖어서 성곽이 장차 무너지게 되었으되 성을 맡은 관리들이 조금도 검사하여 살피는 검찰(檢察)하지 아니하므로, 태종(太宗) 5(1405)년 4월에 한성(漢城)의 행정ㆍ사법을 관장하는 한성부(漢城府)에서 ‘성 안팎을 모두 둘러서 길을 내고 성을 관장하는 관리를 시켜서 날마다 순찰(巡察)하여 만일 퇴락한 것이 있으면 봄·가을마다 수리하게 하고 그 길의 넓이는 역시 참작하여 제정하게 하옵소서.’ 하였습니다. 세종(世宗) 17(1435)년 10월 한성부(漢城府)에서 성내의 도로 제도를 정할 때에도 성을 둘러 낸 길을 수리하는 것은 미처 하지 않았으니 청하옵건대 예전 제도에 의하여 자로 재어서 제도를 정하게 하소서.”하니,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한성(漢城) 안에는 두 마차(馬車)가 나란히 갈 수 있는 넓이에 두 자를 더하게 하옵시고, 성 밖에는 두 마차가 나란히 갈 수 있는 넓이에 넉 자를 더하게 하옵소서.”하므로,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03년 어극(御極)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칭경식(稱慶式)을 전통예술극장인 협률사(協律社)에서 열었으며 경운궁(慶運宮)부터 협률사까지 행사 이동시 사용할 포드(Ford) A형 무개차(無蓋車) 1대를 칭경식(稱慶式) 의전용 어차(御車)로 수입을 지시했다. 1902년 어극(御極) 40주년을 맞은 고조 광무제는 콜레라의 발병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한 칭경식(稱慶式)을 이듬해인 1903년 협률사(協律社)라는 극장에서 열게 되었으며, 칭경식(稱慶式) 기념 공연을 위해 8도 광대들과 미기(美妓)들을 뽑아 미리 궁내부(宮內府) 장악원(掌樂院)에서 풍악과 가무를 연습시켰다. 미국인 알렌을 통하여 샌프란시스코의 자동차 판매상 '프레이저'로부터 포드의 A형 4인승 무개차 1대를 어차(御車)로 수입하였다. 알렌은 1884년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廣惠院)을 세워 신임을 받고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의 어의를 지냈다. 포드의 A형 4인승 무개차는 인천항에서 하역하고 1899년 개통한 경인선 철도를 이용하여 1902년 개통한 한강철교를 건너 남대문역에서 내려서 경운궁(慶運宮)까지 가야 했으므로 칭경식이 끝난 후에 도착하였다.

대한국 최초의 민간인 운전자는 3대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로 1905년에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 1907년 11월 11일 궁내부 대신(宮內府 大臣) 이윤용(李允用)이 행행(幸行)할 때 일렬로 된 노부(鹵簿) 반차(班次)를 신식을 참고하여 별단(別單)에 써서 들어와 황태자에게 보고하였다. 행행(幸行) 노부(鹵簿)의 별단은 1907년(광무 11)에 경무청(警務廳)을 개칭한 대한국의 경찰 사무를 관장하는 경시청(警視廳)의 총순(總巡) 4명이 2대(隊)로 나누고 경시 부감(警視 副監)이 모두 말을 타며, 기병(騎兵) 3명으로 된 1대와 예식관(禮式官), 장례(掌禮), 황후궁 대부(皇后宮 大夫), 궁내부 차관(宮內府 次官), 예식과장(禮式課長), 궁내대신(宮內大臣)이 모두 마차를 탄다. 기병인 정교(正敎)와 황제의 깃발을 든 기병 4명으로 된 1대와 근위대(近衛隊)의 참령(參領)·정위(正尉)·내승(內乘)은 모두 말을 탄다. 황태자의 어마차(御馬車)는 시종원 경(侍從院 卿)과 여관(女官)이 모시고서 타고 간다. 시종 무관장(侍從 武官長)과 시종 무관 2명, 근위대 정위(近衛隊 正尉) 2명과 태복사 장(太僕司 長), 시종 2명은 모두 말을 타고 여관과 친왕(親王)은 비(妃)와 함께 부원군(府院君)은 부부인(府夫人)과 함께 전의(典醫), 황후궁 대부보(皇后宮 大夫補), 총리대신(總理大臣)은 모두 마차(馬車)를 탄다. 기병(騎兵) 3명으로 된 1대와 총순(總巡) 2명으로 된 1대는 말을 탄다.이다.

대한제국 황실은 영국제 다임러 리무진, 프랑스제 르노 리무진을 대한 황실 의전용으로 수입하였고 미국제 GM 캐딜락 1대를 더 수입하였다. 황태자(순종 융희제)가 미국제 GM 캐딜락 리무진을, 황태자비(순정황후)가 영국제 다임러 리무진을 애용했다. 어차의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이유는 어차를 마차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하였기 때문이다. 마부가 마차를 운전할 경우에는 왼손에 줄을 잡고 오른손으로 채찍을 잡으므로 마부가 오른 쪽에 앉아야 채찍을 휘두르기 쉽고 왼쪽의 승객이 안전할 수 있었다.황태자(순종 융희제) 어차(御車)는 미국 GM사가 제작한 문이 4개인 7인승 캐딜락 리무진으로 버튼을 누르면 시동이 걸린다. 목제로 된 차체에 옻칠을 하여 진한 밤색을 띠며 대한국 황실 문장인 이화문(李花紋) 문양의 금도금으로 곳곳을 장식하고 내부는 금색 비단과 고급 카펫으로 치장했고 의자는 자유롭게 접거나 펼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배기량은 5153cc이다. 순정황후 어차는 영국 다임러사가 제작한 리무진으로 목제로 된 차체에 옻칠을 하여 진한 밤색을 띠며 황실 문장인 이화문(李花紋) 문양의 금도금으로 곳곳을 장식한 문이 4개인 7인승 리무진이며 내부는 금색 비단과 고급 카펫으로 치장했고 의자는 자유롭게 접거나 펼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배기량은 3309cc이다. 다임러 리무진은 라디에이터 그릴 아래 달린 ㄱ자 크랭크 핸들을 시계방향으로 힘껏 돌려서 시동을 걸었다.

1909년 1월 29일 황태자의 어마차(御馬車)는 평안도 신의주(新義州)를 출발하여 의주(義州) 임금이 궁을 떠나 머무르던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렀다. 1월 30일 어마차(御馬車)는 의주(義州)를 출발하였다. 신의주(新義州)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정숙(停宿)하였다.1911년 12월 1일 황태자(1919년 2대 황제 등극한 순종 융희제)는 황태자비 순정황후(純貞皇后)의 아버지 윤택영(尹澤榮)에게 황마차(幌馬車) 1대를 하사하였다.1910년대 말에는 함경도 북청 태생의 공흥자동차운수회사 사장 방의석(方義錫), 방예석 형제가 함흥-흥남을 잇는 자동차 도로를 닦고 영업 허가를 받아 8인승 포드 자동차 독점 영업을 하였다. 1911년 경상도 진주에 살았던 일본인 에가와는 포드 8인승 지붕이 없는 무개차(無蓋車) 1대를 들여와 마산-삼천포간을 달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버스 영업을 시작했으며 10명까지는 탈 수 있었으며 저녁에는 천막지붕을 치고 가스등를 달고 다녔다. 1913년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회사가 생겨났는데 포드 T형 승용차 2대를 한성(漢城)에서 시간제로 임대하는 방식이었다.1914년에 이탈리아 공사관에 근무하던 윤권은 공관 자동차로 운전을 배워 의친왕(義親王)의 미국 GM 오버랜드를 운전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운전기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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