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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대(火山臺) 화산붕(火山棚)
icon 김민수
icon 2012-11-06 19: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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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대(火山臺) 화산붕(火山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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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년 12월 30일 3대 국왕 태종이 제야(除夜)에 군기감(軍器監)에서 화산대(火山臺)를 대궐 가운데 베풀었는데 화약(火藥)의 맹렬하기가 전날에 배나 되어 왜사(倭使)가 와서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1418년 12월 29일 4대 국왕 세종이 말하기를, “노상왕께서 나례(儺禮)와 화산대(火山臺)를 구경하고자 하시니, 이를 맡은 여러 관사(官司)로 하여금 그 일을 준비하게 하라.”고 하였다.1426년 12월 19일 전지(傳旨)하여 금년 제야(除夜)에는 화산대(火山臺)를 설치하도록 하였다.1454년 12월 30일 6대 국왕 단종이 사정전(思政殿)에 좌정(坐定)하여 납일(臘日)에 가면을 쓴 사람들이 일정한 연장을 들고 주문을 외면서 귀신을 쫓는 동작을 하는 가면희(假面戱) 나희(儺戱)를 구경하고, 저녁 때에 이르러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좌정(坐定)하여 제야(除夜)나 정조(正朝), 외국 사신이 왔을 때 궁중에서 화약을 터뜨려 행하던 불꽃놀이로 하나의 붕(棚)마다 염초(焰硝)를 설치하여 불을 붙이며 불꽃이 유성(流星)가 같고 소리가 벼락치는 것과 같은 화희(火戱) 화산붕(火山棚)을 구경하였는데, 종친(宗親)·부마(駙馬)와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 당상(堂上), 대사헌(大司憲)·6승지(承旨) 등이 입시(入侍)하고 왜인(倭人)과 야인(野人)들도 들어와 구경하였다.

1462년 1월 2일 저녁에 세조가 중궁(中宮)과 더불어 경복궁(景福宮)에 거둥하여 불꽃놀이 화희(火戱) 화산붕(火山棚)을 구경하였는데, 유구국(琉球國) 사신과 왜인(倭人)·야인(野人) 등을 불러서 이를 구경시켰다.1월 16일 저녁에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서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에게 명하여 뜰 가운데에 작은 화산붕(火山棚)을 설치하게 하고 이를 구경하였다.1464년 1월 4일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공을 쳐서 구멍에 넣던 놀이 봉희(棒戲)를 구경하였는데, 보성경(寶城 卿) 이합(李㝓)·영천경(永川 卿) 이정(李定)·의성군(誼城君) 이채(李寀)·은천군(銀川君) 이찬(李穳)·은산 부정(銀山 副正) 이철(李徹)·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윤사흔(尹士昕)·도승지(都承旨) 노사신(盧思愼)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세조는 또 경복궁(景福宮) 북원(北苑)의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 화포(火砲)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먼저 화산붕(火山棚)을 후원(後苑)에 설치하고 또 백악(白岳:북악산)의 봉두(峯頭)에 소형 화포(火砲) 직상화(直上火)를 설치하여 저녁 일시(一時)에 함께 쏘니 화염(火焰)이 하늘에 닿았으며 또 후원에서 계속 불화살 화전(火箭)을 쏘니 모양이 유성(流星)과 같고 소리는 천둥하고 벼락치는 것과 같았다.

1472년 12월 29일 성종이 후원(後苑)에 나아가 화산대(火山臺)를 구경하였다.1476년 12월 30일 저녁에 성종이 후원(後苑)에 나아가 화산대(火山臺)를 구경하였는데, 종친과 재추들이 입시(入侍)하였다.1477년 12월 21일 성종이 말하기를,“약장(藥匠)의 사상자가 많아서 마음이 편안치 못하다. 궁중(宮中)의 후원(後苑)에 여러 종류의 화약을 재어 넣은 많은 포통(砲筒)을 설치하고 야간에 임금과 문무 2품 이상의 관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터뜨리는 불꽃놀이 관화(觀火)를 그만두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하니, 영사(領事) 윤사흔(尹士昕)과 김국광(金國光)이 대답하기를,“기계(機械)가 이미 갖추어졌으니, 관화는 무방합니다.”하였다. 지사(知事) 강희맹(姜希孟)이 아뢰기를,“신은 친히 소사(燒死)한 자를 보아서 신의 마음이 참람하여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마는, 공역(功役)이 이미 끝나서 뒤에 다시 쓸 수가 없으니, 지금 만약 중지한다면 모두 헛되이 버리게 됩니다. 이는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이니, 정지할 수 없습니다.”하고, 대사헌 이계손(李繼孫)이 아뢰기를,“후원(後苑)의 관화는 곧 놀이하는 일이니,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 사람이 많이 소사한 것은 큰 변괴이니, 청컨대 정지하소서.”하니, 성종이 말하기를,“이것은 군무(軍務)에 관계되는 일인데, 놀이라고 해도 되겠는가? 만약에 놀이를 하려고 한다면, 어찌 다른 놀이가 없어서 꼭 화희(火戲)를 하려고 하겠는가? 내가 지금 정지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사람이 죽어서일 뿐이다. 이것을 놀이라고 지적해서 정지하도록 청하는 것이 옳은가?”하니, 이계손이 아뢰기를,“화희(火戱)무대인 화산대(火山臺)는 적을 막는 기구가 아닌데, 어찌 꼭 급급(急急)한 것이라고 하겠습니까?”하였다.

1478년 11월 18일 검토관(檢討官) 이창신(李昌臣)이 아뢰기를,“방상시(方相氏)가 악귀(惡鬼)를 쫓는 연극 구나(驅儺)의 풍속은 전래(傳來)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주례(周禮)에는 황금빛의 네 눈과 방울이 달린 곰의 가죽을 씌운 큰 탈을 쓰고서 붉은 웃옷에 검은 치마를 입고 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구나(驅儺) 때에 악귀를 쫓는 나자(儺者) 방상씨(方相氏)가 이를 담당하였고, 공자(孔子) 때에도 있었습니다. 옛날에도 이미 그러하였으니, 구나는 갑작스럽게 폐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시(歲時)에 있어서 구나함을 볼 때 광대들이 이에 속된 말로 성상 앞에서 희롱을 하는데, 혹은 의복과 물품으로 상을 내리니, 비록 진(晉)나라 임금처럼 상을 내림이 절도가 없는 데까지는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옳지는 못한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그대의 말이 과연 옳다면, 광대는 가까이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겨울에 몹시 추울 때 그들을 보니 가엾어서 의복을 준 것이다.”하였다. 이창신이 또 아뢰기를,“화포(火砲)는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이므로 폐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화산대(火山臺)는 적(敵)과 상대하여 쓸 수 있는 도구도 아니며, 놀이에만 가까운 것으로서 경비가 적지 않습니다. 신(臣)은 들으니 금년에는 성대하게 의식을 거행하려고 한다 하는데, 청컨대 정지하게 하소서.”하고, 우승지(右承旨) 이경동(李瓊仝)은 말하기를,“전장(戰場)에서 쓰는 화포(火砲)는 혹은 열무(閱武)할 때에 연습하고 혹은 봄·가을에 연습합니다. 그런데 화산대(火山臺)는 비록 1년에 한 차례밖에 쓰지 않으나, 쓸데없이 경비만 많이 듭니다. 그래서 선왕조(先王朝)에서는 정지하기도 하고, 설치하기도 하였으나 정지한 것이 더 많았습니다. 세시(歲時)에 궁중(宮中)에 진연(進宴)하는 등의 일은 하지 아니할 수 없으나, 구나(驅儺)를 구경하는 등의 일은 정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선왕(先王) 때에 이 일을 한 것은 다만 연습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금년까지만 하고 우선 정지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1490년 12월 24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집(李諿)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요즈음 성문(星文)의 변이(變異)로 인하여 허물을 반성하고 몸을 닦으며, 감선(減膳)하고 구언(求言)하셨으니, 하늘의 경계를 두려워하심이 지극하십니다. 그러나 화산대(火山臺)를 설치함은 유희(遊戲)에서 나온 것이고, 나례(儺禮)는 비록 옛 제도이기는 합니다만, 역시 유희에 가까운 것이므로, 옛날에는 방상씨(方相氏)가 담당하여 역귀(役鬼)를 쫓는 것뿐이었고, 임금이 나례로 인하여 잡희(雜戲)를 구경하였다는 것을 예전에 듣지 못하였습니다. 유사(有司)들은 전례(前例)를 그대로 답습하고자 하는데, 전하께서는 이를 따르시니, 하늘의 경계를 삼가야 할 때에 즐기기 위한 놀이 준비를 하는 것이 어찌 하늘을 경계하는 성의하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듣자니, 이달 17일에 충청도(忠淸道) 직산(稷山)에, 천둥과 번개가 치고 사람에게 벼락이 떨어진 이변(異變)이 있었다 하니, 천둥도 칠 때가 아닌데도 사람에게 벼락을 친 것은 심한 것입니다. 재앙은 헛되이 응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불러들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더 삼가도록 하소서. 나례와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것과 회례연(會禮宴) 등의 일은 모두 중지하시고 재앙을 만나 하늘의 경계에 대응하는 실재의 뜻을 다해 주시면 더 없는 다행이겠습니다.”하였는데, 전교하기를,“화산대를 설치한 것은 비록 유희에 가깝다. 그러나 역시 군대와 나라의 중대한 일이며, 나례를 구경하고 역귀를 쫓는 것이 비록 유희의 일이라고 하나 모두 재앙을 없애고 사귀(邪鬼)를 물리치기 위한 것들인데, 비록 성변(星變)이나 천둥 번개가 있었다고 한들 어찌 그로 말미암은 것이겠는가? 회례연(會禮宴)은 나 한 몸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위로 두 대비(大妃)가 계시기 때문에 축수(祝壽)하는 술잔을 올리고자 함이다.”하므로, 이집 등이 아뢰기를,“신 등이 말한 것은 재변(災變)이 그로 말미암아서 생겼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 바야흐로 감선(減膳)하고 구언(求言)하며 몸을 닦고 마음을 가다듬어 두려워하고 있는 때이므로, 그러한 일은 마땅히 일체 중지시켜서 엄숙하게 더 공격하여 하늘의 견책(譴責)에 대응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회례연은 전하께서 두 대비에게 축수를 드리고자 함이니, 신은 감히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그대들이 말한 것은 매우 의리(義理)가 있다. 그러나 나례와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것은 즐거운 놀이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다만 양전(兩殿)을 위해서 사귀(邪鬼)를 쫓기 위함이다. 회례연은 원일(元日)에 양궁(兩宮)에 축수를 드리고 이어 군신(群臣)과 경사스럽게 모이는 것이므로, 두 가지 뜻이 다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하였다.
2012-11-06 19: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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