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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 광무제 시책문(諡冊文) 애책문(哀冊文)
icon 김민수
icon 2012-10-16 10:3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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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 광무제 시책문(諡冊文) 애책문(哀冊文)





시책문(諡冊文)에,“높은 하늘이 재앙을 내리쳐서 오랫동안 풍류를 그치고 조용히 해야 할 슬픔에 매이게 되었다. 큰 덕은 명칭을 얻는 것이니, 어찌 높은 은혜에 대한 예를 밝히고, 식은 오백년의 전범(典範)을 준수하여도 어찌 만분의 1일인들 형용할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고조 광무제께서는 지혜로운 모습과 중흥(中興)의 운을 타고 탄생하셨습니다. 어려서 잠저 하였을 때는 한(漢)나라 선후(宣后)와 같은 좋은 평판을 넘어섰으며, 종사를 이어서 통솔함은 송(宋)나라의 영종(英宗)이 처음 정치를 할 때와 거의 같았습니다. 성인(聖人)을 배우고 경연(經筵)에 근면하고 힘쓰는 법도는 선왕(先王)들에 비교할 만하였습니다. 궁궐이 장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었고, 서족(敍族)들과 친목하였으며, 이를 미루어서 백성을 다 같이 밝게 다스려 협화(協和)를 이루었습니다. 양기를 돋우고 음기를 억제하였고, 간사함과 바름, 간특함과 정숙함을 엄하게 구분하였습니다. 효성은 윗분들을 드러내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니 아름다운 책문(冊文)을 여러 번 올리셨습니다. 제사를 지냄에 진실로 정결하게 하여 어긋남이 없었고 규찬(圭瓚)은 공경스럽게 올리셨습니다. 법도는 모두 옛것에 따라 조종(祖宗)을 본받고 잊지 않았고, 명령을 다만 새롭게 하였습니다. 이웃 나라와 통교(通交)함으로써 먼 곳의 백성을 화목하여 순종하게 하였습니다. 가만히 보면 정령(政令)의 사이에 베푸는 조치는 정밀하여 의(義)에 맞게 변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갑주와 무기를 출입문 밖에 묶어놓고, 의관(衣冠)과 옥백(玉帛), 외교상의 담판과 연회는 올바른 격식을 다하였습니다. 운세는 평안함과 어려움이 있어 때로는 어려움과 아픔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도(道)는 대소가 없이 움직임은 모두 경법(經法)과 권도(權道)에 합치하여 삼황(三皇)과 오제(五帝)가 한결같이 융성한 것보다 더하여, 그 마땅함은 천년에 한 번 있을 아름다운 모임에 속하여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예악(禮樂)과 정형(政刑)이 이로부터 나오니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성대함도 이보다 더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정벌의 공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였으며, 처음으로 황단(皇壇)을 세워 제사(祭祀)를 지내는 제도를 시행하여 여러 조상들이 천명(天命)을 받은 증거를 아름답게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선원전(璿源殿)의 보정(寶幀)에 사모함을 더하니 이에 세상이 깨끗하게 다스려지기에 이르렀고, 조경단(肇慶壇)의 세밀한 예의가 일어나 깊고 영원히 모시기에 이르니 이로 인하여 옛날의 도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인(仁)을 다하는 것이고 의(義)의 지극함이니 여러 사람들의 칭송하여 모시기를 원하여 다만 열렬히 오래 사시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이제 보록(寶籙)의 신령스러운 잣대로 춘추(春秋)의 높은 곳에 나아감을 바라며, 임금의 태도를 강건하게 세웠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정치를 하면서도 싫증을 내지 않았습니다. 임금의 자리를 자손에게 물려주고는 오직 저녁의 경치를 즐기는데 전념하였습니다.




나는 비자(丕子)의 책임이 있으니 만 가지 기틀에 수고로움 끼칠 수 없다. 천하의 높은 것으로써 기르고, 일기(一紀)동안 한가함을 취하여 자연스럽게 거쳐하며, 항상 위대한 노인에게서 즐거움을 이어 본뜨니 어찌 작은 병에 고달픈 뜻을 보이겠는가? 라고 하였습니다.저 하늘의 뜻은 참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백신(百神)이 주단(周壇)의 벽(璧)에 숨는 새벽에 휘(諱)를 받드니, 남은 백성들이 형호(荊湖)의 활을 슬퍼하여 골목에서 목이 메이고 거리에서 구르니 하늘과 땅에서 슬픔이 가득합니다. 깊은 어짐과 두터운 은택을 영원히 사모하는 마음을 갱장(羹牆)에 부칩니다. 아득한 소자는 이 일이 힘겹도록 큰 것을 근심하나, 오직 큰일은 본래 스스로 다하는 바가 있으니 가르침이 이어지는 바가 없음을 슬퍼할 뿐입니다. 아침과 저녁은 영원히 어긋나는 것이니 슬퍼하는 것인즉 기약이 있음과 먼 것입니다. 열흘과 한 달이 쉽게 바뀌니 둥근 언덕을 이에 점칩니다. 슬픈 부르짖음은 상순(湘巡)에 미치지 못하나, 금곡(金谷)에 옛날 정해 놓은 자리는 공자(孔子)와 안자(安子)를 합장한 곳처럼 신묘하고 이치에 맞습니다. 이에 성대한 의식을 마지막 뜻을 받들어 따르고자 하니, 어찌 상덕(象德)의 아름다운 칭호를 열거하겠습니까? 문(文)과 무(武)에 빛나고 문채가 있으며, 어질고 효성스러워 법을 이루고 바르게 살펴서 날로 하늘을 사모하였음을 표현하여 여덟 글자를 들어서 믿음을 빛내니, 금(金)을 칠하고 옥(玉)에 새겨 칠묘(七廟)에 보이고 아름다움을 드날립니다. 삼가 사신(使臣)을 보내 시호(諡號)를 높이는 옥책문(玉冊文)을 받으니 이르기를, ‘문헌 무장 인익 정효(文獻武章仁翼貞孝)’라 하였습니다.대한국을 건국하였으므로 고조(高祖)가 옳다. 공경하고 은혜로우며 도리에 밝아 심신(心身)을 삼가며, 자세하고 정성스럽게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였습니다. 성덕(盛德)과 대업이 천추(千秋)동안 국사(國史)에 빛나고, 아름답고 빛나는 넉넉한 책략은 백세(百世)토록 후손들에게 이어질 것입니다. 오호 슬프도다. 삼가 말씀 올립니다.”하였다.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이재곤(李載崐)이 제술하였다.


애책문(哀冊文)에“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께서 경운궁(慶運宮)에 있는 함녕전(咸寧殿)에서 붕어하셨습니다. 이에 명년(明年) 기미년(1919) 2월 계축(癸丑) 삭(朔) 초 3일 을묘(乙卯)에 홍릉(洪陵)으로 영천(永遷)하니, 예에 따른 것입니다.어김없이 정해진 날이 닥치니 상여가 장차 움직이려 하네. 술을 담은 옥잔(醴斝)이 길제사에서 거두어지고 회색빛 말이 앞장서서 길을 떠나네. 아름다운 궁궐은 뒤로 하고 그윽하고 어두운 무덤으로 향하네. 집집마다 우레 같은 울음소리 일어나고 숲의 신령들은 한숨이 비로 뿌려지네. 우리 황태자 전하(殿下)께서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 원통함이 하늘까지 미치며 슬프게도 밤은 길고 날은 빨리 새지 않네. 다시 뵐 날이 어느 때일까? 그 아름다운 행적이 묻힐까 두렵네. 이에 소리 높여 부르고 아름다운 옥에 새기니 글은 다음과 같네. 내가 남을 편안히 할 것을 생각하는 것은 하늘이 낳은 덕이라네. 경성(庚星)이 빗겨 떠서 상서로운 조짐에 부합하니.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어받았네. 어진 마음과 어질다는 소문이 중외(中外)에 젖어 들었으니 저 백성들이 기쁘게 받들지 않겠는가? 효제(孝弟)를 근본으로 하고 학문에서도 화락하게 선조의 덕을 집대성하였네. 모두 다 올바르지 않음이 없었고, 조석으로 귀신과 대하며 신과 하늘을 공손히 섬겼다네. 법도에서 밝게 굽어 살피고 태묘에서는 화락한 모습으로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제사를 지내니 향기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에 따른 복을 받도다. 수모(壽母)를 지성으로 봉양하니 대왕대비(大王大妃)께서 즐거워 하시도다. 제사를 검소하게 지내며 법도에 맞지 않으면 거행하지 않았으며, 백성을 가르치고 농사짓는 일은 후손에게 크게 교훈을 남기시니 이를 말하여 연익(燕翼)이라 하겠네. 검소를 숭상하고 화려함을 물리침에 몸소 솔선하여, 바르게 하며 교화(敎化)를 궁중에서부터 시작하였네. 대련복(大練服)은 검은 비단으로 하였고, 술을 강력하게 억제함은 우(禹)임금이 맛있는 술은 싫어한 것과 짝이 될 만 하네. 하물며 저 성색(聲色)은 탕(湯)임금과 비슷하였네. 예의(禮儀)와 위의(威儀) 삼천 삼백의 규구(規矩) 중에서 주선하니 질서 정연하고, 엄숙하였네. 이에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확실하게 실행하니 옳음과 그름의 사이에서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네. 만기의 업무를 보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사(政事)를 부지런히 하였네. 조종(祖宗)을 요 순처럼 받들고 간언을 들어주지 않음이 없었네. 관원에서 모든 재능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젖어들게 하였네. 관원에서 모든 재능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젖어들게 하였네. 사람들을 고무하니 도(道)가 오래되니 교화가 이루어지네.




성인(聖人)이 나라를 여심에 그것이 어렵도다. 삼영(三英)을 참작하고 온 나라 사람을 감싸주시네. 선조를 빛내고 후손을 훈계하니 치세에 가깝게 되었다. 임금의 업무는 총람한 지 48년에 공경하고 삼가하여 영수각(靈壽閣)에 드니 삼조(三祖)의 옛일과 짝하니 옥장(玉杖)과 보궤(寶几)가 찬란하게 법도가 있었네. 오호라 슬프도다. 임금의 장막은 정원에 있고 임금께서 타시던 수레(鸞車)는 문 앞에 있는데, 옥으로 만든 상여에는 이슬이 차고 비단 병풍에는 먼지가 묻어 있네. 우러러 응시하노니 저 깃발은 어디로 향하는가? 멀리 푸른 구의산(九疑山)으로 간다네. 슬프고 슬프구나. 대화(大化)의 세계로 가셨네. 멀고도 멀구나 선향(仙鄕)으로 가는 길이여 오호 슬프도다. 하늘이 길지(吉地)를 아껴두셨으니 실로 금곡(金谷)이 이 곳이라네. 길지로 정해졌는데 이전부터 수릉(壽陵)으로 정해 놓았다네. 봉분이 우뚝 솟았고, 성토(星土)가 진실로 부합되네. 상여줄을 잡고 걸음을 옮김이여 도성문을 나서는데 걸음이 머뭇거려지네 냇물도 느릿느릿 흐르고 개울물도 서글퍼하네. 천지가 비통해 하니 해와 달과 별도 빛을 잃었네. 슬퍼서 우두커니 서서 주저하며 상여가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네. 오호 슬프도다. 한 기운이 펴졌다가 막히면서 만물이 순환하니 살아있는 것은 반드시 끝이 있다네. 밤과 낮은 한 가지 이치이며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이 똑같이 저 세상으로 돌아가니 수명의 장단을 어찌 비교하리오. 오직 찬란하게 빛나는 융성한 덕은 천지간에 끝이 없다네. 감히 행적을 약간 형용하여 단단한 돌에 새겨 밝게 드러내니, 언제까지나 잊지 않으며 찬란한 공덕 후세에 남겨지리. 오호 슬프도다.하였다.전 규장각 제학(奎章閣 提學) 민영휘(閔泳徽)가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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