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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붕어(崩御)
icon 김민수
icon 2012-10-16 10: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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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붕어(崩御)





1919년 1월 20일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편찮아서 전의(典醫) 김영배(金瀅培)와 총독부 의원장(總督府 醫院長) 하가 에이지로가 입진(入診)하였다. 황태자 전하가 경운궁에 나아가 근알(覲謁)하였다. 황태자비(순정황후)도 따라가 이어 경숙(經宿)하였다.종척(宗戚)과 귀족(貴族) 등을 인견(引見)하였다. 고조 광무제 폐하의 환후가 심중하였기 때문에 문후(問候)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자작(子爵) 이기용(李埼鎔), 이완용(李完鎔)에게 별입직(別入直)하도록 명하였다.고조 광무제의 병세가 매우 심해져 일본 도쿄에 있는 영친왕의 별저(別邸)에 전보(電報)를 보냈다.1월 21일 묘시(卯時)에 고조 광무제 폐하가 경운궁 함녕전(咸寧殿)에서 붕어(崩御)하였다. 다음날 복(復)을 행하였다.1월 22일 황태자 전하와 의친왕 모두 관(冠)과 상복(上服)을 벗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소복(素服)을 입었다.빈전(殯殿)과 혼전(魂殿)을 함녕전(咸寧殿)으로 하도록 명하였다.후작(侯爵) 이해창(李海昌)을 존원(尊員)에, 후작 이재각(李載覺), 김택진(金宅鎭)을 수릉 향원(守陵享員)에 차하(差下)하였다.총호원(摠護員)으로 자작(子爵) 민영규(閔泳圭)를 삼으라고 명하였다. 빈전주감(殯殿主監) 제조(提調)에 남작(男爵) 이재극(李載克), 남작 조동윤(趙東潤), 전 특진관(特進官) 민영찬(閔泳瓚)을 어장주감 제조(御葬主監 提調)에 자작(子爵) 민영휘(閔泳徽), 백작(伯爵) 이완용(李完用), 자작 이재곤(李載崐)을, 산릉주감 제조(山陵主監 提調)에 남작 김종한(金宗漢), 전 판서(判書) 민영달(閔泳達), 남작 김춘희(金春熙)를 차하(差下)하였다.




후작(侯爵) 이재완(李載完), 후작 윤택영(尹澤榮), 후작 박영효(朴泳孝), 백작(伯爵) 이완용(李完用), 자작(子爵) 조중응(趙重應), 자작 이재곤(李載崐), 자작 송병준(宋秉畯), 자작 민영휘(閔泳徽), 남작(男爵) 이재극(李載克), 남작 조동윤(趙東潤), 남작 김춘희(金春熙)·민영찬(閔泳瓚)을 국장 때의 고문(顧問)으로 삼았다. 후작(侯爵) 이재완(李載完)과 후작 이재각(李載覺), 후작 박영효(朴泳孝), 후작 이해창(李海昌), 후작 이해승(李海昇), 백작(伯爵) 이지용(李址鎔), 자작(子爵) 민영휘(閔泳徽), 남작(男爵) 이재극(李載克), 윤용구(尹用求), 민영달(閔泳達), 남작 조동윤(趙東潤), 남작 민영기(閔泳錡), 민영찬(閔泳瓚), 자작 이완용(李完鎔), 이달용(李達鎔), 자작 이기용(李埼鎔), 남작 한창수(韓昌洙), 이우면(李愚冕), 민형식(閔衡植), 김택진(金宅鎭), 이재덕(李載德), 이명구(李明九), 김용진(金容鎭), 홍규식(洪奎植), 유홍준(兪弘濬), 김영한(金甯漢), 이병찬(李丙瓚), 이달용(李達鎔), 이해충(李海忠), 조명구(趙命九), 조정식(趙鼎植), 김정진(金定鎭), 김영진(金寧鎭), 민경식(閔景植), 이갑승(李甲承), 민대식(閔大植), 조남익(趙南益), 이덕주(李德柱), 유희준(兪熙濬), 이재구(李載九), 이명직(李明稙), 노병목(盧炳穆), 민영채(閔泳采), 김승진(金升鎭), 김익진(金翼鎭), 이재구(李載龜), 윤오영(尹五榮), 이순응(李舜應), 박승목(朴勝穆), 박승봉(朴勝鳳), 윤건영(尹建榮), 민범식(閔範植), 윤헌영(尹獻榮), 김윤동(金潤東), 김순동(金舜東), 민준식(閔俊植), 김익동(金益東), 김효진(金孝鎭), 이운용(李雲鎔), 이학규(李鶴珪), 이흥주(李興柱), 신현익(申鉉益), 신직현(申稷鉉), 김인수(金仁壽), 김홍규(金宖圭), 민풍식(閔豐植), 김희진(金喜鎭), 조태식(趙泰植), 윤칠영(尹七榮), 심규섭(沈圭燮), 조형식(趙亨植), 조형구(趙衡九), 윤구영(尹九榮), 김화진(金龢鎭), 민중식(閔中植), 김선진(金善鎭), 민규식(閔圭植), 조항구(趙恒九), 김대진(金大鎭), 이좌용(李佐鎔), 서병문(徐丙聞), 민규식(閔奎植), 김호진(金浩鎭), 조중철(趙重哲), 이덕규(李悳珪)를 종척 집사(宗戚執事)에 임명하였다.황족(皇族)과 각궁(各宮) 및 내각 총리 대신(總理大臣) 이하 칙임관(勅任官)과 주임관(奏任官) 및 각 학교(學校), 은행(銀行), 회사(會社), 단체와 민간의 뜻있는 이들이 조전(弔電)을 보내왔다.




1월 23일 “삼가 각년(各年)의 등록(謄錄)을 살펴보니 염습(斂襲)하는 옷은 모두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사용하였고 상례보편(喪禮補編)에도 역시 염습(斂襲)하는 옷에 관해서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라건대 이대로 거행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1월 24일 영친왕이 도쿄에서 환차(還次)하였다. 상복(喪服)으로 갈아입고 피발(被髮)하였다. 미시(未時)에 목욕(沐浴)과 습(襲)을 행하고 의례(儀禮)에 맞게 전(奠)을 설치하였다.신시(申時)에 소렴(小斂)을 하고 의례(儀禮)에 맞게 전(奠)을 설치하였다.소렴(小斂)에 입히는 옷은 강사포(絳紗袍) 1습(襲) 평일에 입던 것이다. 패옥(佩玉),채색 비단에 당분(唐粉)으로 노리개를 그리고, 아교에 갠 금박 가루로 고리를 그렸다. 답호(褡護) 하나,검푸른 색의 우리나라에서 짠 옷감으로 만든 대자(帶子)이다. 첩리(帖裏) 다홍색 운문(雲紋)이 있는 대단(大緞)으로 만들었다., 원유관(遠遊冠) 겉은 흑모라(黑帽羅)고 속은 검푸른 색의 숙사(熟紗)이며 갓끈은 다홍색의 공단(貢緞)이다., 적석(赤舃) 하나, 붉은색 버선이다. 염의(斂衣) 19칭(稱)이다.




초명정서사원(初銘旌書寫員)에 후작(侯爵) 박영효(朴泳孝)를, 개명정서사원(改銘旌書寫員)에는 후작(侯爵) 윤택영(尹澤榮)를, 하현궁명정서사원(下玄宮銘旌書寫員)에는 후작(侯爵) 박영효(朴泳孝)를, 재궁상자서사원(梓宮上字書寫員)에는 자작(子爵) 민영규(閔泳奎)를 차하(差下)하도록 명하였다.재궁(梓宮)을 들여올 때 임시로 봉안하는 장소를 함녕전(咸寧殿)의 동행각(東行閣)으로 하도록 명하였다.“붕어하신 고조 광무제 폐하의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길일은 이번 달 27일로 추택하였습니다. 종척(宗戚)과 고문(顧問), 해당 직책 장관(長官)이 함께 참석하여 회의하고 묘호(廟號)와 전호(殿號)도 역시 같은 날에 의논하여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총호원(總護員)이 아뢰기를“행장 제술원(行狀製述員)으로 후작(侯爵) 이재완(李載完), 시책문제술원(諡冊文製述員)으로 자작(子爵) 이재곤(李載崐), 서사원(書寫員)에 백작(伯爵) 이완용(李完用), 애책문제술원(哀冊文製述員)에 자작 민영휘(閔泳徽), 서사원에 자작 민병석(閔丙奭), 지문제술원(誌文製述員)에 자작 김성근(金聲根), 서사원에 윤용구(尹用求), 표석음기제술원(表石陰記製述員), 서사원, 대자전문서사원(大字篆文書寫員)에 후작(侯爵) 박영효(朴泳孝)를, 시보전문서사원(諡寶篆文書寫員)에 후작(侯爵) 윤택영(尹澤榮)을 차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나머지는 그대로 하고 지문제술원(誌文製述員)은 총호원(總護員)이 맡도록 명하였다.




1월 25일 “삼가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본 직원이 상지원(相地員)을 데리고 인산지(因山地)를 간심한 후 예장(禮葬)할 날짜를 택하거나 일을 시작하는 등의 절차는 예(例)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황태자 전하가 답하기를“아뢴 대로 윤허한다. 그리고 양주(陽州)의 금곡(金谷)은 고조 광무제 폐하가 살아 계실 때 예정해 놓은 땅이니 산릉주감 제조(山陵主監 提調)가 나가 간심하고 오라.”하였다.총호원(總護員)에서 ‘산릉주감 제조(山陵主監 提調) 민영달(閔泳達)이 상지원(相地員) 등을 데리고 내일 양주(陽州)의 금곡(金谷)에 나가 산릉을 간심하고 정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1월 26일 황태자 전하가 전교하기를“홍릉(洪陵)을 천봉하는 문제는 앞서 고조 광무제 폐하가 여러 해 동안 마음을 쓰셨으나 겨를이 없었던 유지(遺志)이다. 내가 어찌 감히 우러러 본받지 않겠는가? 인산(因山)이 이미 금곡(金谷)으로 정해졌으니 천봉하는 날짜도 인산일 전에 택입(擇入)토록 하라. 그리고 제반 의식 절차는 어장주감(御葬主監)과 산릉주감(山陵主監)이 겸하여 관리하여 거행하도록 하라.”하였다. 이어서 전교하기를“천봉(遷奉)할 곳의 봉표(封標)는 내일 다시 간심한 후 봉표할 때 같이 거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허우(虛右)의 제도는 공경하게 명릉(明陵)의 예에 따라 하도록 하라.”하였다.미시(未時)에 대렴(大斂)을 하였다. 하재궁(下梓宮)을 행하고 의례(儀禮)에 맞게 전(奠)을 설치하였다.




대렴(大斂)할 때의 의대(衣襨)는 황운 문단(黃雲紋緞) 용포(龍袍) 한 벌 안감은 다홍색의 구름무늬 비단이며, 가슴과 등과 어깨에 용을 그렸다., 금향오호로단(錦香五壺老緞)으로 만든 군복(軍服) 한 벌 안감은 남색(藍色)의 오호로단(五壺老緞)이다., 남색 별단(別緞)의 괘자(掛子) 2개, 옥색(玉色)의 별문단(別紋緞) 주의(周衣) 3벌, 다홍공단(多紅貢緞)으로 만든 강사포(絳紗袍) 한 벌, 백색의 갑사(甲紗)로 만든 적삼 한 벌, 다홍갑사로 만든 치마 한 벌, 대대(大帶) 한 개, 금의단후수(錦衣緞後垂) 한 벌 금환화본(金環畵本)이 있다., 무릎 가리개 1개, 옥대(玉帶) 1개, 홍공단 화본이다. 옥규(玉圭) 한 개, 홍공단 화본이다. 패옥(佩玉) 1개, 홍공단 화본이다. 유청색(柳靑色)의 운문단(雲紋緞) 이불 1벌, 안감은 백공단(白貢緞)으로 하였다. 자색의 지초문양(芝草文樣)의 벼개 1개, 홍공단으로 만든 9척 길이의 편의(片衣) 1벌, 홍공단으로 만든 3척 길이의 편의 5벌, 오색고단(五色庫緞)으로 만든 편의 90장, 빈자리를 보충하기 위한 각 색 공단(貢緞)과 고단(庫緞) 70필을 사용하였다.총호원(總護員)에서 ‘관의 은못 위에 덧칠하는 일을 이달 27일에 시작하며 10번을 하루 걸러 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금번에는 매일하라. 그리고 산릉주감 제조 민영달(閔泳達)이 지관 등을 데리고 금곡(金谷)에 달려가 산을 봉심하고 별단(別單)으로 서입(書入)토록 하라.”하였다. 또 전교하기를“금곡을 다시 봉심한 후에 그대로 봉표(封標)하라.”하였다.총호원(總護員)이 ‘금곡(金谷)을 다시 간심(看審)한 후 이어 봉표(封標)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월 27일 미시(未時)에 성복(成服)을 하였다.황태자 전하는 참최(斬衰) 3년이다. 의상(衣裳), 매우 거친 생포로 만들며 마감질을 하지 않는다. 중의(中衣), 최복(衰服)을 입는 사람의 것은 약간 거친 생포(生布)로 만들며 마감질을 하지 않는다. 관(冠), 약간 거친 생포를 사용한다. 마를 꼬아서 무(武)와 영(纓)을 만든다. 건(巾), 최관(衰冠)을 쓰는 자의 것은 거친 생포로 만든다. 수질과 요질과 교대(絞帶), 모두 생마(生麻)로 만든다. 마로 꼰 새끼줄로 수질(首絰)과 요질(腰絰)을 맨다. 죽장(竹杖), 관리(菅履)를 착용한다. 졸곡(卒哭) 뒤에 시사(視事)할 때는 백포로 만든 겉옷, 생포를 사용하였다. 베로 싼 포리(布裹) 익선관(翼善冠), 갓도 베로 싼다. 베로 싼 오서대(烏犀帶), 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한다. 모든 상사(喪事)에 참여할 때는 최복을 입는다. 13개월이 되면 연제를 지내는데 의(衣)와 상(裳)을 개제(改制)한다.약간 엉성하게 짠 생포를 사용하며 마감질은 하지 않는다. ○부판(負版)과 벽령(辟領)과 최복을 벗는다. 중의(中衣),약간 거친 연포(練布)를 사용한다. 관(冠),약간 거친 연포를 사용한다. 연포로 무와 영을 만든다. 건,약간 거친 연포를 사용한다. 요질,칡을 다듬어 사용하며 연포로 맨다. ○수질은 하지 않는다. 교대(絞帶),약간 거친 연포를 사용한다. 죽장,그대로 사용한다. 마로 만든 신발을 신는다. 시사복(視事服)은 백포와 흰 베로 싼 익선관,갓도 흰 베로 싼다. 흰 베로 싼 오서대, 백피화를 착용한다.




25개월이 되면 상제(祥祭)를 지낸다. 참포(黲袍)와 익선관,손님을 대하기 위해 행차할 때는 흑립(黑笠)을 착용하고, 연거(燕居) 시에는 백립(白笠), 백포(白袍), 백사대(白絲帶)를 착용한다.오서대, 백피화를 착용한다. 27개월이 되면 담제(禫祭)를 지낸다. 현포(玄袍)에 익선관과 오서대, 흑피화를 착용한다. 담제(禫祭)를 지낸 후에는 황포(黃袍) 옥대(玉帶)를 착용한다.황태자비 전하는 참최 3년이다. 대수(大袖)와 장군(長裙)을 입는다.대수(大袖)는 본국의 긴 적삼이며, 장군은 치마로 지극히 거친 생포를 사용한다. 개두(蓋頭)와 두수(頭),개두는 본 국 여자의 갓을 대신하고, 두수는 머리 수건으로 대신하며, 모두 약간 거칠게 짠 생포를 사용한다. 죽차(竹釵),전계(箭竿)이다. 마대(麻帶),매우 거칠게 짠 생포로 대신한다. 포리(布履) 백면포로 만든다.를 착용한다. 13개월이 되면 연제(練祭)를 지낸다. 대수와 장군을 개제한다.약간 거칠게 짠 생포를 사용한다. 개두와 두수와 대 모두 약간 거칠게 짠 연포(練布)를 사용한다. 백피화를 착용한다. 25개월이 되어 상제를 지낸 뒤에는 짙게 물들인 옥색의 대수와 장군, 흑색의 개두와 두수와 대, 흑피화를 착용한다. 담제를 지낸 후에는 길복(吉服)을 입는다.의친왕,의친왕비,영친왕은 황태자 전하의 복(服)과 같다.귀인(貴人) 이하 궁인(宮人)과 궁속(宮屬) 및 종척(宗戚) 및 그 처는 참최 3년이다.




빈전(殯殿)에 나아가 석상식(夕上食)과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의 붕어(崩御)로 국장(國葬)을 행한다.오늘부터 3일 간 가무 음곡(歌舞 音曲)을 정지한다.총호원(總護員)이 의논하여 인산(因山)할 날을 택하여 별단(別單)을 올렸다.“홍릉(洪陵)의 왼쪽은 큰 산줄기가 둘러싸여 손방(巽方)과 진방(辰方)으로 떨어지고 을방과 진방으로 뻗어나갔으며, 묘(卯)방과 을(乙)방으로 떨어져 바뀌다가 갑술방(甲戌方)으로 우뚝 일어서고 묘방(卯方)에서 머리를 들어 축간방(丑艮)으로 솟았고 을방(乙方)을 등지고 신방(辛方)을 바라보는 좌향(坐向)이며, 간병방(艮丙方)에서 신방(辛方)을 얻어 건방(乾方)으로 합하여 경방(庚方)으로 나가 곤방(坤方)으로 돌아갔습니다.역사(役事)를 시작할 때, 풀을 베고 흙을 파는 일은 1월 30일 오후 4시에 하고, 후토신(后土神)에 지내는 제사 곧 산신제(山神祭)이다.는 같은 날에 하며, 먼저 옹가(甕家)를 짓습니다. 2월 6일 오전 6시에 금정(金井)을 열며, 같은 달 12일 오전 10시에 구덩이 깊이를 8척 3촌으로 파는데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합니다. 외재궁(外梓宮)을 배진(陪進)하는 시간은 같은 달 16일 오전 8시이고, 흙은 병임(丙壬) 방향에 모아둡니다. 외재궁을 내리는 시간은 같은 달 17일 오후 4시이고, 찬궁(欑宮)을 여는 시간은 3월 2일 오전 6시입니다.



발인(發靷)은 같은 달 3일에 하며 상여(喪輿)를 멈추되 꺼리는 방위는 곤방(坤方)입니다. 빈소를 만들고 대여(大轝)가 침전(寢殿)에 도착한 후, 일시(日時)에 따라 찬궁(欑宮)을 열고, 일시에 따라 현궁(玄宮)을 내리는 시간은 같은 달 4일 오후 4시 입니다.”하였다.홍릉(洪陵)을 천봉하는 날짜를 정하는 별단(別單)을 올렸다. 구능(舊陵)을 파헤치는 시간은 1월 30일 오후 4시인데, 후토신에게 고유제(告由祭)를 같은 날 먼저 지냅니다. 옹가(甕家)를 만드는 것은 일시(日時)에 따르며, 현궁을 꺼내는 시간은 2월 12일 오전 6시이며, 침전(寢殿)에 빈소(殯所)를 차리는 것도 일시에 따릅니다. 찬궁(欑宮)을 여는 것은 일시에 따르며, 발인(發靷)해 나가는 것도 일시에 따릅니다. 산릉(山陵)에 도착한 후 빈전(殯殿)을 차리고, 빈전(殯殿)에 모시는 것은 일시에 따르며, 찬궁(欑宮)을 여는 시간은 2월 16일 오전 8시 30분입니다. 현궁을 내리는 시간은 같은 날 오후 2시입니다.배왕 감독(陪往監督)에 남작(男爵) 민영기(閔泳錡)를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1월 28일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과 조상식(朝上食)을 올리고, 주다례(晝茶禮)를 행하고 석상식(夕上食)과 석전(夕奠)을 올렸다.1월 29일 천봉(遷奉)할 때의 수빈원(守殯員)에 이재덕(李載德), 민형식(閔衡植)을, 광중명정서사원(壙中銘旌書寫員)에 후작(侯爵) 박영효(朴泳孝), 행로명정서사원(行路銘旌書寫員)에 후작(侯爵) 윤택영(尹澤榮), 재궁상자서사원(梓宮上字書寫員)에 자작(子爵) 민영규(閔泳奎)를, 지문추기제술원(誌文追記製述員)에 자작(子爵) 민영규(閔泳奎)를, 서사원(書寫員)에 남작(男爵) 조동윤(趙東潤)을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2월 5일 총호원(總護員)이, ‘재궁에 칠을 한 포(布) 위에 덧칠하는 일을 각 년의 예에 의하여 10번씩 이틀에 한 번 진행하려 합니다.’라고 아뢰니, 답하기를,“이번에는 날마다 하도록 하라.”하였다.2월 8일 장의 제관 부장(葬儀祭官副長) 윤덕영(尹德榮)을 면직시키고 남작(男爵) 조동윤(趙東潤)을 임명하였다.상민(商民) 사일환(史一煥) 등이 봉도회(奉悼會)와 봉도단(奉悼團)을 만들어 인산(因山) 때, 대소 상여(喪輿)의 담배군(擔陪軍)과 인군(引軍) 등 각 항에 필요한 군정(軍丁)을 자원하여 거행하기로 하였다.2월 9일 빈전(殯殿)에 나아가 국장(國葬)의 봉고식(奉告式)을 행하였다. 이어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2월 12일 홍릉(洪陵)에서 현궁(玄宮)을 꺼냈다. 찬시(贊侍) 김관호(金觀鎬)를 보내어 봉심(奉審)하도록 명하였다.2월 13일 홍릉(洪陵)의 빈전(殯殿)에 친히 진향(進香)하는 것은 자작(子爵) 민영휘(閔泳徽)를 보내어 섭행(攝行)토록 하였다.



친히 지은 제문(祭文)에,“인자한 모습이 떠나보낸 지 이에 2기(紀)가 되었는데, 휘음(徽音)은 어제와 같도다. 유쾌한 얼굴빛은 어느 때였든가? 시와 노래로 자식을 보살펴 기르셨도다. 하늘과 땅은 끝이 없는데 동성(東城)은 밀접하고 가까웠도다. 능(陵)의 잣나무는 이미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데 근심을 품고 걱정하니, 훌륭하신 아버님에 의지할 뿐이다. 금일 아버님이 돌아가셔 거듭 재앙이 내리니, 황황(皇皇)한 슬픔은 마음을 아프게 하고 뼈를 사무치는도다. 빠른 세월은 순식간에 흘러 장차 발인(發靷)하려 하는데 금곡(金谷)에 아버님이 생전에 정하신 무덤자리는 그 점괘가 길조로다. 어찌 부우산(鮒隅山)에서 점을 치고 어찌 상설(象設)로 옮겨 오묘한 조화를 다시 보겠는가? 옥음(玉音)을 받들자니 정신이 혼미하여 슬픔에 의지하였다. 찬궁(欑宮)과 장막(帳幕)은 고요하기만 한데 보이는 곳마다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도다. 슬픔에 빠져 어찌 맡은 일을 감당하겠는가? 영세토록 편안하게 받들고자 하니 우뚝 선 저 오잠(烏岑)에 감히 향을 마련하여 비오니 높으신 영혼은 흠향하소서.”하였다.2월 15일 부무관(附武官) 강필우(康弼祐)에게 홍릉(洪陵)에 나아가 봉심하고 오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찬시(贊侍) 윤형구(尹逈求)에게 홍릉을 천봉할 때 큰 상여를 배종하도록 명하였다.명성 황후(明成皇后)의 영여(靈轝)가 금곡(金谷)의 산릉을 향해 떠나는데,능호(陵號)를 홍릉(洪陵)이라 하였는데 옛날 이름을 그때로 쓴 것이다.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2월 16일 홍릉(洪陵)을 천봉(遷奉)하여 현궁(玄宮)을 내리고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애책문(哀冊文)과 지석(誌石)은 옛 것에 22년 기미년(1919) 정월 16일 양주군(陽州郡) 미금면(渼金面) 금곡리(金谷里) 을좌(乙佐)에 옮겨 모셨다는 것을 더 새긴 후 그대로 사용하도록 명하였다.능을 옮기고 능소(陵所)에서 우제(虞祭)를 지내고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2월 19일 하교하기를,“수여 재궁원(帥舁梓宮員)은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이, 식재 궁원(栻梓宮員)은 백작(伯爵) 이완용(李完用)이 맡도록 하라.”하였다.




2월 23일 빈전(殯殿)에 나아가 친히 진향(進香)하였다. 황태자 전하가 친히 지은 제문(祭文)에,“하늘이 큰 임무를 내렸으니 때에 맞추어 할 일이 있다. 순(舜)임금과 우(禹)임금은 땅을 다스리고 오행(五行)의 운행을 고르게 하였으며, 물을 잘 흐르게 하고 산을 평평하게 하였고, 이어서 탕왕(湯王)과 문왕(文王), 무왕(武王)이 난세(亂世)를 치세(治世)로 바꾸었고, 이 세상을 돌봐주어 도(道)가 변하고 풍속에 스며드니, 앞 사람이 끼친 은택이 거듭 쌓였도다. 융성함이 극에 달하여 장차 쇠퇴하려 하였다. 부황이 이루신 것은 실로 이에 맞춘 것이니, 밝음이 발하여 어두움을 움직여, 양의(兩儀)가 순환하고, 의(義)는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판별하였으며, 예(禮)는 화이(華夷)의 구분을 엄격하게 하였다. 뜻이 작은 것에 있지 않으니 꾀하는 바가 여러 번 발흥하였다. 슬프다. 이제는 돌아가셨으니 어찌 차마 이를 참을 수 있으랴? 오호라 슬프도다. 소자가 어리석고 지혜가 부족함을 알지만, 가만히 부황의 덕성을 살펴보니 공손하고 총명하여 학문과 생각이 깊었으며, 효성은 신명(神明)과 통하였고, 학문은 독실하여 윤리에 밝으셨다. 따뜻하고 어질며 공손하고 검소하여 정치를 계발하고 인(仁)을 베푸셨도다. 제사(祭祀)와 전범(典範)을 더욱 엄히 하여 살찐 희생과 깨끗한 곡물을 바치셨다. 일을 처리함은 인정과 이치에 합치하였고, 부지런히 강구하여 조정의 의식(儀式)과 나라의 예절(禮節)은 오직 옛 것을 으뜸으로 삼으니, 일국의 전범(典範)이 아닌 것이 없었다. 모든 관리들에게 명하여 가르쳐 주거나 혹은 의심나는 바를 자주 물어, 만기(萬機)를 모두 살펴서 부지런히 정치를 하면서도 피로해하지 않았다. 여러 번 어려운 근심거리를 겪었으나 모두 알맞게 조치하여 큰 명호가 이미 융성하였다. 명령을 밝혀 스스로 남기니, 그 표준이 있어 영원히 굳건한 황업의 기틀이 세워졌도다.



일에 싫증이 나면 저녁 경치를 즐기면서 서쪽 대궐로 멀리 나가시니 곤룡포(袞龍袍)는 아름답고 의젓하였다. 망망한 허공에 한 점의 구름처럼 홀연히 가시니 오호라 슬프도다, 사람으로 부친이 없는 사람이 누구이며, 누가 이 슬픔을 알겠는가? 남은 음덕을 욕되게 이은 즉 못난 아들의 모습이다. 자식을 사랑으로 어루만져 보살펴 기르셨는데, 사랑하면서도 엄격한 자세를 늦추지 않았고, 대하는 물건마다 가르쳐 알게 하였으니 아버지의 도리와 임금의 도리, 스승의 도리를 겸하였도다. 45년을 한결같이 모범을 이루니 소자는 기로(耆老)에서 늙기를 기약하였다. 양지가 거의 이루어지고 해이(解頤)를 잇기를 바랐다. 한밤중에 창황하게 신께 묵묵히 기도하였으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부친이 돌아가시게 되어 외로운 고아가 되었다. 두 남동생과 한 명의 여동생이 에워싸고 가슴을 치며 서로 끌어안고, 거리에서 부르짖고 골목에서 울어대며,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이 흩어지니, 현명한 사람과 친하고 이로움을 즐거워하는 것을 이에서 보겠도다. 오호 슬프도다. 예에 마땅하기가 아직 머니 지체할 수가 없다. 저 금곡(金谷)의 동산은 일찍이 구의산(九疑山)에서 점을 쳐 노(魯)나라가 공자(孔子)와 안자(安子)를 모신 곳과 같이 길한 곳이다. 치세의 운명이 여기에 있으니 의심하는 것 같고 구하는 것 같다. 지극한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데 슬픈 바람은 무덤 위에 쓸쓸하다. 붉은 깃발을 세운 흰 천막에서 감히 마음으로 향을 올리니 피눈물이 흐르는도다. 오호 슬프도다.”하였다.





2월 26일 의례(儀禮)에 따라 태묘(太廟)에 시호(諡號)를 청하였다. 2월 27일 빈전(殯殿)에 나아가 시호 책보(諡號冊寶)를 올리고 이어 개명정 별전(改銘旌別奠)을 행하였다.3월 2일 빈전(殯殿)에 나아가 찬궁(欑宮)을 열었다. 이어서 조전(朝奠)과 조상식(朝上食), 주다례 겸 계빈전(晝茶禮啓殯奠), 조전(祖奠), 석상식(夕上食), 석전(夕奠)을 행하였다.3월 3일 진시(辰時)에 영여(靈轝)가 출발하여 훈련원(訓練院)에 이르러 국장식(國葬式)을 행하였다. 이어 금곡(金谷)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대가(大駕)가 영여(靈轝)를 따라갔다.해시(亥時)에 영여(靈轝)가 금곡(金谷)의 빈소(殯所)에 도착하였다. 성빈전(成殯奠)을 행하였다.3월 4일 해시(亥時)에 현궁(玄宮)을 내리고 이어 입주전(立主奠), 초우제(初虞祭)를 행하였다.고조 광무제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오호 슬프도다. 우리 고조 광무제의 총명하고 예지로운 모습과, 따뜻하고 선량하며 공손하고 검소한 덕으로 그 나라를 오랫동안 다스리고, 정사에 힘쓰며 훌륭한 계책이 때를 타니, 우리나라의 백성들 중에서 깊고 두터운 은혜에 젖어 윤택하게 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윽한 향기가 하늘에 알려져 순수한 축복이 내린 것이다.지난해 영수각(靈壽閣)에 제첩(提帖)한 일은 5백 년간에 겨우 네 번 있었던 예식이었는데, 요(堯)임금이 왕위를 물려준 것과 같고,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이 근심이 없는 것과 같으니, 물러나서 몸을 보양함에 추앙하며 축복함이 끝이 없었다.



오호라. 높은 하늘이 화를 내려서 무오년(1918) 12월 19일 임금께서 몸이 편찮으시어 20일 계유(癸酉)에 경운궁(慶運宮)의 함녕전(咸寧殿)에서 붕어하시니 보령이 67세였다. 온 나라 사람 모두가 크게 놀라 성안부터 궁벽한 산골의 벽촌에 이르기까지 노인, 젊은이 할 것 없이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통곡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이로써 어진 사람을 친히 여기고 이로움을 즐거워하는 생각은 강제로 권면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우리 황태자 전하께서는 매우 애통해 하시며 조정(朝廷)에 묻고 옛 제도를 살폈으므로 삼가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문헌 무장 인익 정효(文獻武章仁翼貞孝)’라 하였다. 그 다음 해인 기미년(1919) 2월 3일 을묘(乙卯)에 홍릉(洪陵)에 합장하였는데, 능은 양주(陽州)의 금곡(金谷)에 있으며 을좌향(乙座向)이다. 이 곳은 고조 광무제께서 미리 묘소로 정하신 곳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먼저 이곳에 이장(移葬)하였다. 우리 황태자 전하(殿下)께서는 신이 가장 오랫동안 임금의 은덕을 받았다고 하여 유궁(幽宮)의 지문(誌文)를 찬술하도록 명하였다. 신이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삼가 피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리며 글을 바칩니다.




고조 광무제의 성(姓)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희(熙), 자(字)는 성림(聖臨)인데, 처음의 휘(諱)는 재황(載晃)이고 자(字)는 명부(明夫), 호(號)는 주연(珠淵)으로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의 둘째 아들이다. 여흥순목대원비(驪興純穆大院妃) 민씨(閔氏)에게서 임자년(1852) 7월 25일 계유(癸酉)에 정선방(貞善坊) 사저(私邸)에서 탄생하였다. 계해(癸亥) 12월 철종 장황제(哲宗莊皇帝)가 붕어하시자 고조 광무제께서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의 명을 받들어 궁에 들어가 대통을 잇고, 문조 익황제(文祖翼皇帝)의 양자가 되었다. 익황후(翼皇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는데 이때 고조 광무제의 나이 12세였다. 병인년(1866)에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따님을 얻어서 비(妃)로 삼았는데, 이 분이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우리 전하(殿下)는 둘째 아들로 탄생하였는데, 1남인 원자(元子)와 삼남인 대군(大君), 사남인 대군, 1녀인 공주(公主)는 모두 요절하였다. 완왕(完王) 이선(李墡)과 의왕(義王) 이강(李堈)과 세 따님은 모두 후궁인 귀인(貴人)에게서 태어났다. 고조 광무제의 후궁 귀비 엄씨(貴妃 嚴氏)는 영친왕 이은(李垠)을 낳으셨는데, 서열이 세 번째이다.오호라 고조 광무제는 천품이 빼어나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여 55년 동안 임금의 자리에 계셨는데, 융성한 덕과 커다란 업적은 역사에 다 쓰지 못할 정도이다.



그러나 지문(誌文)의 엄한 형식에 따라서 삼가 그 대략(大略)을 모아서 쓴다.경연과 소대(召對)가 중단되는 일이 없었고, 어려운 경사(經史)의 심오한 뜻을 질의하고 토론하면서, 지난 옛날의 득실을 의논하고 연구하였다. 이에 학문이 얕은 유신(儒臣)들은 경연장에 들어가기를 꺼릴 만큼 학문을 좋아하였다.대왕대비(大王大妃)의 가르침을 받들어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부드러운 안색과 유순하고 온화한 몸가짐으로 반드시 공경하고 근실하였다. 무릇 몸을 편안하게 하고 뜻을 기르는 일에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대왕대비가 돌아가심에 이르러 안색이 수척해지도록 곡(哭)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니 좌우가 모두 감동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몸소 행하였고 춥고 더운 날씨에 구애받지 않았으니 효성이 돈독하였다.태묘(太廟)와 사직(社稷)과 전궁(殿宮)에서 능침(陵寢)에 친히 제사를 지내고 절을 하는 것은 해마다 일상적인 규례였다. 희생과 술과 홀과 폐백을 놓는 등의 제사의 절차를 몸소 검사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전례(典例)에 부합되도록 힘썼으니 조상을 받든 것이다.보좌하는 재상(宰相)을 택할 때는 반드시 나이 많은 원로로 하며 그가 조정에 나오고 물러감에 예로서 대우하고, 한 때 도(道)를 지키며 은거해 있던 선비들을 예우하면서 성의를 다하여 초청하였으니 현명한 사람을 가까이 한 것이다.바르고 좋은 말을 올리는 자가 있으면 비록 실정에 맞지 않더라도 끝에는 반드시 너그럽게 용납하였으니 간언(諫言)을 잘 받아들인 것이다.




몸소 문묘(文廟)에 제사를 지내고 선비를 기르는 데 필요한 물품을 넉넉히 내려 교육을 진흥하여 사문(斯文)을 부양하고 허물어진 풍속을 바르게 하는 대강을 세웠으니 유학(儒學)을 숭상한 것이다.적전(籍田)을 경작하고 보리베는 것을 살피며 매년 정월에 권농 윤음(勸農綸音)을 반포하여 촌야의 노부가 감격하고 권면함을 알게 되었으니 근본에 힘쓰셨도다.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해나, 물에 떠내려가거나 불타버린 집이 있으면 마음을 다하여 구제하여 하나도 죽거나 수척하지 않았으니 재난을 구휼하였도다.시대에 맞게 제도(制度)를 바로잡으며 여러 사람들의 뜻을 살펴 힘쓰고, 대호(大號)를 올리고 제도를 바꾸며, 황단(皇壇)에 배향(配享)하여 제사를 지내 왕을 추존(追尊)하는 예를 지내었다. 진전(眞殿)의 제 1실을 추증하여 받든다거나, 목청전(穆淸殿)을 고쳐 건축하며, 조경단(肇慶壇), 준경묘(濬慶墓), 영경묘(永慶墓)에 모두 차례대로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은 고조 광무제가 의(義)를 일으키고 선대의 조상을 추모하며 근본에 보답한 것이다.한가할 때에 행하신 말과 행동도 법도가 되었으니 외인이 감히 넘겨다 볼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하늘의 빛이 땅에 비치는 곳에서는 드러눕지 않았으며, 성인의 경(經)이나 현인의 전(傳), 조종(朝宗)의 보첩(譜牒)을 대할 때는 손을 모으고 존경을 표현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어려운 시절을 만나서 여러 번 어려운 일을 겪었으나 매번 묵묵히 신묘하게 기미를 살펴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전환시켰다. 정치를 구하는데 부지런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사에 쉴 틈이 없었다. 예식에 쓰는 물건이나 전장(典章)의 세밀한 것과 같은 일도 또한 모두 살펴보고 지도하니 여러 유사(有司)들이 따르고 받들어 어김이 없었다. 관명(官名)을 경장(更張)하고 군사 제도를 변화시키고 정리하는 등의 일은 모두 정밀하고 옛 법식(法式)에 따랐으며 대한제국의 수명이 영원히 존속하기를 기원하는 뜻을 잊지 않았다.고조 광무제가 예전에 경연(經筵)하는 신하에게 이르기를“인군(人君)인 나로부터 명이 만들어지니 진실로 명이라 말하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또 이르기를“사람으로 누가 잘못이 없겠는가. 고치면 선하게 된다.”하였으니, 위대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오호라 고조 광무제의 덕을 숭상함과 지극한 선(善)은 삼황(三皇)에 추가하여 넷으로 되고, 오제(五帝)에 더하여 여섯이 될 정도이다. 그러나 치세(治世)는 뜻대로 되지 않고 마침내 쇠퇴하는 큰 물결을 돌리지 못하니 이른바 기수(氣數)가 있는 것인가. 신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여 통곡하며, 죽고자 했으나 죽지도 못하였다.명성황후(明成皇后)께서 대궐 안에서 행하신 덕행과 아름다운 모범은 이미 임금께서 지으신 지문(誌文)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신이 부질없이 쓸 필요가 없다.전 의정(議政) 민영규(閔泳奎)가 썼다.
2012-10-16 10: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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