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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 붕어(崩御)
icon 김민수
icon 2012-10-16 09:3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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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 붕어(崩御)




1926년 4월 8일 영친왕이 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의 환후(患候)가 극심하다는 것을 전달받고 유럽 유람(遊覽)을 중지하고 덕혜옹주(德惠翁主)와 함께 돌아와 문후(問候)를 아뢰었다.4월 9일 의친왕과 후작(侯爵) 박영효(朴泳孝), 자작(子爵) 윤덕영(尹德榮), 자작 민영휘(閔泳徽), 후작 이달용(李達鎔) 및 여러 종실(宗室)과 외척(外戚)이 돌아가면서 문안하였다.4월 25일 묘시(卯時)에 순종 융희제가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붕어(崩御)하였다. 다음날이 복(復)을 하였다.복(服)을 바꾸었다. 영친왕이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소복(素服)을 입었고 옷옷 자락을 끼우고 추포(麤布)로 만든 버선발이었으며 순정황후는 관(冠)과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소복과 소혜(素鞋)와 추포로 만든 버선을 신었다.4월 26일 순종 융희제의 붕어에 대한 궁중상(宮中喪) 발포(發布)에 의하여 궁중(宮中)에 참내(參內)하는 자(者)는 황실상복규정(皇室喪服規程)에 의한 상복(喪服)을 착용(着用)할 것을 앙출(仰出)하였다.빈전(殯殿)과 혼전(魂殿)은 선정전(宣政殿)으로 하고 초명정 서사(初銘旌書寫) 처소(處所)는 희정당(熙政堂)으로 하였다.남작(男爵) 민영기(閔泳綺)가 다음날 습(襲)할 때 종척(宗戚) 및 당직 장관(當職長官) 이하의 사람들이 들어와 참석한다고 아뢰었다. 또 습(襲)한 후에 종척(宗戚) 및 당직 장관 이하의 사람들은 끝까지 임하여 거행(擧行)하고 이로부터 성빈(成殯) 때까지 매일 조곡(朝哭)과 포곡(晡哭)을 하고 성복(成服)한 후에 인산(因山)에 이르기 전까지 창덕궁(昌德宮) 안에 입직(入直)하는 인원(人員) 및 종척, 당직 장관 이하 입궁(入宮)하는 사람들은 아울러 조곡(朝哭)에 들어와 참석하고 포곡(晡哭)할 때 또한 임하여 거행하기를 허락한다. 그리고 최복(衰服)을 입고 곡(哭)을 매우 구슬프게 울며 네 번의 배례(拜禮)를 행한다고 아뢰었다. 또 오례의(五禮儀)에 의하여 단지 조석(朝夕)으로 상식(上食)을 올리며 전에는 국휼(國恤)이 있을 때와 같이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던 전례(前例)에 의하여 거행한다고 아뢰었다.



후작(侯爵) 윤택영(尹澤榮)을 총호원(總護員)에 차하(差下)하였다. 후작(侯爵) 이해창(李海昌), 후작 이해승(李海昇)을 대전원(大奠員)에, 후작 이해창(李海昌)·민경호(閔京鎬)를 수릉원(守陵員)에 차하하였다. 자작(子爵) 민영휘(閔泳徽), 백작(伯爵) 이지용(李址鎔)·이우면(李愚冕)을 빈전 주감 제거(殯殿主監提擧)에 임용하였으며 자작(子爵) 윤덕영(尹德榮), 남작(男爵) 이재극(李載克)·이재곤(李載崑)을 어장 주감 제거(御葬主監提擧)에, 홍순형(洪淳馨), 윤용구(尹用求), 남작 김종한(金宗漢)을 산릉 주감 제거(山陵主監提擧)에, 후작 박영효(朴泳孝), 자작 민영휘(閔泳徽), 자작 민병석(閔丙奭), 자작 윤덕영(尹德榮)·홍순형(洪淳馨)·윤용구(尹用求), 백작 이지용(李址鎔), 남작 이윤용(李允用), 남작 이재극(李載克)·이재곤(李載崑)·민영찬(閔泳瓚), 후작 이달용(李達鎔)은 어장(御葬)할 때 고문에 차하하였다. 또한 이건(李鍵), 이우 공(李鍝公)과 후작 박영효(朴泳孝), 후작 이재각(李載覺), 후작 이달용(李達鎔), 후작 이해창(李海昌), 후작 이해승(李海昇), 백작 이지용(李址鎔), 자작 이기용(李埼鎔), 자작 이완용(李完鎔), 자작 윤덕영(尹德榮), 자작 민영휘(閔泳徽), 남작 이재극(李載克), 남작 민영기(閔泳綺)·윤용구(尹用求), 남작 한창수(韓昌洙)·민영린(閔泳璘)·민영찬(閔泳瓚)·이우면(李愚冕), 자작 민충식(閔忠植)·이규용(李逵鎔)·이관용(李鎔)·조남승(趙南升)·조남복(趙南復)·조정식(趙鼎植)·김택진(金宅鎭)·김용진(金容鎭)·이해선(李海善)·이해문(李海文)·이재구(李載九)·이재국(李載國)·이재택(李載宅)·이재구(李載龜)·이재연(李載兗)·이좌용(李佐鎔)·이우용(李佑鎔)·이호용(李澔鎔)·이윤용(李潤鎔)·이봉용(李鳳鎔)·조한극(趙漢克)·조한억(趙漢億)·조한익(趙漢翼)·이명구(李明九)·민정식(閔庭植)·김효진(金孝鎭)·김충진(金忠鎭)·김신진(金信鎭)·김진숙(金鎭宿)·윤숙영(尹肅榮)·윤건영(尹建榮)·윤헌영(尹獻榮)·민범식(閔範植)·민장식(閔章植)·민광식(閔光植)·민준식(閔俊植)·민홍식(閔弘植)·윤홍섭(尹弘燮)·윤정섭(尹正燮)·윤동섭(尹同燮)·윤장섭(尹章燮)·윤소영(尹召榮)·윤병섭(尹丙燮)·윤범구(尹範求)·민효식(閔孝植)·민위식(閔暐植)·박길서(朴吉緖)·윤흥구(尹興求)·이재석(李載錫)·김태규(金泰圭)·민형식(閔衡植)·이인용(李寅鎔)·홍규식(洪奎植)·이천용(李天鎔)·민대식(閔大植)·민규식(閔奎植)·김정진(金定鎭)·김영진(金寧鎭)·민경식(閔景植)·민건식(閔健植)·유홍준(兪弘濬)·이병찬(李丙瓚)·이재관(李載寬)을 종척 집사(宗戚執事)에 차하하라고 명하였다.



4월 27일 미시(未時)에 목욕(沐浴)과 습(襲)을 하고 전(奠)을 드렸으며 신시(申時)에는 소렴(小斂)을 하고 전(奠)을 드렸다. 모두 의례(儀禮)와 같이 하였다.소렴 의대(小斂衣襨)는 황포(黃袍) 하나 흉배(胸背)에는 용(龍)을 수놓은 원령(圓領)이다., 저사 답호(紵絲褡)이 하나 반견의(半臂衣)이다., 철릭이 하나, 다음은 나원령(羅圓領)이 하나, 답호(褡)가 하나, 철릭이 하나 이상 포습(鋪襲)이다., 다음은 홍저사원령(紅紵絲圓領)이 하나, 답호이 하나, 백초고(白綃袴)가 둘이다.장생전(長生殿)의 재궁(梓宮)은 수망진자재궁(首望珍字梓宮) 내장(內長) 6척, 외장(外長) 6척 6촌, 내광(內廣)이 1척 5촌 5분, 외광(外廣)이 2척 1촌 5분, 내고(內高)가 1척 5촌 5분, 외고(外高)가 2척 1촌 5분이다.으로 재결(裁決)하여 봉입(奉入)하였다.초명정 서사원(初銘旌書寫員)에 윤택영(尹澤榮)을 개명정 서사원(改銘旌書寫員)에 윤용구(尹用求)을 하현궁명정 서사원(下玄宮銘旌書寫員)에 민병석(閔丙奭)을 차하(差下)하였다.4월 28일 미시(未時)에 재궁(梓宮)을 받들어 인정전(仁政殿) 동행각(東行閣)에 임시로 안치하였다.4월 29일 미시(未時)에 선정전(宣政殿)에 영상(靈床)을 이봉(移奉)하였다.신시(申時)에 대렴(大斂)과 하재궁(下梓宮)을 행하고 전(奠)을 시행하였는데, 의례(儀禮)와 같이 하였다.술시(戌時)에 성빈(成殯)하였다.민영기(閔泳綺)가 시호(諡號)를 정할 날짜를 의논했는데, 5월 1일이 길(吉)하다고 해서 이날 행하기로 정하였다. 종척(宗戚) 및 고문관(顧問官), 본직 장관이 같이 회의에 참여했고 묘호(廟號), 전호(殿號)도 같은 날에 의논하게 한다고 입계(入啓)하였다.총호원(總護員)에 윤택영(尹澤榮)을, 행장 제술원(行狀製述員)에 윤덕영(尹德榮)을, 시책문 제술원(諡冊文製述員)에 이재곤(李載崑)을, 서사원(書寫員)에 이우면(李愚冕)을, 애책문 제술원(哀冊文製述員)에 민영휘(閔泳徽)를, 서사원에 민영찬(閔泳瓚)을, 지문 제술원(誌文製述員)에 윤용구(尹用求)를, 서사원에 민병석(閔丙奭)을, 표석 음기 제술원(表石陰記製述員) 및 서사원에 박영효(朴泳孝)를, 대자 전문(大字篆文) 및 시보 전문서사원(諡寶篆文書寫員)에 박영효(朴泳孝)를 임명할 것을 계청(啓請)하여 차출(差出)하였다.총호원(總護員)이 재궁(梓宮)에 은정(銀釘) 위의 가칠(加漆)을 이달 30일에 시작하여 하루간격으로 10번 칠할 것에 준하여 할 것을 아뢰었다. 답(答)하기를,“이번에 날마다 하도록 하라”하였다.



5월 1일 미시(未時)에 성복(成服)하였다.총호원(總護員) 후작(侯爵) 윤택영(尹澤榮)이 본원(本員)으로 산릉주감 제거(山陵主監提擧) 홍순형(洪淳馨)·김종한(金宗漢), 본직(本職)장관(長官) 민영기(閔泳綺) 등과 함께 상지원(相地員) 등을 거느리고 홍릉(洪陵) 국내(局內)에 달려나가 간심(看審)하고 들어와 산론별단(山論別單)을 수정하여 들인다고 아뢰었다. 명(命)하기를,“다시 간심한 후에 이어 봉표(封標)를 세우라.”하였다. 또 명하기를,“이번 장례(葬禮)를 지내는 것은 이미 홍릉 국내로 정했으므로 유릉(裕陵)을 먼저 옮기고 부의(祔儀)를 편하게 하는 것이 정례(情禮)에 합당할 것이다. 본직 장관과 산릉 주감 제거는 별도로 유사(有司)에 신칙(申飭)하였다. 즉시 택일(擇日)하여 거행(擧行)하게 하고 유릉을 옮길 때는 장례에 임하는 총호원 이하 세 주감(主監) 들이 겸관(兼管)하여 거행하라.”하였다. 또 명하기를,“천봉(遷奉) 봉표는 신봉(新封)을 다시 간심한 후에 봉표할 때 동시에 거행하게 하고 동혈 삼분제(同穴三墳制)로서 재정(裁定)하라.”하였다. 민영기(閔泳綺)가 아뢰기를,“묘호(廟號)의 망단자(望單子)는 순종(純宗), 경종(敬宗), 성종(誠宗)으로 하였는데 수망(首望)대로 하라고 칙지를 내렸으며, 시호(諡號)의 망단자는 문온(文溫), 무녕(武寧), 돈인(敦仁), 성경(誠敬)이며 존호(尊號)의 망단자는 효(孝)인데 모두 예언대로 하라고 칙지를 내렸다. 전호(殿號)의 망단자는 효령(孝寧), 효성(孝成), 효정(孝靖)인데, 수망대로 하라고 칙지를 내렸다.명(命)하기를,“지석(誌石)은 각년(各年)의 예에 의하여 오석(烏石)으로 하라.”하였다. 또한 명하기를,“정헌집(正軒集), 삼경사서(三經四書), 문헌비고(文獻備考), 완염통고(琓琰通考)를 당연하게 내렸으므로 퇴광(退壙)에 봉안(奉安)하라.”하였다.남작(男爵) 이윤용(李允用)을 어장(御葬)할 때 배종 감독(陪從監督)으로 차하(差下)하였다.



5월 3일 김승규(金昇圭)를 빈전 관리(殯殿管理)에 임용하였다.5월 5일 총호원(總護員) 후작(侯爵) 윤택영(尹澤榮)이, 본원(本員)과 산릉 주감 제거(山陵主監提擧)가 상지원(相地員) 등을 같이 거느리고 금일(今日) 홍릉(洪陵) 국내(局內)에 나가 충분히 의논하고 확실히 정한 후에 홍릉 왼쪽 언덕에 당일(當日) 오전 11시 묘방(卯方)으로 앉아 유방(酉方)으로 향하는 곳에 정혈(正穴)을 재정(裁定)하였으며, 곧 예에 의해 봉표(封標)를 세우고 이어 길을 돌아왔다고 아뢰었다.민영기(閔泳綺)가 오늘 인산(因山) 및 천릉(遷陵)할 때에 각 항의 길일(吉日)을 회의하여 택일하였는데, 유릉(裕陵)에 풀을 베고 흙을 파헤치는 일을 처음 시작할 날을 5월 7일 오후 2시로 하고, 개금정(開金井)은 5월 18일 오전 10시로 하고, 발인(發靷)은 6월 10일 오전 8시로, 임금의 하현궁(下玄宮)은 6월 11일 오후 10시로, 천릉하였다고 구릉(舊陵)에 계(啓)를 올리는 것은 5월 21일 오전 8시로, 발인은 6월 4일 오전 6시로, 하현궁은 6월 5일 오전 6시로 한다고 입계(入啓)하였다.5월 6일 민영기(閔泳綺)가 계청(啓請)하여 우주 서사원(虞主書寫員)에 민병승(閔丙承)을 차출하였다.5월 9일 총호원(總護員) 후작(侯爵) 윤택영(尹澤榮)이 침전(寢殿)을 당연히 새로 건립해야 하고 유릉(裕陵)을 옮기는 것이 이미 순종 융희제의 인산(因山) 전(前)이므로 순명황후(純明皇后) 신어상(神御床)을 봉안(奉安)할 가침전(假寢殿)도 또한 당연히 새로 건립해야 하는데 그러나 일자(日字)가 급박하고 공사(工事)가 커서 기한까지 준공되기 어려우므로 우선 홍릉(洪陵)을 천봉(遷奉)할 때의 예에 따라 가침전(假寢殿) 안에 판벽(板壁)을 사이로 순명황후 신어상을 전(殿)의 동쪽에 봉안하고 순종 융희제의 재궁(梓宮)은 전의 서쪽에 봉안하여 분설(分設)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임시로 편의(便宜)에 합당하다라고 아뢰었다. 답(答)하기를,“사세(事勢)가 이미 그러하니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장의 위원장(葬儀委員長) 유아사 소헤이는 총독부(總督府)에서 위원회(委員會)를 열고 성빈(成殯), 성복(成服), 사뢰 견전(賜誄遣奠), 발인(發靷), 봉결 침전(奉訣寢殿), 성빈 하현궁(成殯下玄宮) 반우제의(返虞諸儀), 사뢰봉결(賜誄奉訣) 외에는 대한제국의 구전(舊典)대로 하되 또한 황실상의(皇室喪儀)를 참고하여 작정(酌定)하기로 하고, 의장 사무(儀杖事務)는 육해군(陸海軍) 당국(當局)에 일임(一任)하기로 하고, 장의(葬儀) 당일(當日) 한성(漢城)에 있는 여러 관아(官衙) 학교(學校)는 휴가하고 가무 음곡(歌舞 音曲)은 정지하는 일을 의논하여 정하였다. 이어 총무(總務), 서무(庶務), 의식(儀式), 공영(工營), 회계(會計) 등 다섯 개의 관계 기구를 설립하여 사무를 나누어 담당하게 하였다.



5월 10일 민형식(閔衡植), 자작(子爵) 이완용(李完鎔)을 천릉(遷陵)시 수빈원(守殯員)에 차하(差下)하고, 이건(李鍵), 이우 공(李鍝公), 후작(侯爵) 박영효(朴泳孝), 후작 이재각(李載覺), 후작 이달용(李達鎔), 후작 이해창(李海昌), 후작 이해승(李海昇), 백작(伯爵) 이지용(李址鎔), 자작(子爵) 윤덕영(尹德榮), 자작 이기용(李埼鎔), 자작 이완용(李完鎔), 자작 민충식(閔忠植), 자작 민영휘(閔泳徽), 남작(男爵) 이재극(李載克), 남작 민영기(閔泳綺), 남작 한창수(韓昌洙)·윤용구(尹用求)·민영찬(閔泳瓚)·민영린(閔泳璘)·이우면(李愚冕)·이관용(李鎔)·이규용(李逵鎔)·김택진(金宅鎭)·김용진(金容鎭)·이해선(李海善)·이해문(李海文)·이재구(李載九)·이재국(李載國)·이재택(李載宅)·이재구(李載龜)·이재연(李載兗)·이좌용(李佐鎔)·이우용(李佑鎔)·이호용(李澔鎔)·이윤용(李潤鎔)·이봉용(李鳳鎔)·조남승(趙南升)·조남복(趙南復)·조한극(趙漢克)·조한억(趙漢億)·조한익(趙漢翼)·이명구(李明九)·민정식(閔庭植)·김효진(金孝鎭)·김충진(金忠鎭)·김신진(金信鎭)·김진숙(金鎭宿)·조정식(趙鼎植)·윤숙영(尹肅榮)·윤건영(尹建榮)·윤헌영(尹獻榮)·민범식(閔範植)·민장식(閔章植)·민광식(閔光植)·민준식(閔俊植)·민홍식(閔弘植)·윤홍섭(尹弘燮)·윤정섭(尹正燮)·윤동섭(尹同燮)·윤장섭(尹章燮)·윤소영(尹召榮)·윤병섭(尹丙燮)·윤범구(尹範求)·민효식(閔孝植)·민위식(閔暐植)·박길서(朴吉緖)·윤흥구(尹興求)·이재석(李載錫)·김태규(金泰圭)·민형식(閔衡植)·이인용(李寅鎔)·홍규식(洪奎植)·이천용(李天鎔)·민대식(閔大植)·민규식(閔奎植)·김영진(金寧鎭)·김정진(金定鎭)·민경식(閔景植)·민건식(閔健植)·유홍준(兪弘濬)·이병찬(李丙瓚)·이재관(李載寬)·송순억(宋淳億)·송순익(宋淳翊)·김일한(金一漢)·이병관(李秉寬)·윤필(尹泌)·윤주희(尹宙熙)·남필우(南弼祐)·이용세(李容世)·민병증(閔丙曾)·김운배(金雲培)·이순용(李淳鎔)을 천릉시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윤용구(尹用求)를 산릉 주감 제거(山陵主監提擧)에서 해임하고 민병한(閔丙漢)을 산릉 주감 제거로, 정만조(鄭萬朝)를 빈전 주감 제거(殯殿主監提擧)로 삼으라고 명하였다.민영기(閔泳綺)가 천봉(遷奉)할 때 광중 명정 서사원(壙中銘旌書寫員)에, 자작(子爵) 민영휘(閔泳徽)를, 행로 명정 서사원(行路銘旌書寫員)에 후작(侯爵) 윤택영(尹澤榮)을, 재궁 상자 서사원(梓宮上字書寫員)에 자작 민영휘를, 계찬궁원(啓欑宮員)에 백작(伯爵) 이지용(李址鎔)을, 지문 추기 제술원(誌文追記製述員)에 자작 민영휘를, 서사원(書寫員)에 민영린(閔泳璘)을 계청(啓請)하여 차출(差出)하였다.장의 위원회(葬儀委員會) 2회 회의에서 의결(議決)한 사항을 다음과 같다.1. 봉결 식장(奉訣式場)은 구 훈련원(舊 訓練院) 광장(廣場)으로 한다.1. 노부(鹵簿)는 보병대(步兵隊) 외에 해육군(海陸軍) 의장병(儀仗兵)을 가담케 한다.1. 배련(陪輦) 및 훈장(勳章)을 담당하는 장교(將校)를 배정한다.1. 원수마(元帥馬)는 정마(正馬) 1두(頭), 부마(副馬) 2두로 정한다.1. 위원장(委員長) 및 위원(委員) 일부도 참석한다.1. 각 계(係) 주임(主任)으로 총무(總務)는 이쿠타 세이사부로, 서무(庶務)는 후지와라 여시조, 의식(儀式)은 미쓰야 미야마쓰, 회계(會計)는 고오리야마 사토시, 공영(公營)은 이와이 초사부로가 맡기로 하고 임무를 분담한다.1. 사진반(寫眞班)은 도근(道筋) 및 식장(式場)을 촬영하는 것에 제한을 두어 허가한다.



5월 13일 민영기(閔泳綺)가 태묘(太廟)에 시호(諡號)를 청하고, 빈전(殯殿)에 시호(諡號)를 올릴 때의 독책원(讀冊員)에 정은조(鄭誾朝)를, 견전(遣奠)할 때에 독애책원(讀哀冊員)에 이순하(李舜夏)를 계청(啓請)하여 차출(差出)하였다.5월 17일 서상훈(徐相勛)을 어장주감 제거(御葬主監 提擧)로, 남규희(南奎熙)를 산릉주감 제거(山陵主監 提擧)로 삼으라고 명하였다.5월 18일 민영기(閔泳綺)가 천봉 발인(遷奉發靷)할 때 예당(禮堂)에 남작(男爵) 박기양(朴箕陽)을, 병당(兵堂)에 윤철규(尹喆圭)를, 공당(工堂)에 한진창(韓鎭昌)을, 돈체원(頓遞員)에 엄준원(嚴俊源)을 계청(啓請)하여 차출(差出)하였다.5월 19일 천봉(遷奉)하여 현궁(玄宮)을 낼 때 및 발인(發靷)하여 하현궁(下玄宮)을 내릴 때 솔여재궁원(帥舁梓宮員)에 남작(男爵) 민영기(閔泳綺)를, 식재궁원(拭梓宮員)에 자작(子爵) 민영휘(閔泳徽)를, 증옥백(贈玉帛員) 및 복토원(覆土員)에 후작(侯爵) 윤택영(尹澤榮)을 임명하라고 명하였다.5월 21일 민영기(閔泳綺)가 아뢰기를,“발인(發靷)할 때 봉사(奉辭) 및 반우(反虞)할 때에 지영(祗迎)의 절차(節次)를 마련해야 합니다. 삼가 등록(謄錄)을 살펴보니 혹 성문 밖, 혹은 궐문 밖에 마련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니, 답하기를,“당연히 여(轝)에 따라 하라”하였다.5월 25일 재궁(梓宮)의 상자(上字)를 영친왕이 친히 썼다.



5월 26일 유릉(裕陵) 순명황후(純明皇后)의 재궁(梓宮)을 봉출(奉出)하여 침전(寢殿) 찬궁(欑宮) 안에 이봉(移奉)하고 성빈(成殯)했으며 이에 영좌(靈座)를 설치하여 별전(別奠)을 행하였다.태묘(太廟)에 시호(諡號)를 청하고 빈전(殯殿)에 시호(諡號)를 올릴 때 청시(請諡) 및 상시원(上諡員)에 후작(侯爵) 윤택영(尹澤榮)을 삼으라고 명하였다.5월 27일 재궁(梓宮)을 결과(結裹)하고 이어 별전(別奠)을 행하였다.5월 29일 발인(發靷) 및 하현궁(下玄宮)할 때 솔여재궁원(率舁梓宮員)에 남작(男爵) 민영기(閔泳綺)를, 식재궁원(拭梓宮員)에 후작(侯爵) 박영효(朴泳孝)를, 복토원(覆土員)에 후작(侯爵) 윤택영(尹澤榮)을 임명하라고 명하였다.5월 31일 시책보(諡冊寶)를 빈전(殯殿)에 올렸고 명정(銘旌)을 고친 후 별전(別奠)을 행하였다.유릉(裕陵) 빈전(殯殿)에 친히 향(香)을 올렸고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을 보내어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친히 제문(祭文)을 지었는데,“오호라. 슬프도다. 옛날 후례(后禮)를 거치고 소자(小子)가 나이 8세 때 덕스러운 용모가 있고 매우 아름다웠으며, 곰곰이 살피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충정(忠貞)에 옛 공적이 오랬고 모래 기슭에 경사(慶事)가 남아 있었습니다. 효(孝)에 따르고 정절(貞節)이 고요하여 완곡하게 아름답고 공경(恭敬)을 깊게 했습니다. 때는 우리 황형(皇兄)이 춘저(春邸)에서 덕을 기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임금의 금슬(琴瑟)이 좋은 덕이 자연히 아랫사람에게 미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성스럽고 성스러워 짝하여 본받음이었습니다. 우리 돌아가신 아버님을 섬기기를 23년이었습니다. 황형(皇兄)이 효에 돈독하였으며 왕비의 내조(內助)가 서로 맞았습니다. 규중(閨中)에 범절(凡節)이 갖추어져서 육궁(六宮)이 칭송하였습니다. 중년(中年)에는 그윽하게 빛났으나 하늘이 나라의 자리를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위호(位號)는 두루 융성해졌습니다. 덕을 사모함이 새로운 것 같았으며 원(苑)에 의전(懿殿)을 깊게 했습니다. 해마다 때에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어찌 흉화(凶禍)를 생각했겠습니까? 갑자기 하늘의 무너짐을 맞이했습니다. 점을 쳤는데 새로운 길조(吉兆)가 있었습니다. 선릉(先陵)을 배호(陪護)하고 후장(后藏)에 우러러 생각했습니다.20년이 지나고 종래부터 풍수는 송사(訟事)를 모아 습한 것에 빛을 내리쬐고 물이 흐르고 씹는 것을 같이 했습니다. 예는 당연히 옮겨 합부(合祔)해야 했습니다. 현화(玄和)가 다시 임하여 장차 길을 이끌 것을 아뢰었습니다. 신과 사람의 이치가 함께하여 오직 아주 편안함을 헤아렸습니다. 여러 감정이 서러움을 뒤쫓았고 상여(喪輿)를 잡아당겨 한 곳으로 모았습니다. 소자는 두려워서 옛 일을 어루만지며 오늘을 슬퍼합니다. 향을 베푸는 전(奠)을 마련하고 드리움을 바라며 흠향(歆饗)합니다. 오호라. 슬프도다.”하였다.



6월 2일 빈전(殯殿)에 친히 향(香)을 올리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오호라. 슬프도다. 우리 황형(皇兄)이여. 도(道)가 온전하고 덕(德)이 갖추어졌으며 선행(善行)이 한없이 많았습니다. 하나같이 효(孝)라는 글자에서 근원하였습니다. 하늘을 성(誠)으로써 근본 하였으며 거짓과 허위가 없었습니다. 30년 동안 대궐에 있으면서 침전(寢殿)에 문안드리고 음식을 살폈습니다. 옆에서 반걸음도 떨어져 있지 않았으며 조금도 뜻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내선(內禪)에 처하여 승인하면서 슬퍼했으며 떨며 두근거려 했습니다. 그 때의 모양이 위태로웠고 천하(天下)에 많은 일이 있었으므로 의(義)가 급하게 괴란(壞亂)을 잡아야했습니다. 마음에 어찌 지위를 탐하였겠습니까? 몸이 스스로 있지 못했으며 노력을 해도 감히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4궁(四宮)에게 장수하기를 칭하고 만 가지 수레로 지극함을 봉양했습니다. 소의 간식(宵衣旰食)하기를 서로 얽혔으며 어지러움을 다스리고 다시 다스렸습니다. 우리 억조(億兆) 백성(百姓)을 생각하여 우리 온갖 관리를 바로잡아 경장(更張)하여 일신(一新)하였으며 자못 깊이 든 잠을 깨운 것과 같았습니다. 추운 겨울에 여러 지방을 살폈는데 남쪽으로 거슬러 가서 미침에 이르렀습니다. 일찍이 수레를 타고 나가 친히 밭을 갈았으며, 부리고 밀어주어 자신을 친하게 했습니다. 삼묘(三廟)를 추융(追隆)하여, 예(禮)가 의(義)로 인하여 일어났습니다. 양조(兩朝)의 보감(寶鑑)을 만들었는데, 나라의 전례(典禮)가 환하게 광채가 났습니다. 옛날에도 어찌 황급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오늘에야 실로 의를 따랐습니다. 고조 광무제는 아무 근심이 없이 말하기를, ‘훌륭한 태자가 순임금이 요임금을 돕는 것처럼 하니, 화평한 세상이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실로 믿기 어렵도다. 운이 기울어지고 일이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즉위하시어 무위(無爲)로 다스리시니 구중(九重) 궁궐이 엄숙해졌습니다. 사랑하고 사모하는 일념(一念)이 잠시라도 떨어지지 않아서 조를 심은 뜰에서 익은 조를 거두었고, 맛있는 음식이 있는 주방에 고깃점을 나누고, 직접 봉하여 붙여 조석으로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무랍(戊臘)에는 구휼하는 것을 성실하게 하였습니다. 나라의 예를 질서있게 하고, 반드시 전궤(奠饋)를 친히 행하였습니다. 궁전의 뜰에 꽃이 무성하자, 휘장을 설치하여 피하게 했으며, 능에 있는 풀이 가을 이슬에 젖으면 수레를 타고 달려갔습니다. 선조의 제사를 엄숙하게 지내서 희생과 술과 밥을 정결하게 지내니 역사에 밝게 빛나서 부끄러울 바가 없었습니다.



오호라. 슬프도다. 소자가 늦게 태어나서 노둔하고 약하고 어린 나이에 두 임금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배우기 위해 외국으로 유학을 가서 오래 모시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돈독한 우애를 보여주셨으며 늘 염려하였습니다. 만년에는 반드시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기를 기원했는데 오늘날에 다시 일이 어긋나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의약의 보람도 없이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으니 우리 유민(遺民)은 누구를 믿고 의지합니까? 여항(閭巷)에서 밤새 곡(哭)하는 소리에서 가히 임금의 혜택이 저들에게 미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임금의 지위를 잇는 것은 상전(常典)에 있으므로 마지못해 자리에 임하여 슬픈 마음으로 애도를 표했는데, 순삭(旬朔)의 기간이 순식간에 지났습니다. 오호라. 슬프도다. 우거진 금곡(金谷)의 숲에는 구름만이 몰려 있습니다. 평생 받드는 것이 진실로 효사(孝思)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감히 다스리라는 명령을 잊겠습니까? 그래서 분분한 의논을 일치시켜 우선 유릉(裕陵)으로 옮기고 태묘에 부묘하여 만세(萬世)에 덕을 드러내며 은혜를 높이고 시호(諡號)를 올렸습니다. 일을 조심스럽게 거행하고 법도를 따라 어기지 않았으니 보답을 도모하는 것이 이에서 머뭅니다. 슬픔이 하늘에 미쳐서 오래도록 길할 것입니다. 중하(仲夏:음력 5월) 초 2일. 하늘에 점점이 구름만 있으니 만사(萬事)가 버려지는 것 같습니다. 바람이 붉은 깃발을 움직이니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감히 연이어 술을 따르니 무릇 흠향(欽饗)하소서. 오호라. 슬프도다.”하였다.



6월 3일 신시(申時)에 유릉(裕陵)에서 빈전(殯殿) 안에 임금의 관을 놓아두던 찬궁(欑宮)을 열고 별전(別奠)을 행하였다.김승규(金昇圭)를 빈전주감 제거(殯殿主監 提擧)에 벼슬을 임명하는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6월 4일 묘시(卯時)에 견전(遣奠)을 행하였다.진시(辰時)에 순명황후(純明皇后) 영여(靈轝)가 금곡(金谷) 인산(因山) 전에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아니한 임금의 능(陵) 산릉(山陵)을 향하여 출발하였다.6월 5일 묘시(卯時)에 하현궁(下玄宮)을 행하였다.진시(辰時)에 첫 번째 우제(虞祭)를 행하였다.6월 9일 인시(寅時)에 발인(發靷)할 준비로서 출구(出柩)하려고 빈소(殯所)를 여는 계빈(啓殯)을 행하였다.신시(申時)에 장사에 앞서 아침에 영전에 제사지내는 조전(祖奠)을 행하였다.6월 10일 묘시(卯時)에 발인할 때에 문 앞에서 제사지내는 견전(遣奠)을 행하였다.시신(屍身)을 장지(葬地)로 운반하는 영여(靈轝)가 금곡(金谷)을 향하여 떠났다.훈련원(訓練院) 광장(廣場)에서 장사 지내기 전에 죽은 사람을 영원히 떠나 보낸다는 뜻으로 행하는 봉결식(奉訣式)을 행하였다. 칙사(勅使), 어사(御使), 각 궁의 대표, 종척(宗戚), 귀족(貴族) 및 황제가 임명하는 최고위 계급인 칙임관(勅任官) 가운데 특히 높은 지위의 관료 친임관(親任官) 이하가 모두 신위에 향을 올리는 진향(進香)하였다.6월 11일 해시(亥時)에 재궁(梓宮)을 현궁(玄宮)에 내려 묻는 하현궁(下玄宮)을 행하였다.입주전(立主奠) 및 혼령을 위안하기 위하여 장사지낸 뒤 처음 제사지내는 초우제(初虞祭)를 행하였다.
2012-10-16 09:3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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